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산에서 숨쉬고 있는 우리의 역사
(호암산 제1편)
루수/김상화
세상을 꽃밭으로 만들고 싶어 계절의 여왕 5월이 오늘 오셨다. 이젠 온 천지에 꽃향기까지 뿌릴 것이다. 나무들은
꽃처럼 아름다운 연초록 새순이 돋아날 것이고, 우리는 그래서 계절의 여왕 5월이라고 부른다. 오늘 그 계절의 여왕님이 이 땅에 발을 디디셨다.
여왕은 한 달 동안 머물다 가신다고 약속했다. 5월은 꽃 중의 꽃, 장미의 계절이기도 하다. 5월은 우리가 활동하며 살기에 가장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만들어 공급해 주는 달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 좋은 계절에 꽃과 향기에 묻혀 살 것으로 본다. 하늘은 황금 햇살로 축복을 내린다.
젊은이들은 문명의 이기인 핸드폰에 사랑을 담아 축하의 메시지를 연인과 친구 친지에게 정성껏 보낸다. 가슴 설레는 5월이다. 이 아름답고 살맛
나는 계절 마음까지도 향기로워지는구나!
필자는 오늘 여왕님을 보려고 배낭 하나 메고 산으로 향한다. 전철을 타고 석수역에 내려
호암산을 거처 삼성산까지 가려고 마음먹었다. 여왕님을 보러 간다고 생각하니 아침부터 기분이 상쾌하다.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무들은 잎을
돋느라 분주하다. 엊그제만 해도 연두색으로 먼저 피어난 잎들이 초록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진달래꽃은 수명을 다한 듯 떨어지기 시작했고 철쭉꽃이
대신 예쁘게 피어있다. 여왕님을 맞이하려고 산 군데군데 모여 앉아 방끗 웃음을 터트린 철쭉이 오늘따라 예쁘기도 하다. 올라가는 도중에 진달래꽃도
아니고 철쭉꽃도 아닌 것이 예쁘게 미소를 짓고 있다. 무슨 꽃인지 궁금해서 뒤에 오는 여성 산객에게 물어보았다. 필자는 처음 들어 보는 물
철쭉이라고 한다.
호암산(虎岩山)이라 해서 혹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삼성그룹의 창업자이신 이병철 회장님께서 이산의 이름을 따서 호를
지셨나 생각했다. 자세히 보니 한문으로 호암산은 범호(虎) 자를 썼고 이병철 회장은 호수 호(湖)자를 썼다. 그래서 아님을 알았다.
이
산에 올라와 보니 산성이 있다는 것을 알림판에서 보았다. 서울 호암산성은 통일 신라 때 쌓은 것으로 추측되는 산성으로 사적 343호이다.
금천구의 주산인 호암산(347m) 정상을 둘러 쌓은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둘레 1,547m, 면적 133,790㎡이며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건축하여 군사적 전략 거점 및 행정치소(기관)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서 측에서 보면 소래와
남양만까지도 한눈에 볼 수 있는데 지리적으로 육로와 해로를 방어하고, 공격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서해 연안과 한강수로, 내륙 교통로의 중간
지점인 한강 이남 중심에 있어 삼국시대 양천고성. 행주산성. 오두산성을 잇는 거점 성곽이었으며, 당시 한강 유역의 18개 신라 산성 가운데
북한산성, 남한산성, 이성산성 등에 이어 네 번째로 길었다.
*테뫼식 =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산의 7~8부 능선을 따라 거의 수평
되게 한 바퀴 둘러쌓은 것을 말하며 그 모양으로 인해 시루성이라고도 불린다.
고려 시대에는 한강 수로를 통한 중국 무역의
경유지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군대가 주둔했다고 알려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북동에서 서남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이며, 축조
방식은 외벽을 돌로 쌓고 뒷면을 잡석과 자갈을 채우는 내탁법(內託法)을 사용했다. 현재 동쪽에 있는 벽의 북쪽 성벽이 잘 드러나 있으며, 원형을
포함해 남아 있는 성벽은 1,016m이다. 산성 내의 시설로는 한 우물(제1 우물지)과 제2 우물지, 건물지(터), 석구상( 石狗像)이 있으며
많은 기와와 청동 숟가락, 철제 월형도끼, 희령원보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참으로 많은 유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탁법(內託法)=
외벽은 돌로 쌓고 내벽은 흙으로 쌓는 기법을 말함
*석구상(石狗像)= 개의 형상과 가깝게 돌로 만든 것임. 이것은 경복궁의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서울 장안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세운 것임.
