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사랑의 전도일기 원문보기 글쓴이: 낮은자
교회를 이렇게 섬겨야지!"라고 한번도 생각지도 못했을때 교회건축에 관하여 상상도 해보지 않았을때 주님은 나의 어리석음을 아시고 섬길수 있는 가장 축복의 자리로 인도해 가신 주님의 손길에 감격하지 않을수 없다.
중국선교의 비젼을 품고 성대중문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있었으나 묘하게 어떤 선교의 길로도 인도함을 경험한지 못한 상황에서 오직 테레사 꿈을 꾸며 24세 늦깎이로 공부하고 있었다. 서울로 전근되었어도 야갼대학을 다니느라 은행 동료이자 1년선배인 형선언니를 만나지 못한터에 마침 학교에서 데모로 수업이 결강이 되자 선배집을 찾게되었다. 그날 우연히 1차 기술고시합격자 발표날인데 1차부터 고시에 떨어진 형부친구분을 만나게 되었다.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어렵게 시간을 내어 선배집을 찾아 갔는데 고시1차에 떨어진 노총각 아저가 거기 계셨다! ....... 너무도 우울하고 안타까운 시점이라 위로한다고 모여 있었다. "사람이 그토록 외롭고 쓸쓸해 보일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에 충격을 받는다. 만나기는 처음이지만, 그전에 선배언니로 부터 형부친구가 고시에 합격하면 소개시켜 주겠다고 말한적이 있어 농담인줄 알았는데..... 그 장본인을 하필 가장 비극적인 그날 만나게 된 것이다. 그분은 이미 나를 사진으로 보고 알고 있었다. 선배언니가 사진을 취미로 하여 흑백사진을 나를 모델로 하여 찍곤 하였는데 이 사진을 본 모양이었다. 선배는 어머님께 대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같이 목포지점에서 근무하면서 동명원 아이들 간식을 위해 남직원 구두닦는 것도 도와주고, 주일엔 동명원 사역도 도와주며 나를 지켜본 선배이다. 그래서 그때는 치대를 다니고 있는 오빠를 소개해 주겠다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말하곤 하였는데 이젠 형부친구를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었는데.... 그만 낙방하고 만 것이다. 여하튼 인연의 끈은 그냥 거기서 끝나는 줄 알았다. 다음날 고시촌에서 짐싸서 집으로 들어가신다고 하셨고.... 그런데 이럴수가?! 기술고시 1차시험이 컴퓨터채점 착오가 생겨 다시 정정 되어 시험보게 되었고 연달아 2차, 3차시험까지 치룬후 수석합격을 확인하고 나서는 누군가를 먹여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은행 퇴근후 학교가는 길목에서도 기다리고, 끝나고 학교앞에서도 기다리고 하며 후배들이 그를 발견할때는 "언니 언니! 밖에 아저씨 또와 있어요!" 하며 호들갑떨며 알려주곤 하였다. 그렇게 뜻밖의 만남의 시간들이 더해져 갔다. 물론 중국선교를 품고 있고, 나는 공부에 투자하여 돈도 없고, 결혼 생각은 꿈에도 안해봤을 뿐 아니라, 더구나 선배언니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그분이 수석합격을 하였기에 중매자들이 앞다투어 연락이 온다고 귀뜸해 주었다. 그것도 아파트나 차키를 덤으로 얹어가며.... 그말을 듣게 된 나는 빨리 정리해야 겠구나! 라는 생각에 이별을 통고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공부를 계속하여 선교에 집중하겠다는 이유를 대고! 그 사람을 놓아주었다. 내 속마음은 "그가 지금껏 고생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그분이 여유있게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계속 옆에 있다면 나는 그 사람한테 아무것도 해줄것이 없었기에.....
