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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독도,최초의 주민등록자
돈만다케 추천 0 조회 180 10.02.10 10:36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휴대전화로 걸려오는 전화번호 앞자리가 010·011·016·017·018·019 등 익숙한 숫자로 시작되더라도 낯선 번호라면 일단 의심해 보세요. 요즘 01로 시작하는 교묘한 스팸 전화가 늘고 있기 때문이에요.

독도 최초 호적자와 주민등록자

 



지난 87년 국내최초로 독도로 호적을 옮긴 송재욱(宋在郁 65 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씨가 17일 김제시 봉남면 모악산 자락의 동동동심원에 앞마당의 `조선영토회복기원'이라고 새겨진 비석앞에 서있다. 송씨는 일본의 `독도의날' 제정에 대해 "명백한 침략행위"라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2005.3.17 (김제=연합뉴스) min76@yna.co.kr (박성민)

 

현재 독도에 거주하는 주민은 김성도(독도호 선장)·김신열씨 부부와 편부경씨 3명이다.

김성도·김신열씨 부부는 1991년 11월 17일 이후 서도에 거주하며 어로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현주소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20-2번지이다.

편부경(시인)씨는 2003년 11월 19일에 독도주민으로 이주했다.

 

김성도씨는 1970년대부터 최초의 독도주민 최종덕 소유어선(덕진호, 2.22톤) 선원으로 독도(서도)에 거주하면서 수산물 채취 등 공동어로 활동을 해오다가 1987년 최종덕씨 사망후 본인 소유어선 (명성호 2.08톤, 부영호 1.5톤)을 이용하여 서도에 상시 거주하면서 본격적인 어로활동을 하다가 1991년에 현재의 주소지에 주민등록을 등재했다.

 

 

독도에 처음으로 주민등록을 이전하여 거주한

사람은 최종덕씨였다.

그는 1965년 3월에 울릉도 주민으로 도동 어촌계 1종 공동어장 수산물 채취를 위해 독도에 들어가 어로활동을 하면서 1968년 5월에 시설물 건립에 착수하였다.

 

그 후 1980년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고 나오자, "단 한 명이라도 우리 주민이 독도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겠다."며 1981년10월14일 독도로 주민등록지를 옮겼다고 한다.

 

당시 주소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67번지였다.

그는 수중창고를 마련하고 전복수정법과 특수어망을 개발하고, 서도 중간분지에 물골이라는 샘물을 발견하는 등 많은 노력을 쏟으며 살다가 1987년 9월 23일 사망하였다.

 

 

 

최종덕씨의 사위 조준기씨가 1986년 7월 8일 같은 주소에 전입하여 거주하면서,

1991년 2월 9일 산63번지로 전입하였다가 1994년 3월 31일에 강원도 동해시로 이주하였다.

 

위의 주민들 외에 지금까지 독도에 주소를 두고 거주하였던 주민으로,

최종찬씨('91.6.2~'93.6.7), 김병권씨('93.1.6~'94.11.7), 황성운씨('93.1.7~'94.12.26), 전상보씨('94.10.4~'94.12.18)가 있었다.

 

독도에 주소지를 둔 주민은 3명이지만, 1999년 일본인 호적등재 보도 이후 '범국민 독도 호적 옮기기 운동'이 전개되어 563세대 1,875명(2005년말 기준)이 독도에 본적을 두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 똑똑한 양반이 가뜩이나 분쟁의 소지가 있는 독도를..

정말 그 쓸모없는 쌍끄리 어장을 차지 하기 위하여 공동 어장으로 만들었을까..!?

 

협정후 바로 독도는 자연보호 차원에서 출입금지 구역으로 선포 되었다.

독도에 살고 있던 주민도 울릉도로 쫏겨 갔다.

 

정말 자연보호 차원일까~~???

자연보호 차원이라면 일본배도 독도를 못가야 한다~!?

 

그러나 ..

공동어장 협정(일본어선 우리나라어선이 독도에서 같이 조업하는 국제적 협약)으로 쌍끄리 어장을 차지 했으므로 일본배를 막을 권리가 우리나라엔 없다.

결과적으로 일본배는 자유롭게 드나들고 우리나라배는 출입이 금지된 웃지 못 할 상황이 전개 된 것이다.

 

신 한일어협 협정 후 외국에서 발간하는 세계지도는 동해가 자펜씨로 ..

독도가 다케시마로 표기되어 편찬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외무부에서는 아무런 대응이 없다.

외국에서 잘못 알고 편찬하는 것이니 문제가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대마도가 외국에서 우라나라 영토로 잘못 표기되어 나왔다면 ..

일본 외무성은 큰 난리가 났을 것이다.

일본 뿐 아니라 어떤 나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오로지 우리나라 정부만 남의 집 불구경 하는 식으로 방치한다.

 

독도는 세계적인 군사 요충지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국방부 국방계획서에도 전시 군사요충지 1호로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협정 후 지금까지 국방계획서에 빠져 버렸다.

 

일본은 협정 후 모든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교육을 해 왔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전혀 항의 하지도  않았으며 ..

도리어 그동안 우리가 배웠던 독도에 관한 내용을  교과서에서 삭제 해 버렸다.

 

위 내용들은 1999년 mbc pd 수첩에서 ..

신 한일 어협협정 후 발생한 많은 의문점을 발견하고 취재한 정확한 사실들 입니다.

 

1999년 12월 31일 우리나라 kbs,sbs,mbc 3개 방송사가 합동으로 ..

우리나라 땅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새 천년의 해를 촬영하려고 독도로 향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해군 군함까지 출동하여 무력으로 저지 ..

할수없이 울릉도에서 촬영한 사실이 있다. 

 

위 내용은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몇년 전 우리나라 환경단체에서 독도를 배경으로 우표를 발행 하였다.

그 때 일본정부는 ..

