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승리하고 돌아온 백제병력은 2천여명이었다.
아래의 기사에서 20여명을 사로잡았다는 2여천명이 귀로하여 사비성으로 돌아갔음을 기록한 것이다.
반굴과 관창, 관장의 단기 출전으로 승리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백제군이 승리를 하여 돌아갔고, 신라는 대패하였던 것이다.
허구를 기록하기 위해 계백열전에서 출전하기 전에 계백이 처자식을 죽였다고 한 것이다.
백제 장군이나 귀족들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던 사람들이다.
백제 계백이 나이 어린 관창을 살려보내고 그 다음에 단기로 출전한 김품일의 부장인 관장을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으니... 신라군 중에서 과연 용맹하게 나아갈 생각이 있었겠는가?
더 이상 상대가 되지 않음을 간파했을 뿐이다.
신라군이 분기로 쳐들어간다고 해서 산위에 진을 친 백제군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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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7월 9일, 유신 등이 황산(黃山) 들판으로 진군하였다. 백제의 장군 계백(階伯)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병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장수와 병졸들의 힘이 다하였을 무렵,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였다.
“신하에게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에게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렇게 위급할 때에 목숨을 바친다면 충과 효 두 가지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반굴이 말하였다.
“삼가 분부를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곧장 적진에 뛰어들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官狀)[혹은 관창(官昌)이라고도 한다.]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에게 보이며 말하였다.
“내 아들의 나이가 겨우 열여섯이지만 의지와 기개가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삼군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관장이 “예!”라 대답하고,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서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적진에 달려들어 갔다. 관장은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겨보고는, 나이가 어린데도 용감한 것을 아끼어 차마 해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까지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야 어떠하겠는가!”
그리고 관장을 살려 보내도록 하였다.
관장이 본진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제가 적진에 들어가 장수의 목을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고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가서 맹렬히 싸웠다. 계백이 다시 붙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하였다.
“내 아이의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구나. 임금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스런 일이로다!”
삼군이 이를 보고 분기가 복받쳐올라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여, 백제의 무리를 크게 쳐부수었다. 계백은 그곳에서 죽었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