헤어진 후 몇달이 흐르고 선배에 의해 전해들은 소식은 그분이 이별의 아픔때문에 매우 힘들어하고 있다고.... 나도 그분도 나이는 들었어도 매우 순수했던 터라 두사람을 다 알고 있던 선배가 다시 만남을 갖도록 주선하였다. 가진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겠냐는 질문에 자신도 지금까지 잠시잠시 공무원을 하며 고시를 준비해왔고, 그도 여의치 않을때는 형님과 형수님의 도움으로 오늘까지 왔기에 자기도 가진게 아무것도 없으니 맨손으로 함께 시작해보자고 하였다. 의기가 투합되어 갔고, 그를 사랑하였기에 이별이라는 기회를 주었던 터라 다시 만나게 되자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져갔다. 그러나 복병은 다른데 숨어 있었다. 결혼을 승낙받기 위해 양가를 찾아갔을 때 두집 다 반대는 만만치 않았다. 우리집에선 일단, 그가 크리스챤이 아니고, 두째는 열살이나 연상이어서 오빠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아저씨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분댁은 일찍 친부모님들은 다 돌아가셨지만, 작은 시어머님이 계셨고, 부모님같은 형님부부가 계셨는데 그댁은 종가집일 뿐아니라 불교가정이었고, 그것도 철저히 크리스챤을 반대하는 댁이었다. 형수님이 융성(남편)씨를 얼마나 겸손하게 섬기고 존중하시는지 살아갈수록 알수있었다. 형이 외국에 나가 10년 넘게 직장과 사업으로 나가 계셨을때 옆에서 함께 제사를 지내고, 마음에 의지를 하고 지내신 것 같았다. 그래도 너무 당황스러웠던 것은 우리의 결혼을 반대하시다 못해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가 버리신 것이다. 너무 황당한 상황이라 이해가 안됐으나 그렇게 사랑했던 시동생이기에 동서가 들어오면 제사와 종가집 모든 행사도 함께 하고 정말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는데 크리스챤이라고 하니까 낙담을 하신거셨다. 주변 이웃분이 복음을 전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아마 예수를 전하는 것이 싫어 왕래도 끊으셨다는 후담도 듣게 되었다. 또 형수님이 아는 크리스챤은 결코 개종을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주변에서 반대를 함에도 날짜를 잡는등 결혼을 계속 진행하자 급기야 속이 상한 형수님은 머리를 깎고 비구니들이 계신 곳으로 들어가 버리신 것이다. 정말 그때 시댁에는 아무도 크리스챤이 없으셨다. 어떻게 그런 볼모지에 시집갈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난 전혀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지 않고 오직 중국 선교에만 마음이 꽂혀있던 차였고, 예전에 교회 선배들을 비롯하여 남청년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개신교 수녀 공동체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누구도 나때문에 상처당하지 않도록 미리미리 마음을 주지 않았고 주변 정리를 깔끔하게 하려고 애써왔었다. 특히 첫사랑의 감정을 갖다준 그것도 여러해 동안 마음을 준 한 선배가 있었으나 그 그치지 않는 사랑에 감동되어 나도 마음을 연적 있었으나, 역시 나의 갈길은 섬김의 길이다 싶어 마음을 접고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형제의 사랑과 관심이 더욱더 내가 주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지켜준 버팀목이 되었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어쨌든 그런 반대가 혹독했던 시기에 큰 언니가 내게 물었다. "중국에 선교하는 마음으로 그 시댁을 구원하기 위한 각오로 시집을 가겠냐?"고.... 나는 그게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평소에 전도가 어렵게 생각되지 않았고, 전도가 일이었고, 또 내가 물도 설고, 낯도 설은 중국에도 선교하려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말이 통한 한국!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하는 형제들인데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싶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하자 아마 그이가 맨손이기에 마음이 많이 어려울거라고 그사람과 의논하여 시댁의 도움없이 맨손으로 출발해 보라고 권면해주셨다. 