왜 자국의 영토를 배경으로 우표를 허락도 없이 발행했느냐는 항의에 ..

우리 정부는 곤욕을 치뤘다.

하지만 일본은 다께시마를 배경으로 한해에 수십차례씩 우표를 발행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전혀 관여하지도 않는다.

 

얼마 전 이화대학생들이 미국대사를 초청하여 독도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그때 미국 대사는 독도라는 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

그렇다고 학생들 앞에서 다케시마라고 할 수도 없다고 했다.

 

왜냐 하면 ..

독도는 고유명사이며 대한민국에서 지은 이름이고 다케시마는 일본이 지은 이름이므로..

그 어느것도 정의 하면 자신이 그 나라 땅으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제적 문제가 발생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미국식 이름을 지어 대답 했다.

 

그런데 노 무현 대통령은 고이즈미와 제주도 회담 당시..

고이즈미는 모든 국제기자들 앞에서 독도를 서슴없이 다케시마라 했으며 일본 땅이라 밝혔지만..

노 무현 대통령은 국제기자들과 고이즈미 앞에서 머뭇거리다..

차마 독도라 말을 못 꺼내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일본 땅이라 명명한 ..

일본의 고유명사 다케시마라 말했다.

 

자국에서 열린 회담인데도..

그들앞에서 우리나라가 세계에 대한민국 영토라 천명한 독도라는 말을 한마디도 못했고..

우리나라 땅이라고도 밝히지도 못했다..

 

결과적으로 세계에 우리나라 국가 원수가 독도는 일본의 영토 다께시마라고 인정한 것이 되었다.

 

나중에 문제가 야기 되자 실수를 했다고 변명 했지만..

대통령이 국제기자들 앞에서 독도는 일본 영토 다케시마 라고 실수로 인정 했다면..

그는 이미 정상인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어디를 봐도 정신이상자는 결코 아니다.

 

정부는 독도의 문제가 야기되어 국민감정이 일어 날 때마다 일본과 협상을 벌였다.

그런데 모두가 비밀 협상이다.

기자들도 출입하지 못한다.

국민은 협상 후 정부측 대변인의 발표를 들어야 한다 .

이유를 모르는 국민들은 답답하기만 하다.

무슨 비밀이 있길래 비밀 협상을 해야만 하는가...?

 

대통령은 그 때마다 일본과 전쟁도 불사하겠다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일본은 전혀 개이치 않고 도리어..

국내용 인기작전이라 대통령을 놀렸다.

 

그 이유는 ..

국제적인 문제는 대통령이 인터넷이나 메스컴을 통하여 국민에게 큰소리쳐서 효력이 발생하는게 전혀 아니다.

외교통상부를 통하여 상대국에 정식 항의를 해야만 효력이 발생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일본은 독도문제로 정식 항의를 한번도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대통령을 조롱한다 ..

 

어찌 분통이 터지는 일이 아니겠는가~!?

 

대통령은 ..

신사참배등 국익과 전혀 상관이 없는 평범한 일들은 정식절차를 밟아  강력히 항의 하면서도..

세계의 모든 국가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영유권..

즉 한,일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독도영유권 문제에 관하여는 한마디도 항의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군이 지켜야 마땅하지만 배치시키지 못했고 ..

그동안 일본 순시선이 지키고 있었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 드러나고 있으며..

그럼에도 국민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관을 민간인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 필요없이 배치시킨 것은 ..

혹,일본과 합의 하에 형식 상  배치시켜 ..

국민들이 의심하지 않게 한 뒤..

 

서서히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영토가 되게 하여..

일본의 외교의 힘에 위하여 ..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 ..

국민성이 모자라 ..

할 수 없이 빼았겼다는 식의 변명거리를 만들어 ..

신 한일 어협협정 속에 숨겨진 비리를 감추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독도는 역사적 사실로는 분명 소중한 대한민국 우리 조국의 영토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간단하지 만은 않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을 분석하여 대처 해야 합니다.

혹 국민의 동의 없이 무엇인가 밀실에서 이루워진 매국 적 사실이 있다면..

 

독도의 주인인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나서서..

주인의 허락없이 벌어진 모든일을 확실히 밝혀내어 ..

더 늦기전에  원천 봉쇄 해야 할 것입니다.

 

독도는 실제 한국땅입니다.

일본의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아래에 우리나라 영토인 독도의 역사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첨부합니다.

읽어보면 일본의 주장과 한국 영토라는 역사적 근거가 정확하게 나옵니다.

 

17세기 이전

4세기경에 만들어진 신라 양식의 토기가 울릉도에서 발견됐다. 이는 울릉도 주민들이 신라와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울릉도 사람들은 어업을 주로 하였으며 울릉도에서는 주변에 풍부한 어장을 보유한 독도가 보이므로 당시 울릉도 사람들은 독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의 설명

한국 학자들은, 독도를 신라 시대에 우산도로 불렀으며, 삼국사기(1145년)가 독도를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라고 주장한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지증마립간 즉위 13년인 512년 6월 하슬라주의 군주인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일본 학자들은 삼국사기 원문에 울릉도와 우산국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우산도에 대한 언급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地方一百里 恃  不服 伊 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于山人愚悍難以威來 可以計服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其國海岸  告曰 汝若不服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則降

고려 ~ 조선 초

우산국과는 고려 때까지 조공관계가 지속되다 11세기 초에 여진의 침구를 받은 우산국 사람들이 본토로 도망오고부터 고려의 직접관할구역이 됐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었다.

조선 초기 왜국 해적의 침략으로 많은 섬 주민들이 피해를 입자 1416년(태종 18년) 조정은 섬의 주민들을 본토로 이주시키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실시하였다. 이듬해 울릉도(당시 이름 무릉도)의 주민 3명을 이주시킨 것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무릉도 일대의 주민을 이주시켰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설명

1454년(세종 36년)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의 50쪽 셋째줄 〈울진현조〉 부분에 동쪽 바다의 무릉과 우산의 두 섬이 언급된다.

