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집․2
전철이 노량진 철교를 지날 때였다.
철교 아래 강물을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아이들 팔목에 차는 분홍색 링 하나가 자맥질을 하듯 떠내려갔다. 다가오는 서울역에서 환승해야 하는 나는, 문득 달리는 전철에서 강물로 폴짝 뛰어내리고 싶었다. 요즘 내 가슴에는 오리 한 마리가 살았다. 날마다 이 오리가 물갈퀴질로 아랫녘 고향을 꺼당기는 것이다.
영등포역에서 제일 빠른 순천행 열차편을 물어보니 새마을호란다. 시골은 밤 여덟 시면 잠자리에 들기도 해서, 다음 차를 물어볼 여유도 없이 찻삯이 부담스러운 새마을호 차표를 건네받고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오후 4시경이었다. 그런데 전광판에서 알리는 열차 시각과 목적지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광주행 새마을호와 여수행 새마을호가 같은 시각 같은 플랫폼으로 들어온다는 알림이다. 누구에게 딱히 물어볼 수 없어 기다려 보았다.
드디어 열차가 들어오는데 광주행 새마을호가 여수행 새마을호를 꽁무니에 매달고 들어왔다. 아마 두 열차가 붙어 가다가 어느 역쯤에서 각자의 길로 가겠지 했지만 처음 타는 사람이나 나이 든 어른은 아무래도 어리둥절할 법도 하다. 나 역시 헷갈려 잠시 머뭇거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연리지처럼 붙어 달리던 두 열차는 익산역에서 떨어졌다. 새마을호 열차가 앞뒤로 기관실을 다는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열차가 커브를 따라 달리자 차창 너머 저 멀리 앞머리가 보였다. 끌어주고 밀어주며 달려가는 두 열차가 전혀 고단한 기색 없이 띠앗 좋은 형과 아우처럼 정겹다. 어머니는 장을 담근다며 고향집에서 머무르는 중이다. 장을 담근다는 것은 구실일 뿐 봄이 오는 정취를 고향집에서 맞고 싶은지도 모른다. 평소 비어 있는 고향집은 30여 년 전 도로건설 현장 인부의 식사를 대면서 놉을 얻어 당신이 손수 지은 집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겪지 말아야 할 고생을 겪으며 지은 집이어서 그 애정이 남다르다. 어머니에게 그 집은 특별한 공덕 같은 것이요, 세상의 모든 시름을 감싸주는 당신의 어머니 같은 존재이다. 마당에 깔린 자갈 하나, 화단의 꽃나무 하나, 창문의 문살 하나하나 당신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고, 언제든 내려가면 어제까지 살았던 집처럼 지낼 수 있도록 현대식으로 손을 봐 놓았다. 그렇더라도 어머니 없이 빈집만 우두커니 서 있는 고향은 별 의미가 없다. 집은 어머니를 품고 어머니는 고향을 품고 있어야 내려갈 마음이 앞선다.
고향이 어머니 품에 안겨 있다고 생각하니 자꾸 마음이 쏠렸다. 주말에 잠깐 내려갔다 올까. 갈팡질팡 마음이 움직일 때마다 고향 하늘의 별들이 떠올라 반짝였다. 순천역에 내리는 밤이면 나는 먼저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에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를 지켜본 별들이 헤벌쩍 웃고 있었다. 결국 전화를 걸어 어머니의 의중을 떠보았다. 여비를 걱정하면서도 어머니는 은근히 내려왔다가 가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이제 겨우 달포 동안 떨어져 있을 뿐이어서 자식이 보고플 리 없었다. 단지 애지중지하는 시골집에서 무엇이든 챙겨 먹이며 자식들을 마음으로 품어보고자 하는 당신이다. 도시보다 시골에서 자식의 먹을거리를 챙길 때 당신은 더 행복해 한다. 그런 당신에게 진정한 집주인의 권위가 느껴졌다.
천 리 길을 달려 고향집에서 어머니를 만나면 하루만 떨어져 있어도 반갑다. 저녁 8시 반 경 도착한다고 하자 마중을 나오겠단다. 마중을 핑계 삼아 시내 마트에서 적당히 시장을 봐갈 속내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노모가 마중을 나오겠다니 마음이 푸근하면서도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일찍 나와 서성거리면 어쩌나 싶어 조급해진다. 나와 비슷한 연륜의 지인을 살펴보면 어머니가 살아계신 경우가 거의 절반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들은 천수를 다하지 못한 셈이다. 일흔여섯의 내 어머니는 그런대로 건강한 편인데 몇 해 전부터는 어머니에게도 나에게도 한 해 한 해가 듬뿍듬뿍 무 잘려나가는 듯하다. 한강물처럼 흐른 듯 멈춘 듯하던 세월이 어느덧 드문드문 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래서 내처 함께 살고 있어도 당신이 잠시 도시의 집을 비우면 그 빈자리가 불안하다. 황량한 겨울 들판에 떨어진 철새 한 마리처럼 나는 막막하고 불안하다.
