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이 빠른 것이 간극주마(看隙走馬)다. 틈틈히 선대의 자료를 정리하는 일은 더디기 그지없다.
4세 장령공(휘 지당)공의 '외손봉사' 글을 다시 읽어 보다가, 불현듯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양주의 산북동에 있는 동백공과 장령공의 묘소를 찾아 보기로 하였다.
정기호 박사의 신사보 주석에 의하면, 당초 동백공 묘소 아래의 무명묘 봉분이 2기나 있는데, 이 봉분이 장령공 묘소로 생각하고 동백공종에서 향사를 지내왔다고 했다. 그러나, 1978년 의정부 신곡동 지표조사 때, 장령공의 묘와, 따님의 묘가 옛 고성이씨 묘역에서 발견됨에 따라, 장령공의 묘표, 상석, 문인석은 함께 다시 동백공 묘역에 이장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장령공의 묘갈문이 존재하지 않을까? 내용은 무엇일까? 따님의 비문은 발견되어 대략적인 외손봉사 내용이 기재되었다니, 당연히 묘비문이 있겠지 하는 기대감도 있다.
그래서, 지난주 6.14일(화)과 6.18일(토) 두차례에 걸쳐 답사하게 되었는데, 아쉬운 점은 모두 비문은 없고 묘표만 있다. 그 내용을 게재하고자 한다.
경기 양주 천천(泉川)의 동백공종 상대(上代) 묘소 현황
2022. 6.22 여천 정철중
□ 양주 천천의 묘소현황
▪ 위치 : 경기도 양주시 평화로 1233번길(산북동)
▪ 동백공 선영
- 3세 동백공 휘 구진(鄭龜晉)
- 동백공 배 동래정씨(東萊鄭氏) 상하조(上下兆)
- 4세 장령공 휘 지당(之唐)공 배 순천박씨(順天朴氏) 합조
- 무명묘 2기(1기는 상석과 문인석 있음)
▪ 동백공 좌향 청룡릉 참의공 선영
- 4세 참의공 휘 지하(之夏)
- 5세 사직공 휘 조우(祖禹) 배 진양군부인강씨(晉陽郡夫人(주1)姜氏) 합조
- 지하공 배 완산군부인최씨(完山郡夫人崔氏)
- 8세 증판서공 질(耋) 배 김해김씨 배 파평윤씨(坡平尹氏) 삼합조
- 9세 병은공 휘 사위(士偉) 배 평창이씨(平昌李氏) 쌍조
- 무명묘 2기(1기는 상석이 있음)
주1) 군부인(郡夫人) : 세종 14년(1432) 1월에 종친(宗親)의 처에 대한 봉작제(封爵制)가 개정되면서 종실명부(宗室命婦)로서 정
1품의 처는 모부부인(某府夫人)이라 일컫고 도호부(都護府) 이상의 관호(官號)를 사용하며, 종1품의 처는 모군부인(某郡夫
人)이라 일컫고, 정•종2품의 처는 모현부인(某縣夫人)이라 일컬으며, 정•종3, 4품의 처는 종래대로 각기 신인(愼人)•혜인(惠
人)이라 하였음.
▪ 동백공 좌향 청룡릉 하단 무량(茂良) 선영
- 5세 증좌승지 휘 계우(繼禹), 배 무송윤씨(茂松尹氏) 쌍조
- 양촌공파 12세 필수(必壽) 배 함양여씨
- 양촌공파 13세 관점당(觀漸堂) 계광(啓光) 배 전주이씨(全州李氏) 쌍조
- 돈재(敦齋) 동헌(東憲) 배 풍양조씨(豐壤趙氏) 합조
- 성재공파 21세 송산(松山) 휘 용칠(用七) 배 전주이씨(全州李氏) 합조
- 동백공신도비(神道碑)
- 광주정씨영원비(光州鄭氏瑩苑碑), 정규종기공비(鄭圭鍾紀功碑)
< 천천(泉川)의 마을 유래 > 산북동(山北洞)이라는 땅 이름은 양주의 주산(主山)인 불곡산(佛谷山) 뒤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뒤·산디·산대(山垈)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지역은 꽃벼루우물이 있어 고려 시대부터 현재까지 일반적으로 샘내[천천(泉川)]로 불린다. 또는 배양동(培養洞)이라고도 하는데 발음이 변하여 뱀굴로도 불린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동백이란 강원도관찰사를 말하는데, 3세 정구진공이 1425년 강원감사를 지내셨기 때문이다. 동백공종 상대(上代)의 묘소는 양주 불곡산 아래 천천(泉川)에 소재하였고, 이후, 5세에 이르러 장남 조우가(祖禹家)는 고창(高敞)으로, 차남 종우가(宗禹家)는 양주 고산(高山 현 의정부)에, 삼남 계우가(繼禹家)는 광주 운림동에, 사남 찬우가(纘禹家) 는 포천 일동 지역으로 묘소 및 세거지가 옮아가게 되었다.