于山武陵二島在縣正東海中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則可望見

일반적으로 이 내용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우산과 무릉 두 섬이 현의 정동 (방향) 해중(海中)에 있다.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바람이 불고 청명한 날씨면 바라볼 수 있다.

현재의 울릉도와 독도에 해당되는 두 섬이 울진 동쪽에 있으며, 두 섬의 거리는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 한국학자들의 해석이다.[4]

일본 학자들은 이를 “우산도와 무릉도 두 섬은 (울진)현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고, 서로가 멀지 않아 날씨가 좋은 날엔 (본토, 즉 한반도에서 두 섬을) 조망해 볼 수 있다.”라고 해석한다.[5] 그들은 우산도가 죽도를 가리키며, 안용복 때에 조정도 이 부분을 그렇게 풀이했다고 주장한다(이 주장에 대해서는, 그와 같이 해석할 경우, 보이지도 않는 섬을 보인다고 쓴 셈이 되므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독도 다음으로 울릉도에서 먼 죽도는 울릉도에서 4킬로미터 떨어져 있어 날씨가 좋지 않다고 해도 서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해석에 따르면, 우산도는 독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1530년 조선에서 펴낸 팔도총도에는 우산도가 지금의 독도 위치와는 반대인 울릉도 서쪽에 그려져 있다. - 이 지도에는 또한 대마도도 조선 땅으로 표시되어 있다.[6]

17세기 ~ 19세기

오야 규에몬(大谷九右衛門)이 쓴 《다케시마 도카이 유라이키 밧쇼 히카에(竹島渡海由?記?書控)》에 따르면, 1618년 도쿠가와 막부가 호키노쿠니(지금의 돗토리 현)의 어부 가족인 오야(大谷) 집안과 무라카와 집안에게 울릉도로 건너갈 수 있는 허가를 내 주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독도를 ‘마쓰시마(松島, まつしま)’, 울릉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불렀다고 한다. 한국 학자들은 당시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였으므로 이 허가에는 근거가 없으며, 또한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번에서 번으로 건너가는 일은 번주의 권한이므로 막부에게 허락을 구했다는 것은 곧 다른 나라로 건너가는 허가를 구했음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두 집안은 1696년까지 혼슈와 울릉도를 오가며 울릉도 근해에서 조업을 했다.

1693년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로 갔다가 일본 어부를 보고 조업에 대해 항의하다가 일본인에게 붙잡혀간 일 이후 조정과 일본 막부에 서신이 오고갔고, 1697년 도쿠가와 막부는 울릉도에 출어를 금지시키겠다는 서신을 조정에 보냈다. 일본 학자들은 여기에 독도에 대한 언급은 없다고 주장한다.

1849년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 호의 선원들이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독도를 발견하고 섬에 선박의 이름을 붙였다. 이후 같은 방법으로 1854년에 러시아 군함의 이름을 따서 ‘마나라이와 올리부차 암초(Manalai and Olivutsa Rocks)’, 1855년에 영국 선박의 이름을 따서 ‘호넷 암초(Hornet Rocks)’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20세기에 출판한 지도에서 쓰이는 표기 중에서 한국과 일본에서 불리는 이름을 빼면 리앙쿠르 암초가 대부분이다.

1881년 일본 외무성이 기타자와(北澤正誠)에게 지시하여 펴낸 책인 죽도고증(竹島考證)(상/중/하)에 따르면 “송도는 조선의 울릉도이며, 죽도는 바로 옆의 작은 섬, 즉 죽도(일본에서 말하는 竹嶼)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금일 송도는 바로 겐로쿠(元祿) 12년 칭한 바의 죽도로서 고래로 아(我)의 판도(版圖) 외의 땅임을 알 것이다”라고 밝히어 독도가 일본 판도 바깥임을 명시하였다. [7]


1883년 일본 해군성이 발행한 《?瀛水路誌》第2卷(1883.3.) 에서 독도(「リヤンコ?ルト」列岩; 257-258쪽)는 鬱陵島와 동일 항목에 넣어 울릉도의 附屬島嶼로 인정하였다. 이는 1886년에 발행한 같은 책 제2판(397-398쪽)에서도 마찬가지다.

1892년 일본의 중촌종미당(中村種美堂)은 만국신지도(萬國新地圖)의 지리통계표 조선 편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로 표기하여 발행하였다.

1899년 일본 해군성이 《?瀛水路誌》 대신 국가별 수로지를 발간하였는데, 이때 독도는 《朝鮮水路誌》第2版(1899.2.; 「リヤンコ?ルト」列岩; 263-264쪽)에서 수록하였다.

1900년 10월 25일, 고종 38년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41호를 공포하여 울릉도를 강원도의 군으로 승격하고, 이 울릉군의 관할 구역으로 독도(당시 이름 석도)를 포함시켰다. 그리고 이를 대한제국 관보를 통해 공포하였다. 일본의 학자는, 석도가 독도를 가리킨다고 하는 근거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1901년 ~ 1945년

러일전쟁이 진행중이던 1904년 8월, 일본 정부는 동해 안에서의 러시아 군함 활동을 정찰하기 위해 울릉도와 독도에 군사용 망루를 설치하려고 했다. 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 회의에서 ‘다케시마’(이 이름에는 혼동이 있다. 아래 문단을 보라.)를 시마네 현 오키시마 츠카사의 소관으로 지정하였으며 같은 해 2월 22일에는 섬을 무주지로 간주하고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내용의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를 발표했고, 6월 5일에 관보(官報)에 ‘다케시마’(竹島)라고 명시하여 공포하였다. 하지만 당시까지 도서를 영토로 편입할 때 내각회의를 거쳐 관보와 신문에 고시해온 관행(慣行)(도서의 일본 영토 편입 관행)과 달리 유독 독도의 경우 소위 시마네현고시 40호는 당시 일본의 104개 신문 중 어디에도 고시되지 않았고, 넉 달이 지난 6월에서야 관보로 고시하였다. 더구나 그 뒤로도 70년이 넘도록 시마네 현은 현 지도에 독도를 넣지 않았다.