날씨가 꽤 덥다. 얼마 올라가지 않았는데도 온몸에선
땀이 정신없이 흐른다.
안내판에 신랑 각시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어떻게 생긴 바위인가 궁금증이 난다. 신랑 각시는 깨소금이 쏟아지도록
한 가정을 막 이룬 부부를 일컫는다. 또 신랑 각시는 불이 탈 정도로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허니문 시기를 말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남녀 간에
흐르는 사랑 덩어리다. 왜 신랑 각시라고 이름을 붙인 바위일까? 하는 호기심이 유발한다. 옛날 호암산 아랫마을에 믿음직한 총각과 어여쁜 낭자가
한마을에 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양가 집안이 대대로 앙숙(怏宿)으로 지내 온 터라 부모들은 이들의 관계를 반대하면서 다른
사람과 혼인을 시키려 했다. 낭자는 부모님의 심한 반대를 못 이겨 깊은 밤을 틈타 목숨을 끊으려고 집을 뛰쳐나와 산으로 갔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총각은 사랑하는 낭자를 찾으러 칠흑같이 어두운 산을 헤맸다. 그러던 중 산 중턱 절벽 위에 홀로 서서 세상을 하직하겠노라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낭자를 발견한다.
나뭇잎은 스산한 바람에 흔들거리고, 달빛은 그제야 휘황찬란하게 비치는 절벽, 그 앞에서 만난 이들은 손을
맞잡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서로 닦아주며 달님에게 세상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맹세의 기도를 올리며 밤을 지새운다.
절절하고 애절한 이
연인의 사연이 마침내 달님에게 전달되었다. 달님은 진실한 이들의 사랑에 감동하여 영원히 함께할 수 있도록 그 자리에 마주 보며 우뚝 선 바위로
만들어 주었다.
이후, 산 아랫마을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이 이곳을 찾아 손을 맞잡고 사랑을 고백하면 혼인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결혼해 이곳을 찾아 기도를 드리면 옥동자를 점지해 주었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백년해로(百年偕老)하는 행복한 가정을 성원해 주었다는
사랑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올라가다 보니 넓은 분지가 나온다.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나 보다. 건물지(建物址)도 있다.
여기에서 많은 기와가 출토되었고 이 중에는 상당량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도 포함되었다. 현재도 곳곳에서 통일 신라시대 기와조각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물지(井址)도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숟가락에는 잉벌내역지내말(仍伐內力只乃末)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숟가락의
잉벌내(仍伐內)는 고려 시대의 금천구 지명인 잉벌노(仍伐奴)와 유사하다. 신라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지명은 여전히 고구려에서 사용하던
잉벌노(仍伐奴)를 쓰던 시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측된다. 잉벌내(仍伐內)는 아마 벼슬을 한 역지 라는 인물이 사용하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걷다 보니 서울 호암산성 문화재 보호구역 이란 표지판이 곳곳에 붙어있다. 건물지(建物址)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는 희한하게 생긴
동물로 보이는 석구상(石狗像)을 세워놓았다. 석구상(石狗像)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조선 시대 "경기읍지(京畿邑誌)"와 "시흥읍지(始興邑誌)"에
있다. "호암(湖巖)"이라는 바위가 금주산, 지금의 호암산에 있는데, 그 모양이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닮아서 한양으로 도읍을 삼을 때 이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바위의 북쪽에 돌로 만든 사자를 묻고 남쪽에서 돌로 만든 개를 묻었다고 전한다, 과거에 해태상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그 형태가 개에 가깝다고 하여 석구상이라고 부른다. 또 1990년 제1 우물지 발굴조사 당시 조선 시대 건축물에서 석구지(石狗池)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재가 확인되었다. 석구상(石狗像)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0m가량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 부분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호암산(虎岩山)은 많은 역사를 품고 있는 산이다. 우리 선조들께서는 역사적으로 볼 때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많이 생각해서 무엇인가를 세워놓고 만들어 놓은 흔적을 볼 수 있다. 호암산(虎岩山)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이곳에 와서 학창 시절에 배우지 못한
역사 공부를 해간다. 호암산(虎岩山) 제1편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제2편에서는 호압사(虎壓寺)에 관해 쓸 것이다.
2020년 05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