특이한 사항은 동백공과 참의공 선영의 하단에 미심의 묘소가 각각 2기씩 4기가 있는데, 족보에 의하면, 6세 승순(承順 : 부 조우)공의 묘소는 ‘양주 천천이라고 하나 찾지 못함(楊州泉川云而未尋)’이라 하고, 장남 자웅(自雄)공의 묘소는 미기록이다.
□ 3세 동백공 및 4세 장령공 묘소
양주의 명산인 불곡산(佛谷山 466m)의 한줄기가 아름답게 동행(東行)하다 세 줄기로 나뉘어 중앙에 맺어진 능선이 3세 증판서 동백공(東伯公) 휘 구진(龜晉)의 예장지(禮葬地)이고, 좌측의 청룡능선에는 참의공(參議公) 휘 지하(之夏)의 묘원이 있다. 또한 청룡릉 하단은 5세 계우(繼禹)공 묘소 및 동백동 신도비(神道碑)와 광주정씨영원비(光州鄭氏塋苑碑)가 서있다.
신사보 주석에 의하면, 동백공과 배위 동래정씨 묘소 아래에 2기의 무명 묘가 있어, 장남인 4세 장령공 휘 지당(之唐) 내외분의 상하조(上下兆) 정도로 추정하여 그간 향사(享祀)를 모셔왔다고 한다. 1845년 초간 을사보 기록에도 ‘봉동선비계하유좌(蓬洞先妣階下酉坐)“라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외손봉사하신 ‘정부인 광주정씨(부군은 한성소윤 고성 이질 李垤)’관련, 지당(之唐)공의 묘소는 딸의 묘와 함께 고성이씨 선영에 모셔졌었다.
1978년 의정부 산곡동의 개발과 관련하여 지표조사 중이었다. 2세 개성부윤공(휘 윤부 允浮)의 따님이 순천 박가흥(朴可興)공에 출가하셨는데, 1979.9.26일 그 순천박씨의 후손이신 박종도란 분이 장령공 따님(정부인 광주정씨)의 묘소를 발견하여 이를 고성이씨 문중에 제보하여 세간에 알려졌고 아울러 장령공의 묘소와 묘표 및 문인석 등 석물도 발굴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집안에 알려져 장령공의 묘소는 본래 족보의 기록대로 양주 동백공 묘소 아래에 천장되었던 것이다.
장령공은 1405년(태종5년) 을유년 식년시 을과 3위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셨는데 생몰년도는 모른다. 세종실록 1426년 기록이 마지막이다. 태종의 뜻에 거슬린 일로 고초를 겪었는데 아래에 별도로 살펴보고자 한다.
□ 4세 참의공(휘 지하 之夏) 묘원
이 묘원은 동백공 묘소를 남서쪽으로 바라보는 언덕에 있다.
참의공은 1414년(태종14년) 2월 갑오 식년시 생원에 입격하였다. 학행(學行)으로 사헌부장령을 지내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1455년 세종실록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 기록이 마지막이다. 지당공이 1녀만 두어 무후하였으므로 동백공종은 모두 참의공의 자손이다. 장남 조우공과 배 진양군부인의 합조 묘소는 묘역의 위쪽 봉우리 아래에 있다. 4남 2녀이신데, 5세에 장남 조우(祖禹)가는 6세 때 전라도 고창 아산(雅山)으로 내려가고,
차남 종우(宗禹)가는 양주(楊州) 고산(高山) 및 인근의 가까운 지역에 살게 됨으로서 그 후손인 8세 증판서 질(耋)공과 9세 병은(病隱)공도 이곳에 묘소를 두었다.