당시 ‘마츠시마’와 ‘다케시마’라는 이름 사이에 혼란이 있었다. 1905년 이전에는 ‘마츠시마’가 독도를 가리키는 말이고 울릉도를 ‘다케시마’라 불렀지만, 1905년 이후의 지도는 대부분 반대로, 곧 울릉도를 ‘마츠시마’,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고 있다. 당시 독도의 한국어 이름은 ‘석도(石島)’였고 호남 출신의 울릉도 주민들은 ‘독섬(호남 사투리로 ‘돌섬’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또한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에서는 무주지선점론(無主地先占論)에 따라 “독도는 1905년 당시 주인없는 땅(無主地)이었으므로 일본이 무주지(無主地)를 선점(先占)할 경우 영토 획득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국제법상 요건을 충족시켜 시마네 현(島根?)에 편입시킨 합법적인 일본의 영토”라는 밝히고 있으며, 국제법적으로 정당한 영토 편입이라는 중요한 증거로서 그 고시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학자들은 독도는 무주지도 아니었으며, 일본조차 죽도 고증(竹島考證)(상/중/하) 등을 통해 조선 영토임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당시 일본 내무성은 러일전쟁이 종결되기 전에 독도를 편입시키는 것은, 열강에게 ‘일본이 한국 병탄의 야심이 있지 않은가’하는 의심을 갖게 할 위험이 있다고 영토 편입을 반대하였다. 이 사실은 독도의 일본 편입은 한국 영토의 일부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행위임을 일본 내무성 스스로가 인정하였다는 근거로 쓰인다.

국제법에서 일컫는 선점(先占)의 경우, 무주 지역을 자국의 영역에 편입한다는 사실을 국내외에 공표하게 되어 있는데, 일본은 정상적으로 공포하지 아니하였다(위의 도서의 일본 영토 편입 관행를 보라). 현재 이 고시의 원본은 유일하게 시마네현청에 단 1장 보관되어 있는데, 이 문건은 1905년 2월 22일 당시 시마네현에서 발간됐던 시마네 현령(島根?令)이나 시마네 현 훈령(島根?訓令) 어디에도 수록돼 있지 않으며, 더구나 이 문건에는 “회람”(回覽)이라는 주인(朱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영토의 합법적 편입을 밝히는 “고시”라는 일본의 주장과는 달리 고시가 아닌 단순히 관계자 몇몇이 돌려보는 회람일 뿐이며, 이는 또한 선점이 공표되어 진행되지 않고 몰래 진행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된다고 한국의 학자들은 주장한다.

울도(울릉도) 군수 심흥택은 1906년 3월 28일에 일본이 독도를 영토로 편입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튿날 강원도 관찰사를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이 사실을 보고했는데, 이 보고에서 처음으로 섬의 이름을 ‘독도(獨島)’로 썼다.[8] 대한제국 참정대신이 일본에 공식적으로 항의한 것은 그 뒤였다.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에서 발행하던 신문에서도 독도 편입에 대한 비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1년 동안 아무 공식적인 비난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지만, 한국측에서는 이것이 1905년 11월 맺어진 을사조약을 전후로 일었던 혼란 때문이었다고 이를 반박한다.

한편 《간코쿠시니치리(일본어: 韓?新地理, ‘한국 신지리’, 1905년)》나 《데이코쿠 백과사전(일본어: 帝國百科全書, 1905년 9월)》에 수록된 지도와 같이 시마네 현 고시가 발표된 지 몇 달 뒤에 출판된 일본 지도에는 독도를 일본에 속해 있는 영토로 표시하지 않고 있다. 또한 한국 학자들은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다케시마’를 시마네 현 고시에 쓴 것은 잘못된 것이며, ‘마쓰시마’와 ‘다케시마’라는 이름 사이에 혼란이 있었던 사실도 당시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토 의식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지적한다.

1907년 일본 해군성이 펴낸 《朝鮮水路誌》第2改版에서는 竹島[Liancourt rocks](451-454쪽)를 수록하였으며, 이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한 뒤인 1933년에 펴낸 《조센엔간수이로시(일본어: 朝鮮沿岸水路誌)》에 그대로 이어진다.

1933년에 일본 해군이 작성한 《조센엔간수이로시(일본어: 朝鮮沿岸水路誌, ‘조선 연안 수로지’)》와 같은 지도에는 독도가 조선 지역으로 들어 있다. 조선총독부가 1936년 펴낸 지도인 육지측량부발행구역일람도, 1943년 펴낸 교과서, 1945년 7월에 펴낸 해동지도에는 독도가 조선 지역의 땅으로 나와 있다. 이것이 독도가 조선의 영토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때 한반도에 대한 통치권은 일본 제국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한반도 쪽으로 분류하는 것이 편하리라고 판단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1946년 ~ 1950년

1946년 1월 29일 이차 세계대전에서 진 일본을 통치하던 연합군 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er of Allied Powers)는 일본 정부에 지시령(SCAPIN) 제677호 〈약간의 주변지역을 정치상 행정상 일본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에 관한 각서〉에서 일본의 영토를 다음과 같이 지정하고 있다.[9]

For the purpose of this directive, Japan is defined to include the four main islands of Japan (Hokkaido, Honshu, Kyushu and Shikoku) and the approximately 1,000 smaller adjacent islands, including the Tsushima Islands and the Ryukyu (Nansei) Islands north of 30° North Latitude (excluding Kuchinoshima Island); and excluding (a) Utsuryo (Ullung) Island, Liancourt Rocks (Take Island) and Kuelpart (saishu or Cheju) Island, (b) the Ryukyu (nansei) Islands south of 30° North Latitude (including Kuchinoshima Island), the Izu, Kanpo, Sonin (Ogasawara) and Volcano (Kazan or Iwo) Island Groups, and all other outlying Pacific Islands including the Daito (Ohigashi or Gagari) Islands Group, and Parace Vela (Okino-tori), Kercus (Kinami-tori) and Canges (Nakano-tori) Islands, and (c) the Kurile (Ohishima) Islands, the Habomai (Hapomazo) Islands Group (including Suisho, Yuri, ?ki-yuri, ?hibotsu and Taraku Islands) and ?oikotan Island.

