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제8회 4.3평화문학상 시 부문 수상작
맑고 흰죽*
변희수
불편해지면 죽을
끓입니다
식사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가볍게 훌훌 넘기고 싶다는 말
어제의 파도는 우물우물 삼켜도 된다는 그 말
그게 잘 안 돼요
부드럽게라는 말이 목에 걸려요
당분간 절식이나 금식
이상적인 처방이라는 건 알아요 미련이 생겨서
나는 죽을 먹습니다
맑고 흰죽을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
돌아서서 코를 풀었죠
조금 묽어졌다는 뜻이지만
눈물은 짜니까
빨간 눈으론 돌아다닐 수 없으니까
그런 날은 손바닥마다 노란 가시선인장꽃
울지 않은 척 했어요
얹혔을 거라고 수군거릴 때마다
이 고비는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생각에 걸려
어제도 오늘도 삼키죠 백번도 더 생각하죠
죽이고 죽이다 보면 또 다시 죽
이렇게 맑고 흰죽
목이 메여요 달랑 죽 한 그릇인데
눈이 부셔요
새로 태어난 것처럼
몸속을 돌아다니는 물기가
어제의 죽이라 하겠지만
밤마다 복닥복닥 탕! 탕!
죽 끓이는 시간이 또 다시 찾아오고
죽은 조금만 쑤어도 넘치게 한 솥이에요
후회도 한 솥 미움도 한 솥이어서
나는 먹고 또 먹을 테죠
다행이다 싶지만
맑고 흰,
무명의 시간들
좀 서운해요 돌아서면 고프고
어떻게든 달래고 싶은데
받는 게 이것 밖에 없는 이 속이
내 속이 그렇다는 거죠 지금
*4.3 사건 피해자인 진아영 할머니는 턱과 이가 없어 평생 소화불량으로 인한 위장병과 영양실조를 달고 살았다.
출처 : 제주의소리(http://www.jejuso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