병은공 휘 사위(士偉)는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의 피신을 호가(扈駕)하다 평안도 맹산(孟山)에서 병사(病死)하셨고 차남 흠이 반장(返葬)하였다. 병은공의 장남 영(韺)은 무후하였고, 차남 흠(歆)은 불곡산 서쪽의 양주 백석(白石)에 살았으나 아들 대에 무후하였다. 묘소는 동백공 묘 우강(右岡)이라는데 실전된 듯하다. 삼남 봉(韸)은 전라도 해남으로, 4남 호(頀)는 경기도 평택에 세거하므로, 선영은 후계로 이어지지 않았다.
삼남 계우(繼禹)가는 경기 안성(安城) 및 광주(光州) 운림동에 묘역을 운용하고 이 지역에 세거하였다. 5세 계우공 묘소가 가까이 있지만 잇지 못한 것은 거소(居所)가 멀기 때문이다.
사남 찬우(纘禹)가는 포천(抱川) 일동, 춘천, 동두천 안흥 및 충청도 논산(論山) 두마로 세거지를 확장하였다. 이와 같이 동백공 후손들은 모두 양주 천천을 떠났으므로 이곳은 동백공 상대(上代)의 선영으로 남았다.
< 참의공 묘역 >
■ 청와대 청와(靑瓦)의 기원설 : 문종실록 1권, 문종 즉위년(1450년) 2월 28일 장령(掌令) 정지하(鄭之夏)가 아뢰기를, "불상(佛像)을 만들고 절을 창건(創建)하며 불경(佛經)을 베껴 쓰고 불경을 인쇄하는 등의 일은 비록 선왕(先王)께서 하신 일이므로 차마 경솔히 폐지할 수 없다고 하지마는, 어찌 이익이 없고 탄망(誕妄)된 일을 전하의 즉위하신 초기에 행하겠습니까? 또 듣건대, 청기와[靑瓦]를 구워서 만드는 데 들어간 재력(財力)이 너무 많이 들므로,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에만 청기와를 덮었을 뿐이고, 문소전(文昭殿)과 종묘(宗廟)에도 오히려 덮지 못했는데, 어찌 불우(佛宇)에 이를 덮겠습니까? 신(臣) 등이 상세히 듣건대, 우리나라의 군량(軍糧)은 옛날에는 50여만 섬이나 있었고, 중간에도 20여만 섬이나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10여만 섬에 이른다고 합니다. 청기와와 등롱(燈籠) 에 소비하는 비용이 적지 않으니, 만약 절을 창건하지 않는다면 등롱(燈籠)의 제조도 또한 그쳐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등롱(燈籠)은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전 것을 그대로 수리 보수할 뿐이다. 청기와는 재력(財力)이 자못 많이 들고, 또 그대들이 옳지 않다고 하는 까닭으로 이를 정지시키겠다."하였다. |
□ 광주정씨영원비와 동백공 신도비
참의공 묘역 산맥이 평지와 조우하는 의정부~동두천간 도로가 마을 입구에는 1996년 12월에 동백공신도비(東伯公神道碑)가 세워지고, 작은 봉우리에 1982년 동두천 안흥(安興)에서 옮겨온 광주정씨영원비(光州鄭氏瑩苑碑)와 1915년 은진송태헌(恩津宋台憲)이 지은 동백공구신도비, 정기호 박사가 지은 광주정공송남규종기공비(光州鄭公松南圭綜紀功碑)가 세워져 있다.
인근에 5세 계우공(繼禹公)의 묘소와 양촌공파 12세 휘 필수(必壽)공의 배함양여씨(配咸陽呂氏)와 13세 관점당(觀漸堂) 휘 계광(啓光)의 묘소가 있다. 본래 양촌공파는 광주 무량(茂良) 운림동의 묘역을 선영으로 하였는데, 14세 휘 득천(得天)공이 강릉참봉, 의금부도사, 사도시주부의 관직에 있으면서, 이 때 조모 및 부모의 장지를 이곳으로 삼은 것으로 추측한다. 정작 득천공 묘소는 광주 무등산으로 회귀하였다.