하지만 이 지시령에는 ‘포츠담 선언 제8항에서 언급된 부속도서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이 아니라고 쓰여 있다. 실제로 (b)와 (c)에 명시된 섬은 이후에 다시 일본으로 반환됐지만, 독도와 함께 (a)에 명시되어 있는 울릉도 제주도는 조선의 영토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계속 영유권을 갖게 되었다.

1946년 6월 22일 지시령 1033호 〈일본의 어업 및 포경업의 허가구역에 관한 각서〉는 어떤 일본 어선도 독도 부근 12해리 이내의 선 이내로 넘어갈 수 없도록 제한했다. 이 선은 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이른바 ‘맥아더 라인’이라 불렸다.

1947년 8월 대한민국에서는 한국 산악회 주최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1차 학술 조사가 실시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동시에 독도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 42~76번지로 행정구역이 정해졌다.

1948년 6월 30일에 미 공군의 폭격 연습으로 독도 근해에서 출어중인 어민 수십 명이 희생되어 1951년 1월 6일에 위령비가 건립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 점을 지적하며 연합군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간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항의한 바, 미국 공군사령관은‘독도’는 미국 공군 연습기지에서 제외되었다는 회답을 1953년 2월 27일에 대한민국 정부에 보내왔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미국이 대한민국 정부에 회답하였음을 들어 독도가 한국 영토로 재확인하였다고 주장한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이 한국 영토를 영공에서 방위하기 위해 설정해서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한국방공식별구역〉(韓國防空識別區域: KADIZ; Korean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에서, 유엔군(United Nations force)은 KADIZ 안에 독도를 포함시켜 독도를 한국 영토로 방어하고 있다. 이 사실은 유엔군 공군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지키고 있음을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다고 한국의 학자들은 주장한다.

 

 

 

독도는 우리 영토의 동쪽 끝 섬으로,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87.4km, 동해안의 죽변에서는 동쪽으로 216.8km 떨어진 곳에 있다.
한편 일본측에서 독도와 가장 가까운 시마네현의 오키섬으로부터는 북서쪽으로 157.5km 떨어져 있어, 울릉도에서는 맑은날 독도를 볼 수 있으나 오키섬에서는 불가능하다.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된 독도는 하나의 섬이 아니라,
동도와 서도 2개의 큰 섬과 주위에 89개의 부속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도좌표는 동도가 동경131°52′10.4″ 북위 37°14′26.8″,
서도가 동경 131°51′54.6″ 북위 37°14′30.6″이다.
 

독도의 총 면적은 187,554㎡(동도 73,297㎡, 서도 88,740㎡, 부속도 25,517㎡)이며, 해양수산부 소유의 국유지이다. 동도와 서도간의 해협은 폭 151m, 길이 약 330m, 수심 10m 미만이다.

 동도
동남쪽에 위치한 동도는 유인등대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해양수산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동도의 높이는 98.6m, 둘레 2.8km, 면적 73,297㎡로 장축은 북북동 방향으로 약 450m에 걸쳐 경사 60°로 뻗어 있고 중앙부는 원형상태로 해수면까지 꺼진 수직홀이 특징이다. 

서도
서북쪽으로 위치한 서도는 높이 168.5m, 둘레 2.6km, 면적 88,740㎡, 장축은 남북 방향으로 약 450m, 동서방향으로 약 300m 가량 뻗어 있다. 서도의 정상부는 험준한 원추형을 이루고 있고, 주요 시설물로 어민숙소가 있다.

 

독도는 해저 약 2000m에서 솟은 용암이 굳어져 형성된 화산섬으로 신생대 3기 플라이오세 전기부터 후기 약 460만년 전부터 250만년 전 사이에 형성되었다. 울릉도가 약 250만년 전부터 생성된 것에 비해 약 200만년 앞선다.

동도는 2개의 화산화구 흔적이 있고 정상이 비교적 평탄한 반면, 서도는 산정이 뾰족한 원뿔형이다.

지질은 화산활동에 의하여 분출된 알칼리성 화산암으로, 현무암과 조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토양은 산정상부에서 풍화하여 생성된 잔적토로서 30°이상의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토성은 사양질이며 흑갈색 또는 암갈색을 띠고 있다.
독도의 기후는 난류의 영항을 많이 받는 전형적인 해양성 기후로 연평균 기온이 약 12°C, 가장 추운 1월 평균 기온이 1°C, 가장 더운 8월 평균 기온이 23°C로 비교적 온난한 편이다. 바람이 많은 독도의 연평균 풍속은 4.3m/s 로 여름에는 남서풍이 우세한 반면 겨울에는 북동풍이 우세를 보이고 있다.

독도는 안개가 잦고 연중 흐린 날이 160일 이상이며 강우일수는 150일 정도로 연중 85%가 흐리거나 눈·비가 내려 비교적 습한 지역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약 1,240mm, 겨울철 강수는 대부분 적설형태이며 폭설이 많이 내리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강한 해풍과 암석류의 척박한 토질로 인하여 식물이 잘 자랄 수 없는 환경이며, 철새 이동경로의 중간 피난처 및 휴식처로서, 우리나라 생물의 기원과 분포를 연구할 수 있는 생물지리학적으로 중요한 도서이다.

