[성경사전] 평화(平和)=화평(和平)-샬롬 shalom (평화,안녕)
[히] 샬롬 (shalom) [아] 셰람 (shelam) [그] 에이레네 (eirene)
[영] Peace 성서에 있어서는 전쟁의 대립개념으로서 쓰는 말.
그러나 평화, 화평, 평안, 평강 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샬-롬-]은, 단지, 전쟁이 없다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무엇에 의해서도 저해되는 일 없는 개인 및 공동체의 생활에 있어서의 정신적, 물적, 육체적으로 자유, 완전한 이상적 충족상태를 말한다.
원래, 이 말은, 무엇인가 결여되거나 손상되어 있지 않은 충족 상태를 가리키고, 그것이 다시 무사(창 29:6), 안부(창 43:27), 평안(삼하 18:29,잠 3:2), 건강(시 38:3), 번영(시73:3), 안심(창 15:15,26:29,출 18:23,사 55:12,시 4:8), 친화 (창 13:8,34:21,렘 20:10,시55:20,133:1), 화해(수 9:15,왕상 20:18) 등 인간의 생의 모든 영역에 걸쳐, 참으로 소망스러운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평화는,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일(역사)하심이며(사 45:7,57:19,욥 25:2), 하나님의 은사이다(레 26:6,시 29:11,122:6,사 26:12).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무관계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의지에 기초하여 정의를 행하는 일에 의해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를 올바르게 보전 유지하는데 있어서만이 현실화 되는 것이다(민 6:26,25:12,삿 6:24,대상 23:25,시 85:8,사 26:3,렘 16:5,29:11,30:5,겔 34:25,37:26,말 2:5). [의(정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7)고 말해지는대로, 평화는 의 및 공평과 분리할 수는 없다(시 72:7,85:10,사 48:18,57:2,59:8,60:17, 수 8:16).
평화 없는 현실의 한 가운데서 평화를 진지하게 문제로 한 것은 예언자들이었다. 그들은, 지상의 낙원의 도래(사 11:1-,호 2:20-,암 9:13-,기타), 제국민의 하나님에의 귀의에 의한 세계 평화의 확립(사 2:2-4), 혹은 또, 정의에 의해 평화를 가져오는 메시야적 왕의 도래(사9:6,슥 9:9-10)등, 각양의 구상을 가지고 이상적인 평화에 대하여 말하고, 그러한 참된 평화의 실현을 종말론적으로 대망했다. 그들은 또, 하나님의 뜻에 기초한 참된 평화의 확립을 위해서는, 전시의 평화상태 및 거짓 평화의 예언에 대하여, 전쟁과 멸망의 예언을 하는 일도 불사했다
(미 3:5-,렘 6:14,8:11,16:5,25:37, 28:8-10, 겔 13:16,34:25-,37:26-).
구약성서에 있어서의, 참된 평화는 인간의 불의와 악의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사유의 역사(일하심)에 의해, 고난의 저편에 비로소 종말론적으로 실현되는 구원, 편화와 구원이 동의어같이 말해져 있다. 그것은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고한다(사 5:7-).
신약성서에 있어서 평화를 의미하는 [에이레-네-]라는 말도, 단지 전쟁과 대립하는 정치적 사회적 개념으로서의 평화(마 10:34,행 12:20,24:3,계 6:4)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단지 심령(영혼)의 평안 상태를 의미하는 정신적 개념도 아니다. [에이레-네-]는 당시의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받아 확실히 내면화는 되어있는데(롬 8:6,15:13,벧후 3:14참조),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히브리어의 [샬-롬-]이 포함하고 있는 다양한 의미 내용과 그 종말적 특질을 그대로 이어받아, 인간의 생의 전 영역에 걸쳐서의 하나님의 뜻에 기초한 참된 소망스러운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 물론 그런 경우, 샬롬의 의미 내용 및 특질이, 그러한 상태(생활)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근거로 하고, 그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개로하는 일에 의해 오는 것이다(엡 2:15-16).
예들면, [에이레-네-]가 [샬-롬-]과 한가지로, 인사나 축복의 말로서 씌어지는 경우에도,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평화의 갈망의 표현에 그치지 않과,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현실 그것을 가리키기에 이르고 있다(막 5:34,눅 7:50,10:5,요 20:19-,행 10:36, 벧전 5:14,약 2:16,III요 1:15). 바울은 이것을, [자비](갈 6:16)라는 말이든가, [은혜](롬 1:7,고전 1:3,고후 1:2,갈 1:3,엡 1:2)라는 그리스 세계의 인사 용어를 보충하는 일로, 보다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 신약성서에 있어서는, 당시의 유대교의 기도나, 축복의 경우와 한가지로 하나님은, 종종 [평화의 하나님]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그 경우도, 그것은 그리스도에 있어서 표현된 구원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에 있어서 표현된 구원으로서의 평화의 실현에 기초하여 씌어져 있다(롬 15:33,16:20,고전 14:33,고후 13:11,빌 4:9,살전 5:23,살후 3:16,히 13:20). 따라서 평화와 구원과는, 구약의 경우와 한가지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롬 5:1,히 13:20). 구주는 [평화의 주]시다(살후 3:16,히 7:2→사 9:6).
신약시대의 교회는, 구약성서 및 당시의 유대교에 있어서 종말론적으로 대망되어 있던 [샬-롬-], 즉 하나님의 구원으로서의 참된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실현될 것을 인식 또는 체득하고, 그것을 [에이레-네-]라는 말을 써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마 5:9,21:1-11,눅 1:79,2:14,19:38,롬 4:17,갈 5:22). 그리스도께서 가져온 것은 [평화의 복음](행 10:36,엡 6:15,요 14:27)이고, 참된 평화를 확립하는 [평화의 도](롬 3:17,눅 19:42)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하나님과의 적대관계에서 화해에로 인도되고, 동시에, 그것에 기초하여 하나님과의 사이 뿐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평화도 주어진 것이다(롬 5:1-11,고전 14:33,골 1:20,엡 2:14-17,약 3:18). 그리스도가 실현한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불리우는 당시의 로마제국의 지배체제하에 있어서의 평화(행 24:3) 같은 외양의 평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의 뜻이 무시되고, 특정의 삶들 및 민족이 억압되고 있는 곳에 참된 평화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왔노라](마 10:34=눅 12:51, 계 6:4)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께서 허위나 전시의 평화에 대하여 싸운 구약의 선지자들의 전통과 구원으로서의 평화에의 종말론적 대망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뜻에 기초한 참된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의 전실존을 버리신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한가지로, 바울도 또한, 평화와 주 그리스도에의 신앙에 기초한 종말론적 실존에서 탈락하여 외양의 평화상태 중에 잠들려 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경고를 발했는데(살전 5:3), 바울을 비롯하여 신약시대의 교인들에게 있어서, 평화를 추구하는 일, 또 평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평화의 복음]에 따라 사는 종말론적 실존자의 윤리에 지나지 않았다(마 5:9,막 9:50,롬 14:17-19,고전 7:15,살전 5:13,엡 4:3,골 3:15,히 12:14,딤후 2:22,벧전 3:11).
(인터넷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