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무성한 좁은 길에서 <br /> <br /><br /><br />1<br />오래 벼른 일, 만보(萬步) 걷기도 산책도 명상도 아닌<br />추억 엮기도 아닌 혼자 그냥 걷기!<br />오랜만에 냄새나는 집들을 벗어나니<br />길이 어눌해지고 이른 가을 풀들이<br />내 머리칼처럼 붉은 흙의 취혼(醉魂)을 반쯤 벗기고 있구나.<br /><br />흙의 혼만을 골라 밟고 간다.<br />길이 속삭인다.<br />계속 가요,<br />길은 가고 있어요.<br />보이는 길은 가는 길이 멈춘 자리일 뿐<br />가는 것 안 보이게 길은 가고 있어요.<br />혼자임이 환해질 때가 있다. <br /><br /><br />2<br />바람 잘 통하는 한적한 곳이<br />하늘과 가깝다고는 얘기 않겠다. <br /><br /><br />3<br />등성이 오르다가<br />이름 모를 빨간 열매들을 지나친다.<br />이름을 모르다니?<br />산수유겠지. 산수유,<br /><br />저 나무의 황홀한 보석들, 저걸 어떻게 다 꿰지?<br />꿰서 어디 걸지? 보석 탐하며 걷다 미끄러져<br />사람의 삶 한 토막이 길 위에 눕는다.<br /><br />삶의 토막들이 줄지어 누워 있어도<br />연결되지 않고 서로 부를 때가 있지.<br />누운 김에 다음 토막을 불러 본다.<br />대답이 없다.<br />옷의 흙을 털며 일어난다. <br /> <br /> <br />4<br />늙었다고 생각하면 길이 덜 미끄러워진다,<br />조심조심. 그러나 늙음은 사람이 향해 가는 그런 곳이 아니다.<br />방금 빨간 열매를 쪼러 온 허름한 새의 흰 꽁지에는 열매를 쪼는 기쁨 외에 아무것도 없다.<br /><br />영원히 젊은 삶이라는 헛꿈이 사라지면<br />달리 늙음과 죽음이란 없다.<br />소리꾼에겐 마지막 소리가<br />대목(大木)에겐 마지막 집이 잡혀 있을 뿐.<br /><br />사람은 길을 가거나 길 위에 넘어져<br />거기가 길이라는 것을 알려줄 뿐.<br />머리 위 나뭇가지들이 레이스 친 둥근 하늘을 만들고<br />돌고래 구름이 헤엄쳐 가고 <br />마음속이 아기자기 해진다.<br /><br />사람 하나가 어느 샌가 뒤로 와 스치고 지나간다.<br />나보다 바쁜 사람, <br />메뚜기들이 바지에 달라붙는다.<br /><br />샘이 잦아들고 있는 밭귀에서 발을 멈춘다.<br />물이 흐르지 못하고 땅에 잦아드는 것을 보면<br />주위가 온통 젖다 마는 것을 보면<br />누군가 가다 말고 주저앉는 모습,<br />가지 못하면 자지러드는 것이다.<br />주위를 한참 적시고 마는 것이다. <br /><br /> <br />5<br />길 위에 멈추지 말라.<br />사람들의 눈을 적시지 말라.<br />그냥 길이 아닌<br />가는 길이 되라.<br /><br />어눌하게나마 홀로움을 즐길 수 있다면,<br />길이란 낡음도 늙음도 낙담(落膽)도 없는 곳.<br />스스로 길이 되어 굽이를 돌면<br />지척에서 싱그런 임제의 할이 들릴 것이다.<br />임제는 이 길 만큼 좁은 호타(滹沱) 물가에서<br />길이 되라고 할하고 <br />채 못 되었다고 할 하고<br />그만 길이 다 되었다고 할했다.<br /><br />임제여임제여, 그대와, 내가 읽는 『임제록』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br />둘 다 같다는 손쉬운 답은 말라.<br /><br />땅이 만드는 풀의 열기<br />나뭇가지의 싱싱한 냄새<br />살아 있는 잎들의 서로 무늬 다른 살랑거림.<br />시인과 그의 시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br />다르다면 어느 것이 진품인가?<br />모르는 사이에 하늘 한편에 가볍게 걸려<br />빙그레 웃는 낮달. <br />공들여 빚은 것과 빚은 사람 다 진품이라.<br />시인은 시가 타는 심지, <br />허나 촛농이 없다면 그게 무엇이겠는가?<br />어느 순간 한 삶의 초가 일시에 촛농이 된다면?<br />할하라, <br />할하라, 아직 꺼지지 않은 심지를 향해. <br /> <br /><br /><br />6<br />무너진 사당 앞 <br />나뭇가지에서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와<br />그 옆 나무 둥치 구멍에 숨어 있는<br />나무결 빼어 닮은 올빼미를 만난다.