 

현재 독도에 거주하는 주민은 김성도(독도호 선장)·김신열씨 부부와 편부경씨 3명이다.
김성도·김신열씨 부부는 1991년 11월 17일 이후 서도에 거주하며 어로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현주소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20-2번지이다.
편부경(시인)씨는 2003년 11월 19일에 독도주민으로 이주했다.

김성도씨는 1970년대부터 최초의 독도주민 최종덕 소유어선(덕진호, 2.22톤) 선원으로 독도(서도)에 거주하면서 수산물 채취 등 공동어로 활동을 해오다가 1987년 최종덕씨 사망후 본인 소유어선 (명성호 2.08톤, 부영호 1.5톤)을 이용하여 서도에 상시 거주하면서 본격적인 어로활동을 하다가 1991년에 현재의 주소지에 주민등록을 등재했다.

독도에 처음으로 주민등록을 이전하여 거주한
사람은 최종덕씨였다.
그는 1965년 3월에 울릉도 주민으로 도동 어촌계 1종 공동어장 수산물 채취를 위해 독도에 들어가 어로활동을 하면서 1968년 5월에 시설물 건립에 착수였다.

그 후 1980년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고 나오자, "단 한 명이라도 우리 주민이 독도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겠다."며 1981년10월14일 독도로 주민등록지를 옮겼다고 한다.

당시 주소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67번지였다.
그는 수중창고를 마련하고 전복수정법과 특수어망을 개발하고, 서도 중간분지에 물골이라는 샘물을 발견하는 등 많은 노력을 쏟으며 살다가 1987년 9월 23일 사망하였다.

최종덕씨의 사위 조준기씨가 1986년 7월 8일 같은 주소에 전입하여 거주하면서, 1991년 2월 9일 산63번지로 전입하였다가 1994년 3월 31일에 강원도 동해시로 이주하였다.

위의 주민들 외에 지금까지 독도에 주소를 두고 거주하였던 주민으로, 최종찬씨('91.6.2~'93.6.7), 김병권씨('93.1.6~'94.11.7), 황성운씨('93.1.7~'94.12.26), 전상보씨('94.10.4~'94.12.18)가 있었다.

독도에 주소지를 둔 주민은 3명이지만, 1999년 일본인 호적등재 보도 이후 '범국민 독도 호적 옮기기 운동'이 전개되어 613가구 2,051명(2007년말 기준)이 독도에 본적을 두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동도에 지난 1997년 11월 7일 총177억여원의 사업비를 들여 80m의 주 부두와 20m의 간이부두, 137m의 진입로를 갖춘 독도의 접안시설을 준공하였다.

● 준공기념비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새겨져있다.

현재 동도에는 독도를 지키는 경비대와 등대관리원이 상주하고 있으며, 서도에는 김성도씨 부부가 생활하는 민가가 있다. 또한 이 두 섬에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다.

동도의 주요 시설물인 독도유인등대는 애초의 독도무인등대를 1954년 8월에 유인등대화하였고, 1998년 12월에 광력 25마일 수준으로 상향시켜, 독도 주변해역에서의 조업어선의 안전을 위한 항로표지기능을 하고 있다.

서도의 어업인숙소는 독도지역의 어업활동과 학술조사연구를 지원하고 어민을 비롯한 해양 종사자의 긴급대피와 숙박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1997년 해양수산부가 건립한 어업인숙소는 그동안 선박접안시설 미비로 이용에 어려운 점이 있었으며, 게다가 2003년도 태풍매미의 피해로 상시 거주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2005년 10월에 태풍 피해를 입은 서도 어업인숙소와 선박접안시설의 복구공사가 완료되어 현재 김성도씨 부부가 거주하고 있다.


- 동도(東島) : 접안시설(642평), 경비대 막사, 정수, 통신, 삭도, 헬기장, 지정통로
- 서도(西島) : 어업인숙소, 선착장, 발전기, 저수지탱크, 기상측정기, 지정통로(550m)
동 도
비 고
시설명
물량 및 기능
유인등대
1기(광달거리 25마일) 근무인원 : 3명
숙소면적 55.55m² 등탑높이 15m
기타 105.59m²(사무실 및 동력실)
98.12.10완공
해양수산부
숙소 및 막사
1동(내무반 250m², 체력단련실 85m²) 경찰청
초 소
2개소
 
지정통로
796m(폭80∼100cm)
 
삭 도
1기 300m(화물운반용)
 
정수시설(조수기)
1기(1일/1,500ℓ생산), 원수탱크 : 20톤 96.12.6 완공
저수탱크
저수량 : 20톤  
헬기장
1개소(면적 : 400m²) 최초 81.12.17
증축 97.8.11
식품저장시설
건물 11평(냉동창고 3평,냉장창고 8평) 97.7.9 완공
통신시설
무선시설 1식  
발전실
1개소 25평  
RD용 - 1개소, 통신탑 - 1개소  
접안시설
1식 - 면적 : 2,390m²
(27번지 : 1,945m², 28번지 : 445m²)
97.11.6 완공

 
서도
비 고
시설명
물량 및 기능
선착장
1개소  
어업인숙소
1동 118.92m² 울릉군관리
지정통로
550m(폭60∼80cm)
 
간이기장측정소
3종(풍향, 풍속, 기압계)
 
