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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롬 1장 16~18절
제가 몇 년 전에 상림리교회 임직식에서 말씀을 전했을 때
그곳에 모인 모든 분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전한 말씀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떤 큰 충성을 했고, 어떤 대단한 일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임직자들은 교회를 주관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또한 교회를 위해서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생각을 해서도 안된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자
축사를 하기 위해 오신 노회장님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 말씀에 충격을 받은 것이지요!
노회장님은 대형교회 수석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전국 남선교회연합회 회장도 역임한 분이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장로님이었습니다.
그 분이 말씀에 너무 놀라웠다며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인사를 나누는데
많은 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씀이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계속해서 전하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때 한 설교를 반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왜 중요한지
그 말씀을 이어서 전하고자 합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부터 꼭 한 번 읽어 보고 싶었던 책은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였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또 이 책을 한 번 읽어 보고자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책이 너무 두꺼울 뿐만 아니라 너무 비쌌습니다.
그 책 한 권 값이 4만원이나 됩니다.
너무 비싸서 사고 싶지만 사는 것을 포기 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양근교회의 원로목사님이신 이준식 목사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준식 목사님은 얼마 전에
신장 투석을 하다가 간암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이 투병생활을 하시는 중에 저에게 전화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책을 한 권 보내 줄테니 저의 집 주소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소를 가르쳐 드렸더니
며칠 후 책 한 권이 소포로 전달되어 왔습니다.
그 책이 바로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였습니다.
저는 너무 기뻐서 목사님께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를 그 목사님이 누군가로부터 기증을 받아서
이 책을 여러 목사님들께 나누어 준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어 보려고 열어 보니 너무 어려웠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읽어 보아야지 하고 그냥 그 책을 덮어 놓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눈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이 책을 꽂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를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지내왔습니다.
얼마 전에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영화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소설이나 이 영화는 저자가 상상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그래서 결코 성경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소설이나 영화는 허무맹랑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몰아감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각이나 고정관념을 깨고 부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자 할 때에
인간이지만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천국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더욱 깨달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연구해 왔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삶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과 악이 함께 있는 것처럼
선과 악의 모순 속에서 인간이 사는 것을 수없이 경험합니다.
때론 그 모순이 너무 지나쳐
비린내가 날 정도로 역겨움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것을 더 깊이 연구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과학문명과 생명공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더욱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젊은 세대들의 삶을 보면서
무엇이 더 옳은 것인지 더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에 대한 수많은 고민을 할 때에
서울대학교 배철현 교수님이 쓴
<신의 위대한 질문>과 <인간의 위대한 질문>이라는 책을 보면서
그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정도 찾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는 것을 믿고
인간은 신성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를 했습니다.
보다 한 차원 높은 설명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보면서
저는 더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에
사탄의 유혹을 받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할 만큼 했으니까
더 이상 메시야로 죽지 말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으며
행복한 인간으로 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됐으니까 이제는 메시야로 고난받으며 살지 말고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인간이 소망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것인가가 우리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불행한 것 같고, 더 억울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부자라 할 지라도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이 불안하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달라지지 않는 인간을 보았습니다.
그간 10여년을 함께 하면서 살아왔지만
결국 옛날 그 더러운 오물통 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원하는 행복한 삶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메시야로 죽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메시야로 죽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자신의 행복한 삶을 살지 않고
메시야로 죽으신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하나님 앞에서 긍정으로 만들기 위해 죽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인간은 인간으로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으니
천국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를 했습니다.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은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입니다.
지금 인문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은 어떻게 인간으로 살 것인가를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월든 호수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소로우처럼 살자는 이야기도 많고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말한 것처럼 최대한 행복하고 즐겁게 살자는
이야기도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로 살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천국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바로 천국백성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왜 천국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왜 인간은 행복하게 살고자 하면서도 그렇게 실패하는 것일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왜 천국백성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을까?
저는 그 이유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다시 로마서를 보았습니다.
왜 로마서는 중세 교회를 개혁했고
왜 로마서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무너뜨렸을까?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로마서가 무엇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안에 진짜 중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래서 저는 과거에 로마서 성경공부 교제를 만들고자 했던 것을
다시 꺼내 정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목사님이 보내 주신 칼 바르트의 <로마서강해>를 펴 보았습니다.
<로마서 강해>는 매우 어렵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지만
한 자 한 자 짚어 가면서 읽자 조금씩 이해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인간은 천국백성으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이야기 했던 복음을
칼 바르트가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로마서 강해>를 통해 잘 설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인간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상심리교회 임직식에서 설교를 했던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계를 지배한 위대한 통치자라도,
훌륭한 인격과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도
선행과 도덕과 윤리로 아무리 가난해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었으며.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NO'입니다.
누구도 예외없이 'NO'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 장로님도 마찬가지이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 안에서 우리를 ‘yes’라고 받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는데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아닌 사람들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긍정해 주시는 그 은혜로 사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이 세대를 본받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제 천국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천국 백성으로 사는 삶은 바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과 같이 바보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의 <로마서강해>는 저에게 인생 책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고민하며 목회해 왔던 모든 것의 해답을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를 통해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돌아가선 고이준식목사님이
어떻게 해서 이 책을 저에게 보내게 되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목사님들께
이준식 목사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로마서강해>를 보내 준 것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분과 각별했던 분들에게 물어보았는데
전혀 그런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출판 연도가 언제인지 살펴보았더니
1997년도에 초판으로 발행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신장투석을 하다가 간암에 걸려 얼마 못 사실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중요한 책을 정말로 필요한 분에게 물려 주고 싶어서
저에게 보내 주었던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 안에다가 “목회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라는
글귀와 함께 보내주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했을 때에
복음으로 사는 것이 인생의 답이라고 말씀해 주시고자
그 목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에게 보내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금년에 오후 예배 시간에 로마서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와 함께
로마서로 이해하는 복음에 대한 성경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믿음으로 살고 싶어도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도 사랑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삶에 아직도 깨지고 부서지지 않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가 증명했듯이
우리는 로마서로 우리의 인생을 깨고 부수는 일이 있기를 원합니다.
천국백성으로서 복음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되기 위해서
로마서로 우리의 옛 것을 깨고 부술 수 있는 역사가 있기를 원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로마서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금년에 양평기쁨의교회의 표어는
“전도의 불꽃으로 교회를 부흥시키자!”입니다.
왜 이런 표어를 잡게 되었느냐 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왜 교회를 부흥시키지 못했는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적 현상도 있고 시대적 흐름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없이 지켜보고 관찰하면서 보아왔던 것은
우리의 삶이 깨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깨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옛 것을 즐기며 그럭저럭 성질을 부리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도 달라진 것도 없고
우리의 삶이 조금도 행복해진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상태로 살다가 그대로 죽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지고 부서진 것이 없어서
교회가 부흥하지 못했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의 생각을 부수고, 우리의 삶을 부수고,
우리의 교만을 부수고, 우리의 우상을 부수고, 우리의 텃세를 부수고,
우리의 세속적인 것을 깨고 부수자는 것입니다.
부서지면, 전도는 자연히 될 것입니다.
부서지면, 새신자들이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서지면, 교회가 부흥할 것입니다.
2019년도에 복음으로 내 인생을
다시 설계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