<br />올빼미는 눈을 감고 있지만<br />곤두세운 촉각이 손에 잡힐 듯하다.<br /><br />그들에게 고개 끄덕이며 사람의 말로 인사한다.<br />"안녕들 하신가?" <br />다람쥐는 움직이던 목젖을 순간 멈추어 인사를 받고<br />올빼미는 몸을 조금 숙였다 편다.<br />다람쥐도 올빼미도 <br />팽팽한 삶 속에 탱탱히 가고 있는 자들.<br /><br />조금 걷다 뒤돌아보니 <br />다람쥐의 목젖도 올빼미의 촉각도 다 그대로 있다. <br />내 삶이 어느 날 그만 손 놓고 막을 내린다 해도<br />탱탱히 제 길 가고 있을 촉각들을 생각하면<br />마음이 한가로워진다. <br /><br /><br />7<br />이제 길이 <br />다시 집들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br />양돈장이 나타나고 <br />버려둔 밭이 나타나고<br />메마른 검은 사내가 나타 나고<br />서로 인사 않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br />그러나 나는 가고 있는 길에 물든 눈으로<br />도시 상공에 한창 타고 있는 저녁놀을 본다.<br />잠깐, 그 무엇보다도 더 진하고 간절한,<br />보면 볼수록 안공(眼孔) 속이 깊어지는.<br />다리를 건너다 한 사내에게 <br />무심결에 인사를 한다.<br />얼떨김에 그가 인사를 받는다.<br />모르면서 서로 주고받는 삶의 빚,<br />가다 보면 그 누군가 마음 슬그머니 가벼워지는 순간 있으리,<br />없는 빚도 탕감 받는.<br />길의 암전(暗轉), 한 줄기 빛! <br />서서히 동굴 벽이 밝아지고<br />그림 하나가 부활한다.<br />한 손엔 횃불, 또 한 손엔 붓을 든 사람 하나가<br />큰 대(大)자로 취해 노래, 노래 부른다.<br /><br /><br />/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2003)<br />문학과지성 시인선 268. 황동규 시집 _<br /><br />ㅡ 이 시에게 감사한다. 감사합니다.<br />왜 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를 보고 보고 또 다시 보게 된다. 아직도 완전히 다 이해했는지는 모르오나. 이 정서와 이 느낌이 좋아서일까. 10번도 넘게 읽었다. 아직 시집 초반인데, 하나의 시에 끌려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br /><br />삶의 풍경들이 고스란히 내 마음을 잡아끈다. 자꾸만 홀로 들이든 산이든 강가든 걷는 나를 그린다. 지금의 내 모습을 이 시가 비춰주는 것 같다. 무언가 말해주는 것 같다. 삶의 약간의 이정표랄까. 내가 위안을 얻으니 자꾸 보게 되는거겠지. <br />나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나의 길을 가고 있는가.<br /><br />그냥 살고 싶다. <br />뚜벅뚜벅. 좀 고요히. . . 덩그러니 걸어가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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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할! 똥 ! 아 나!
저도 생각없이 길을 걷고 싶네요^^
야~~~
그냥 살자
ㅋㅋㅋ 전 이 댓글에 공감이 !
@레이 ㅋㅋㅋㅋ 나도 공감이 갑니다.
아 낯이 뜨겁네요ㅋㅋㅋ
@명징 허존사^-^
무엇에 취해
무엇을 들고
어디를 걷고 있나요^^
감사합니다
하하하...
명징의 감성을 따라가기엔 멀었나봅니다...^_^
저는 중간에 '임제'만 눈에 들어오네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던 임제...
그렇게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라던 임제...^_^
저만의 길을 갑니다!
그냥 살고싶다는 문구가 가슴에 와닿네요.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생각들을 하고 사는데
그냥 생각을 버리고 살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