저수탱크
3,000ℓ(물골지하저수탱크)
1966년시설
발전기
1대 25Kw  
 
년도
제목 우산국(울릉도, 독도)이 신라에 병합되어 한국의 고유영토가 됨

* 출처 : 삼국사기(三國史記 卷4, 1145년)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1145년)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와 [열전] 이사부조 에 오늘날 우리가 독도로 인정하는 우산도에 대한 기록이 실려있다.
독도는 현재에도 그렇지만 예로부터 울릉도의 기록과 함께 문헌에 나타난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울릉도가 독립적으로 우산국(于山國)이라는 고대부족읍락국가를 이루고 살았는데 그 영역은 가시거리 내에 위치한 독도를 포함해 울릉도 주변의 소도서에 이르렀다. 여러문헌의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우산국 사람들은 그 지형 및 토양으로 보아 반어반농민집단 생활을 하여 왔으며, 내륙보다 낮은 문화 수준이었으나, 신라 사람과 언어가 통하고 왕래도 있은 듯하다. 우산국 사람들은 본토에 귀속되는 것을 거부하며 살아 왔는데, 신라의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 溟州)의 군주(軍主)로 있으면서 우산국을 신라에 귀속시켰다.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편입된 시기를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이사부가 우산국을 귀속시킨 512년(신라 지증왕 13)때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후 지금의 울릉도와 독도에는 신라의 문화가 계속 유입되었다. 현재까지 울릉도에서 발굴·출토되고 있는 유적·유물들은 우산국이 신라에 정복되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문화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복이후 한반도 본토 문화의 활발한 유입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독도는 일찍이 우산국의 일부였다가 지증왕 13년(512년) 울릉도와 더불어 신라에 의해 영유화되어 울릉도의 부속도서로서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권에 편입되어, 우리의 고유영토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원문을 그대로 풀이해보면

至十三年 壬辰 爲阿瑟羅州軍主 謨幷于山國 謂其國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抵其國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放此孟獸踏殺之 其人恐懼則降
"신라 지증왕13년(512년)에 이슬라주 군주로 이찬 벼슬에 있는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정복하게 하였으며, 이사부 등 신라의 군사들은 우산국 사람들의 위세를 목우사자(木偶獅子:나무로 만든 사자 인형)를 이용하여 꺽음으로서 결국 우산국 사람들로부터 항복받기에 이르렀다."

 
년도
제목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독도를 한국 영토로 세계에 공표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수록한 官報

1900년 울릉도와 죽서도(竹島), 석도(獨島)를 관할하는 행정구역으로 울도군을 설치한다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게재했다. 

대한제국은 일본인들의 끊임없는 울릉도 불법 입국과 정착을 방지하는 적극적 대책의 일환으로 지방행정체계를 개편하여 1900년 10월 칙령 제41호를 제정 반포해서 종래 강원도 울진군에 속했던 울릉도를‘울도군’(鬱島郡)으로 승격시키고 새로운 울도 군수를 임명하였다.
울도군이 관리하는 구역은 울릉도·죽서도(죽도)와독도(石島)로 하였다. 그리고이 관제 개정을 중앙『관보』에 게재하여 전 세계에 알려지게 하였다. 이 1900년 칙령 제41호에 의해 서양국제법 체계에서도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또 한번 세계에 공표하게 되었다.

독도 공도정책을 폐기하고 이주정책을 실시하자 울릉도에는 다도해 호남지방 어민들이 다수 정착했는데, 이주민들은 독도의 종래 관명인‘우산도’보다 돌로된 섬이라는 뜻으로‘돌섬’(호남 사투리로‘독섬’)이라고 더 자주 호칭하였다. 이 ‘독섬’을 발음 중심으로 한자 표기할 때는‘獨島’(독도)라 표기하고, 뜻 중심으로 한자 표기할 때는‘石島’(석도, 돌섬)라고 표기하였다. 서양 사람들은 최초로 서양지도에 독도를 그린「리앙쿠르(Liancourt) 호」의 이름을 따서‘독도’를‘리앙쿠르바위섬’(Liancourt Rocks)이라고 호칭하였다.

 
년도
제목 대한민국 옛 영토중 동해상에 위치한 무릉도(울릉도) 와 우산도(독도)가 있음을 명시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수록한 官報
1900년 울릉도와 죽서도(竹島), 석도(獨島)를 관할하는 행정구역으로 울도군을 설치한다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게재했다.

* 세종실록지리지 (1432년 편찬)

세종실록 원문을 그대로 풀이해보면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新羅時 稱于山國
: 우산과 무릉(우릉)의 두 섬은 (울진)현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의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서로 바라 볼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우산국 이라 불렀다.
※ 세종시대에는 울릉도를 ‘武陵島’(무릉도·우릉도, ‘武’의 중국 음은 ‘우’)
  ‘독도’를 ‘于山島’라고 불렀다.
이 사실은 17세기부터 고지도에서 오늘날 ‘독도’의 정확한 위치에 있는, 울릉도 이외에 또 하나의 섬을 ‘우산도(于山島)’라고 부른 사실에서도 재확인된다.

동해의 중요한 지리상 특징 중 하나는 바다 중앙에는 큰 섬이 ‘울릉도’와 ‘독도’ 두 섬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울릉도 주변에는 몇 개의 큰 바위섬이 있는데 이들은 가까워서 날씨가 청명하지 않아도 매우 잘 보인다. 오직 날씨가 청명한 경우에만 조그맣게 서로 보이는 섬은 동해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없다.

위의 자료에서 보듯이 신라시대에는 ‘울릉도’(武陵島)와 ‘독도’(于山 島)를 합하여 ‘우산국’(于山國)이라고 칭했다고 기록해서, 우산국이 ‘울릉도’와 &lsquo독도’를 영토로 한 고대부족읍락국가를 이루고 살았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산국’이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 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는 것은 영토상으로는 ‘울릉도’와 ‘독도 ’가 신라에 병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기록중 우산도와 울릉도를 구분한 점은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과 함께 울릉도의 옛 명칭이 우산이였고 대한민국 옛 영토중 동해상에 위치한 섬은 울릉도 하나였다는 주장과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들고 있는 시마네현 고시 이전에는 독도의 주인이 없었다는 주장이 모두 허구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지금도 울릉도 성인봉(높이 984m)에서는 날씨가 맑으면 독도가 뚜렷이 보인다.
위의 자료로 세종실록지리지에 표시된 ′우산′이라는 섬은 독도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17세기부터 고지도에 표시된 울릉도 이외의 또하나의 섬이 지금의 독도(우산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년도
제목 17C말 일본정부, 독도.울릉도를 한국영토로 재확인

- 숙종실록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즉위년인 1674년 8월~1720년 6월의 실록.