상행선 열차가 지나면서 속도와 속도가 굉음을 내며 스친다. 돌이켜 본 지천명의 삶도 숨 한 번 내쉬면 스쳐버린 두 열차의 인연처럼 허무하다. 50년이라는 긴 세월이 시속 150km 안에서는 그저 한순간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부딪치며 내는 속도의 굉음처럼 열정적으로 소리지르며 살아볼 일이다. 속도 위에서 낮과 밤이 뒹굴더니 어느새 나를 순천역에 내려놓는다. 이번에는 하늘의 별보다 출구를 응시한 채 구부정하게 선 어머니에게 먼저 시선이 간다. 어머니가 있는 고향에 오면 초라한 삶도 행색도 잊는다. 본시 가진 것 없이 태어난 고향이다. 집에 도착한 나는 목마르지 않은데도 물부터 한 사발 마신다. 우리만의 지하수를 거리낌 없이 벌컥벌컥 마실 수 있는 행복도 사실 당신의 은혜이다. 새 소리 요란한 아침에는 마당으로 나와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쭉 기지개를 켤 것이다. 고요한 시골의 밤이 서정시처럼 흘렀다.
어머니는 그사이 새로운 차양을 지어놓았다. 아궁이가 달린 툇마루 쪽에는 쟁여놓은 땔감을 비닐로 덮어 눈비를 가리는데 아예 그곳까지 널따랗게 차양을 만들었다. 모아둔 당신의 용돈을 설치비용으로 건넸을 게 뻔하다. 다음날 나는 순천 오일장으로 나가 유자나무 두 그루와 모과나무 그리고 목련의 묘목을 사왔다. 내 어릴 적 유자나무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마을의 딱 한 집에서만, 푸르디푸른 이파리 사이사이 노랗게 열린 유자를 볼 수 있었다. 달빛이 환한 밤이면 유자는 더욱 우리를 홀렸다. 그 집 사랑채에서 살던 친구와 끝내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채 가시에 찔려가며 몰래 유자를 따곤 하였다. 몰래 딴 유자는 학교로 가져가 여선생님에게 선물로 드리기도 했다.
유자의 계절이 오면 아버지의 양복 주머니에는 늘 유자가 있었다. 아버지의 몸에서 풍기는 유자 향기를 나는 종종 킁킁거리며 맡았다. 아버지 몰래 유자를 꺼내보면 자꾸 매만져 말랑말랑해졌거나 시커멓게 변해 있기도 하였다. 어쩌다 한 번인가. 나는 새로 딴 유자를 아버지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이상하게 그토록 엄하던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나를 족쳐도 한참 족칠 일이었다.
묘목이 언제 커 유자가 열릴지 모르지만 유치원 다니는 조카 윤후가 주렁주렁 매달린 유자를 바라보며 내 어린 시절의 정취를 만끽해보았으면 한다. 나 또한 늙어 시골에 살게 되면 달빛 아래 고혹적인 유자를 바라보며 가끔 지나온 세월을 회억할 것이다.
더디 오는 도시의 봄이 아랫녘에서는 소란스러웠다.
-이승훈 에세이집 「가족별곡」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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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향 시골집에 가시고자 노모는 이 시각 영등포역에 계신다.
역까지 모셔다 드리지 못하고 나는 사무실에서 전화로 배웅을 하였다.
아침 빈 속이 쓰리다.
시선이 자꾸 벽 시계로 향한다.
어머니가 다녀 가셨군요. 찾아가 뵙고 오는 것 보다 더 많이 마음 쓰이셨을텐데 사무실에서 어머니가 도착하시는 시간까지 마음은 열차 안에 머물러 계시겠어요. 항상 선생님의 어머님의 건강을 기원드립니다.
지금쯤이면 고향의 유자나무도 많이 컸겠지요. 조카가 유자나무를 쳐다 본다면 그 감회가 뭉클하시겠습니다.
가족별곡이 열심히 속도를 내어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이 되어지길 응원합니다.
아니요, 여기에서 저와 함께 계시다가 한번씩 시골에 내려가셔서 바람도 쐬고 동네 친구분들도 만나고 그러십니다. 어머니에게 시골은 편안한 안식처입니다.
어쩐 일인지 어머니가 한번씩 여기를 떠나실 때마다 마음이 비상해지곤 합니다.
아...그러시군요.
시골 나들이 잘 다녀 오셔서 어머니 마음이 더 행복해 지셨으면 좋겠습니다. ^^*
고향 언제나 그립죠. 순천은 늘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둘러볼 때가 많은 곳입니다. 인근 지역과 연결이 잘 되어 있으니까요.
기회가 되면 시골로 한 번 초대하겠습니다.
아! 글을 읽다 보니 저절로 가보고 싶어집니다. 승훈샘 없는 승훈샘의 고향집 말고 승훈샘이 지키고있을 그 고향의 사립문을 벌컥열고 들어가 , 보소 보소 내 왔어요 하면, 반가워 성큼 달려나와 줄텐데. 그게 언제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