< 동백공 신도비 >
< 광주정씨영원비 : 정영호 수립 >
< 동백공종 상대 묘소 소재지 현황 >
□ 동백공 이력(왕조실록, 국조방목 등)
ㅇ 고려 우왕 3년 1377년 정사년 진사시 2등 12위(16/57)
ㅇ 고려 우왕 8년 1382년 임술년 생원시 1등 장원(壯元) (1/100)
ㅇ 고려 우왕 12년 1386년 병인년 식년시 문과(文科)에 급제
ㅇ 태조 3년 1394년 기거주(起居注)(주1)
ㅇ 태종 2년 1402년 사헌부 장령
ㅇ 태종 9년 1402년 1. 8 사헌부 집의
ㅇ 세종 5년 1423년 3.12 사간원 좌사간
ㅇ 세종 5년 1423년 8.26 형조참의
ㅇ 세종 7년 1425년 7. 강원도관찰사
ㅇ 세종 8년 1426년 7. 6 이조참의
주1) 기거주(起居注) : 고려 중서문하성의 관직으로 1356년(공민왕5) 정오품관이 되었으며 사관직 업무와 국왕에 대한 간쟁과
봉박을 담당한 간관(諫官)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 정구진(鄭龜晉) : 조선전기 집의,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할아버지는 찬성사 정신호(鄭臣扈)이다. 1382년(우왕 8)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곧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하였다. 문하부기거주(門下府起居注)·장령(掌令) 등의 관직을 거쳐 1409년(태종 9)에 집의로 있으면서 표면에 드러나기는 간통사건(주2)이나 실제는 재산분쟁인 최수미(崔須彌)의 사건을 올바르게 처리하지 못한 것으로 우사간대부 유겸(柳謙)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서용되어 1425년(세종 7) 강원도관찰사에 이르렀다. 문장이 뛰어나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주2) 동백공에게 특기할 만한 행력도 아닌데, 왕조실록에 중요한 행력이 없으니 인용하였는데, 바람직하지 않다.
< 1409년 부사직 최금강(崔金剛) 고소 사건(왕조실록 요약) >
▪ 종매(從妹) 최수미(崔須彌)가 부사직 송현우(宋玄祐)와 간통하였다 고소
① 형조의 처분 :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니고 노비를 다투는 일로 분함으로 고소하였으니 최금강의 직첩(職牒)을 거두고 논죄
② 최금강 아내가 신문고(申聞鼓)를 쳐 억울함 호소
③ 사헌부가 핵실(覈實:수사) : 간통은 사실이고, 최금강이 오히려 고소하여 세간을 어지럽혔으니, 최금강, 최수미, 송현우 모두
논죄토록 함 → 형조판서 박은(朴訔)과 정랑 성엄(成揜)을 송사를 분변하지 못한 것을 탄핵
④ 형조판서 박은(朴訔) 불복 : 공사(公事)를 개정(改正)하는 것과 변란(變亂)을 음모하는 것은 예측하기 어려운 것
⑤ 사간원 유겸(柳謙) 등이 상언(上言)하여 사헌부 집의(執義) 정귀진(鄭龜晉)과 지평(持平) 이방(李倣)을 파직 : 최금강의 죄를
청하고 증좌인의 거짓진술에 죄를 청하지 않고 방면하여 경중을 잃음
* 전날 사간원 장무헌납(掌務獻納)이 탄핵받았는데 유겸이 모른척하고 도리어 정구진 등을 탄핵하였는데 임금은 알지 못함
▪ 이 사건은 형조와 사간원이 사헌부를 견제한 사건으로 보여진다.
□ 동백공 왕조실록 기록 요약
□ 1415년 정지당(鄭之唐)공의 염치용(廉致庸) 사건 피해 사건
이 사건 자체는 집안의 노비 소유권 문제로 다툼을 종실(宗室)이 개입되어, 정치적으로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남동생 민무회(閔無悔)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불똥이 사헌부 관원에 미친 사건이다. 원경왕후의 4 남형제 중 1410년 민무구, 민무질은 이미 죽고난 이후였다.
전 황주목사 염치용은 자기 집 노비가 판결에 의해, 내섬시(內贍寺)에서 일하게 되자, 노비반환의 소를 올리게 되었는데 형조, 사헌부의 판결에 패하고 만다. 이러한 불만을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의 동생 공안부윤(恭安府尹)(주3) 민무회를 찾아가 거짓으로 ”영의정 하륜과 태종의 후궁 혜선옹주에 뇌물을 주고 그리 되었노라“ 억울함을 토로했는데, 민무회는 그만 경솔하게 충녕대군(후일 세종)에게 고하였다. 충녕대군이 태종에 이 사실을 말하게 되었다. 태종은 기강의 문란과 인척 민무회의 권력에 기대려는 행태에 격노하며 숙청을 마음을 다지게 된다. 민무회의 죄가 가벼우므로 풀어주고 염치용의 죄는 대역죄에서 감등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시류를 눈치 챈 신하들의 강력한 처벌해야 한다는 소가 빗발친다. 모두 태종의 수순을 눈치챈 것이었다.