* 숙종실록
숙종 때는 독도를 ′자산도′라 불렀다.
1693년(숙종 19) 일본 어부가 독도와 울릉도 근해까지 출현하여 어로 활동을 하므로, 동래 어부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고유 영토임을 확인받고, 일본 어부들의 울릉도와 독도 근해의 어로 활동을 금지토록 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매 3년마다 울릉도, 독도 지역을 샅샅이 조사하여 지도와 함께 보고토록 하였다.

시대적 배경
 일본이 1592-98년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임진왜란 후 조선왕조의 통치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죽도(竹島ㆍ다케시마) 혹은 의죽도(磯竹島ㆍ이소다케시마)로 독도를 송도(松島)라 부르면서, 울릉도ㆍ독도 등지에서 몰래 고기를 잡거나 나무를 도벌하기 시작했다. 1614년(광해 6)에는 대마도주가 의죽도(울릉도)로 가는 길을 안내해 달라는 사신을 보내기도 해 우리 나라는 이를 거듭 물리쳐야 했다. 그러나, 1618년(광해 10)에는 호끼슈(伯耆州) 요내꼬(米子)의 상인 오오따니(大谷), 무라까와(村川)가문이 에도의 도꾸가와막부(江戶 德川幕府)로부터 정식 면허(竹島渡海免許)를 받는 등 일본인의 울릉도ㆍ독도에 대한 침구는 계속되었다.

한편 정부의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어부들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어장인 울릉도ㆍ독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693년(숙종 19)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을 중심으로 한 동래ㆍ울산 어부 40여명이 울릉도에서 오오따니 가문의 일본어부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로써 울릉도ㆍ독도의 영유권을 놓고 1699년(숙종 25)까지 약 6년간에 걸친 한일간의 외교 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논쟁은 울릉도를 죽도(竹島-다께시마)라 칭하고 마치 별개의 섬인양 하여, 울릉도 점령의 근거를 얻어내려 한 대마도주의 계략을 사서(史書)와 안용복의 증언 등을 통하여 간파한 조선 조정의 강력한 대응과, 일본에 건너간 안용복의 당당한 항의로 “이후 다시는 울릉도 등지에 왕래하지 않겠다”는 일본 막부의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종결되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조선에서는 울릉도ㆍ독도 등지에 대한 순찰을 강화해 3년마다 한번씩 정기적으로 수토관을 파견하기로 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울릉도ㆍ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명치유신 후 일본이 제국주의적 팽창을 본격화하기 전까지 일본의 서쪽 경계를 오끼섬 까지로 한계짓게 되었다. 1696년 호끼주(伯耆州) 태수가 작성한 이소다께시마각서(磯竹島覺書)와 1785년 하야시(林子平)의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地圖), 1881년 기따자와(北澤正誠)가 작성한 竹島考證ㆍ竹島版圖所屬考 등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주는 일본측 자료들이다.

일본, 1905년 독도 강제 편입



강원도 관찰사 서리가 참정대 신에게 올린 울도군수 沈興澤의 보고서와 대한제국 참정대 신의 지령문(1906)

울도군수 심흥택은 이 보고서에서“본군 소속 獨島가”라고하여 독도가 자신이 통치하는 영토임을 밝혀 항의했고, 참정대신은“일본의 獨島領有의說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라며 일본측 주장을 항의 비판하였다.

일본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후, 동해에서 러시아 함대의 동태를 감시하는 해군 망루(望樓)를 독도에 세우기로 하였다. 이 때 마침 나카이(中井)라는 일본 어업가가 독도의 물개잡이 독점권을 독도 소유권자인 대한제국 황제에게 신청하려 하였다. 일본 정부는 독도가 한국 소유 땅임을 알면서도‘무주지’
(주인 없는 땅)라고 전제하면서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였다. 그리고 이름을‘다케시마’(竹島)로 하며 시마네현 행정소관으로 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일본은‘독도’가‘한국 영토’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 독도 영토편입이 세계에 알려질 것이 두려워『관보』에 싣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독도는 1905년 1월 28일 이전에, 이미 서기 512년부터 한국 영토로서
한국이라는 주인이 있는‘유주지’였다. 따라서‘무주지’(주인 없는 땅)이기 때문에 독도를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는 일본 정부의 결정은 국제적으로 인정 받을 수 없는 불법적,무효의 결정이었다.
울도 군수는 1906년 3월 28일에 비로소 일본의 독도침탈 사실을 알고 강원도 관찰사를 통해 중앙정부에 보고했으며, 대한제국 참정대신은 즉각 일본의 불법성을 규탄하였다. 그러나 4년 후인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병탄되어 버렸으므로, 독도는 온 나라를 되찾을 때 함께 되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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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2.11 04:32

    첫댓글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나라안에서 아무리 왜쳐도 왜국에서는
    일본땅으로 알고 있으니
    제대로 대쳐 해야겠지요!..
    우리나라 주민들이 살고 그곳을 자유롭게 왕래 해야지요.
    감사 합니다/ 독도는 대한민국땅....♥^-^♥ 아싸..파이팅...

  • 10.02.11 22:08

    ㅁ맞습ㄴ니다 ~~~`제3ㅈㅈ자들은 독도가 일본땅 다케시마 ㅇ일본땅으로 알고있답니다 우리가 똑바로 알고잇ㅇ어야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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