난 그말도 일리가 있다 싶어 융성씨에게 이런 내용의 말을 꺼내자 깜짝 놀랄 정도로 반가워하였다. 왜냐면 자기도 형님의 도움으로 결혼을 출발하는게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린 우리 나름대로 날짜를 잡고 양가에 통보하였고 결혼을 진행시켜 나갔다. 그런 와중에 형수님이 집을 나가셔서 "이 결혼을 과연 할 수 있게될까?" 의문이 들며 진퇴양난에 빠져들었다. 결국 형님과 가족분들의 도움으로 형수님의 계신곳을 알게 되었고 저희가 정한 결혼 날짜 바로 전에 돌아오셔서 결혼식을 무사히 치룰 수 있게 되었다. 우린 우리가 말한 대로 결혼시 시댁에서는 예물조로 수표 백만원받은게 전부였고, 우리 쪽에서도 어머님은 이불 두채 해주신게 전부였다. 형제들의 도움으로 살림은 대충 장만되었고 집은 내가 은행에서 2백만원 대출을 받아 집을 얻어 이백만원에 7만원 월세부터 신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는 나도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바가 없어 아무 거리낌이 없었고 그 사람도 부모가 중고등학교때 다 돌아가시고 그때까지 4급공무원을 하다 고시때가 되면 사표내고 하는 일들이 10여년 계속되고 하여 형과 형수님의 도움을 받고 염치없이 받고 있던터라 그분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너무도 자신의 스타일에 맞다!고 고백하며 서로 용기를 내었다. 난 결혼에 대한 비젼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결혼관도 별로 없었고 만약 내가 결혼한다면 사랑하지만 반드시 평생 존경할 수 있는 분과 결혼하겠다고 친구들과 개똥철학을 말한적은 있었다. 그러나 결혼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해볼 여유도 없었고 양가의 반대에 휩싸여 정신없이 전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살아갈 수록 내가 청년시절 했던 말들이 생각나곤 한다. 정말로 해가 갈수록 그이를 사랑함과 동시에 존경하며 살게 된것이다. 물론 부족한 부분이 왜 없겠는가? 만은 묘하게 그이한테 없는 부분은 내가 갖고 있고 내게 없는 부분은 그이가 갖고 있어 서로 맞춰가며 그이가 갖고 있는 장점을 보며 감사하며 살다보니 늘 존경과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또한 한때 내가 디아코니아 자매회라는 (개신교 수녀 공동체)공동체를 염두해 둔적이 있었는데 만약 그곳에 들어가 주님을 섬기고 살았다면, 아이를 낳아보지 않아 진정 자녀에 대한 사랑도! 부모가 되어보지 못한 상태에서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깊이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자녀를 낳아보고,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실제적으로 나에게 이해되어 다가왔다. 그래서 난 결혼을 주님이 내게 안겨준 선물이라 여겨진다. 남편을 만나 지금 결혼한지 만 27년이 되었는데 닥살스럽겠지만 아직도 신혼같은 시간들을 보내고 올해는 더구나 퇴직을 하셔서 함께 지내는 시간들이 많아 함께 시장도, 운동도, 신앙도 함께 하며 계속된 신혼을 즐기게 된다. 아이들에게도 더없이 자상한 엄마같은 아빠이시고..... 주님 주신 선물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께선 나의 약함을 아시고 주님의 일에 필이 꽂혀있던 나에게 일보다 먼저 가정에서의 참된 사랑을 배우라고 결혼이란 선물을 주셔서 거룩한 가정과 자녀를 생산케 하시고 행복과 사랑이 창조되는 가정을 갖게 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렇게 맞벌이로 시작해서 차츰 월세가 적은 전세로 옮겨지고 이러는 과정에서 주택은행 조합주택을 담당하는 지인이 계셨는데 나를 생각해주시며, 1년내내 끝없는 권유로 난 돈이 없어 생각도 못하고 있는데 계약금만 내고 조합아파트의 조합원이 되게 해주셨다. 중도금을 내고 하는 과정에서 그때는 저금을 하여 700만원 전세에 살고있었던 터라 도저히 분양가 32백만원이 넘는 돈을 감당할 길이 없어 팔기로 작정하고 부동산에 내놓았다. 혹시 마음에 정한 금액 이상의 프레미엄을 받으면 그 금액은 오빠가 개척을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그 교회에 심기로 혼자서만 작정한 채.... 