이러한 시류에, 불똥은 튀어 사헌부에서 소극적으로 대처하니 불충(不忠)하다 하였다. 이윽고 염치용의 죄를 청하지 않았다 이유로 신료들이 사헌부 관원들을 처벌토록 아우성치니, 모두 태종의 심기에 편승하여 권력에 기대는 자들이었다. 민무회(閔無悔), 민무휼(閔無恤) 형제는 후일 모두 제거되게 된다. 후일, 세종은 이 일에 관여한 바 있으나, 태종의 일을 거슬리지 않기 위해 구제를 하지 않았다
◼ 처벌내용
ㅇ 태종15년(1415년) 5. 7
대사헌 이은 : 장(杖) 80대 도(徒:귀양) 2년
- 집의(執義) 이유희(李有喜), 장령(掌令) 강종덕(姜宗德)·정지당(鄭之唐),지평(持平) 김익렴(金益濂) : 장(杖) 70대에 도(徒) 1년 반
ㅇ 태종18년(1418년) 6. 22
- 6인 : 외방종편(外方從便)(주4)
주3) 공안부(恭安府) : 조선 태종(太宗) 때에 상왕(上王)인 정종(定宗)의 공어(供御)를 맡아 보던 관아. 세종(世宗) 2년(1420)에 인
녕부(仁寧府)에 병합하였다.
주4) 외방종편(外方從便) : 죄인의 의사에 따라 서울 이외의 지방에 거주하게 하는 제도
▪ 태종실록 29권, 태종 15년(1415년) 5월 4일 사헌부 대사헌 이은(李垠)과 집의(執義) 이유희(李有喜), 장령(掌令) 강종덕(姜宗德)·정지당(鄭之唐), 지평(持平) 김익렴(金益濂)·금유(琴柔)를 의금부에 내렸다. 의금부에 교지(敎旨)를 내렸다. "민무회(閔無悔)와 염치용(廉致庸) 등이 노비의 일로 인하여 불충한 말을 떠들었기 때문에,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더니, 조율(照律)하여 아뢰기를, ‘대역(大逆)으로 논죄하도록 청합니다.’하였다. 그러나, 염치용은 감등(減等)하여 시행하였고, 민무회는 의친(議親) 으로 논하지 말게 하였다. 육조와 의금부·승정원·사간원에서도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청하였는데, 사헌부는 그 직책이 국가의 법을 관장하고서도 이를 듣지 못하여 그 죄를 청하지 아니하였고, 또 그들이 아뢴 조목 안에는 ‘대소 인원(人員)이 함부로 상서하여 어떤 자는 자기의 죄를 모면하기를 엿보고, 어떤 자는 자기의 욕심을 이루려고 도모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누구를 위하여 발설한 것이다. 또 이중무(李仲茂)와 장수(張脩) 등의 노비를 서로 다툰 일에 대해서도 마음을 써서 정밀하게 살피지 아니하고, 다만 방장(房掌)인 호조 좌랑 하지명(河之溟)의 죄만 청하였으니, 이것은 한편으로 치우쳐서 신하로서의 충의(忠義)가 없기 때문이다. 낱낱이 국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대언(代言)을 두 의정(議政)의 집에 보내어 사헌부 관원을 의금부에 내린 까닭을 일렀다. |
□ 정령공 정지당 문과방목
ㅇ 을유5년방(乙酉五年榜) 시험일 : 1405년 4월 21일
ㅇ 방방일 : 1405년 4월 27일
* 광주정씨에서 가장 오래된 방목으로, "부 구진, 조 윤부, 증조 신호"가 확인되고 있다. 신광한의 숙인광주정씨 묘갈과, 전라좌
수사공(휘 응규) 묘갈에서 보이는 2세, 3세의 혼란을 정리하는 최고의 사료이다.
< 3세 동백공 휘 구진 묘 >
< 3세 동백공 배 동래정씨 묘 >
< 4세 장령공 휘 지당 배 순천박씨 합조묘 >
< 4세 참의공 휘 지하 묘 >
< 4세 참의공 배 완산군부인최씨 묘 >
< 8세 판서공 휘 질 배 김해김씨, 남양홍씨 삼합조 >
< 9세 병은공 휘 사위 배 평창이씨 쌍조 >
< 5세 증좌승지공 휘 계우 묘 >
< 13세 관점당공 휘 계광 배 전주이씨 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