그런데 정말 아파트가 팔렸을때는 상당히 헌금할 수 있는 금액이 되어, 한번도 입밖에 내보지 않았기에 오빠는 알지도 못한 상태고 내가 잔금을 받는 날인지는 더더구나 모른 상황에서 오빠에게 은행에 잠시 들려주길 부탁드렸더니 텁수룩하고 퀭한 외모로 은행에 오셨다. 그래서 준비한 봉투를 건네주시자 눈시울이 붉어지신다. 그때가 고난주간이었는데 개척을 이루게 해달라고 또 쌀도 떨어져 겸사겸사 금식하며 기도한 마지막 날이라고!!!! 나는 소름이 끼쳤다. 난 그저 마음에 작정하고 나도 가난했지만 주님의 인도하심의 결과이기에 주님께 약속한 것을 주께 올렸을 뿐인데 이 모든 일위에 주님의 인도와 섭리가 작용하고 있었다니!...... 오빠는 부랴부랴 모든걸 정리하셔서 약20평 정도의 상가를 세로 얻어 준비하셔서 88년6월10일 중계동에 개척을 하시게 되었다. 24년 전 약 천만원도 안되는 물질이었지만 그 첫집을 인하여 교회가 세워질 수 있는 기초석이 된것이다. 어찌 이런일이!!! 오빠도 감격하였지만 나도 나를 사용해 주신 주님께! 지인을 통한 끊없는 권유로 조합아파트를 시작한 것이 우연이 아닌 주님의 손길과 섭리란 것이!.... 내가 주님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감격으로 다가왔다. 그것도 오빠가 고난주간 금식하며 기도한 마지막 날에 이루어진 점에 대해 주님이 잔금날도 그렇데 맞혀주시고, 그렇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걸 예비해 놓으심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기도하였을때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뵙게 될때 너무도 감사하고 황송하여 다시금 감격의 주님을 뵙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내집을 사서 입주하기전에 먼저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도록 인도하신 주님의 섭리에 놀라운 감격과 감사가 올려지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오빠가 시무한 교회와의 인연은 이어지게 되었고, 그후 내가 25평 아파트를 분양받아 모델하우스를 가보았더니 웬걸 분양받은 아파트가 바로 오빠가 개척하신 만나교회와 바로 200미터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는 것이었다. 이럴수가!!!!!! 처음에 걱정이 되었다. 난 어려서부터 모범생이었고, 어머니의 신앙따라 올곧게 성장한 경우이고 오빠는 어려서부터 개구쟁이, 말썽꾸러기, 수많은 방황, 질병등 넘 다른 길을 걸어왔다. 적어도 신앙은 내가 스승처럼 여기고 배울 수 있는 예수님같은 목자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주님의 섭리구나!"라고 여겨져 내 고집을 세우지 않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처음 장만한 아파트에 입주 후 만나교회에 등록하여 함께 신앙을 하게 되었다. 89년에 상계역근처 대림아파트에 입주하여 그해 둘째 아이를 낳고 얼마되지 않을무렵 주님은 전도자로 나를 콜링하셨다. 사명을 받아 전도자로 서기까지의 과정은 뒤로하고 주님의 부름심에 순종하여 은행을 퇴직하고 12년 근무의 열매로 퇴직금을 꽤 받게 되었다. 이는 힘겹게 큰애가 있는 상태에서 2년간 공부하여 승진하였기에 가능한 금액이었다. -당시 분양받은 25평 아파트가 모두 2,700백만원 정도 이때 개척한 교회가 좁아져 현재보다 5배가 넓은 백여평의 장소로 넓혀 이전하려고 교회가 계약을 한 상태였다. 그 즈음에 퇴직금을 받았기에 "반은 주님께 성전이전헌금으로 드려야지!" 하고 맘먹고 있었는데 기도중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셔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500백만원 작정하였던 것을 배로 추가한 금액인 "천만원을 성전이전 헌금으로 올리라!" 는 명령이셨다. 십일조와 성전이전헌금을 올리고 나니 퇴직금이 거의 바닥이 났다. 그 바낙난 통장을 바라보노라니 속이 오히려 후련했다. 주님은 늘 전부를 원하셨다. 나의 은행 퇴직의 모든 결산을 주님이 받으시기 원하셨나 보다 싶어 올리고도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게 남은게 있나? 자원하는 마음이 있나? 점검하시고 가장 최선으로 주게 올리길 원하시는 주님을 배워가게 된다. 복음을 위해 성전을 확장해 가는 과정에 나를 써주신 주님이 감사할 뿐!!!
그렇게 몇년이 흐르는 과정에서 이전한 교회가 거의 차가자 강력하게 성전에 대한 건축의 열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전도를 하여 사람들을 모시고 오면 교회의 주변 환경에 대해 좋은 인상이 심겨지지 않았다. 더더구나 아이들을 전도해서 데려오려면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일단 부모님들의 눈초리도 곱지 않고.. 주변이 분식집에, 당구장에, 슈펴와 공장등... 이러던 차 저희 교회에 장근태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갖게 되었다. 각본을 짜기나 한것처럼 장근태 목사님께서 성전건축에 관한 메세지를 계속 주셨고, 말씀 중 "지대헌금을 미리 적금식으로 준비하라!"는 장근태목사님의설교와 목사님 교회 성도들의 간증을 듣고, 무릎을 치며 밀려오는 감동을 받게된다. 그때 30평대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전세와 매매의 차이가 5천만원이 되었다. 즉 그때 집값 시세가 1억2천이고 전세가가 7천이었다. 그래서 전세로 옮겨간다는 마음을 먹고 그 차액인 5천만을 한꺼번에 낼수가 없어 5년 적금식으로 매달 교회에 붓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계산해보니 내가 퇴직한터라 공무원인 남편월급의 딱 반이 십일조와 건축헌금등의 헌금으로 올려져야 했다. 그래서 나도 퇴직하여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남편 월급의 반으로 5년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기에 작정한 날 얘들까지 동원하여 아빠가 아직 집에오지 않으신 상태에서 머리를 모아 작전을 짰다. 아이들은 집에서 기다렸다가 아빠가 집에 오시면 무슨 행동을 해서라도 아빠를 교회로 모시고 오면 다음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결론을 내고 아이들과 내게 지혜를 주시길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꼭 일찍 들어오시길 남편께 전화를 드린 후 난 교회에서 초조하게 예배드리고 있었다. 정말 예배가 다끝나고 헌금을 작정할 무렵 남편과 애들이 교회에 도착했고 남편은 직장에서 회식이 있어 술을 한잔 하시고 오셨다. 내가 작정한 헌금의 내용을 보여드리자 눈을 감아버리고 그다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애간장이 타서 두손을 모아 부탁을 드린다. "아빠! 제발요! 제가 지금껏 살아온것보다 더 근면하고 검소하게 살께요! 애들 공부도 학원 안보내고 다 제가 시킬께요!"하고 계속 남편에게 "Please!~~~"하며 애원하자 "알아서 해!"하고 답을 뱉어 내셨다. 나는 이를 정말 천상의 응답으로 여기고! "감사해요! 감사해요! 제가 더 알들하게 살께요!"하며 연발 감사를 토하며 작정한 봉투를 주께 올리게 된다. 정말 그 이후 기쁨의 삶을 살게 된다.
한 번 본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미국에서 살때 의사부인인 교회 자매님이 나이가 같아 교제하게 되었는데 그분의 소원이 십의 구조를 내고 자신은 십의 일로 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이는 미국의사의 월급이 많으므로 가능한 일일까?하고 한참 생각하게 했던 그래서 부럽기까지 했던 믿음이었는데 그후 그분 가정이 연변 과기대 선교사로 가게 됨으로 모든것을 드리는 삶을 사는 모습을 목격한바 있다. 난 선교사로 간건 아닐지라도 우리 가정 수입중 10의 5조를 드리고도 살 수 있게 됨에 그렇게 하루하루가 기쁘고, 남편이 근무를 하고 있는건 성전지대를 위해 존재함이라! 여겨져 연약한 믿음일지라도 출퇴근하는 그분의 발자취도 귀하고 감사하게만 보였다. 물론 아이들은 피아노 가르치는 것 외에는 거의 내가 짬을 내어 가르쳤고, 가족모두 검소한 삶은 몸에 익숙해 질수 밖에 없었다.
정말 그렇게 삼년반을 살아갈 쯔음에서 정말 우리교회에 성전을 지을수있는 기적이 일어났다. 전세든 만나교회 바로 뒤에 허물어진 집 몇채가 있었는데 이를 몽땅 경매에 부쳐져 있는 것을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어떤 분이 낙찰을 받아 그 현장을 둘러보다 상가에 있는 우리교회를 보고 자꾸 마음이 쓰여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보시고 감동이 되어 우리 목사님께 이 땅을 살 의향이 있냐고 전화를 하셨다. 물론 가격은 낙찰받은 그대로! 대출받을 수 있는 길까지 다 인도해주시겠다고! 이럴수가!....... 우리는 바로 옆에 있어도 등잔밑이 어둡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렇게 하여 공동회의를 거쳐 100% 찬성으로 성전대지로 인수하게 되었고 예쁘게 성전까지 건축하게 되었다. 그 중매장이 역활을 하신 분은 타교회 안수집사님으로 이 일을 다 마무리 짓지도 못하시고 갑자기 위암이 발견되어 50대에 소천하셨다. 그분의 마지막은 한 교회를 세우는 주님의 일에 쓰임 받으시고 천국으로 가신것이다!.
나뿐 아니라 여러 성도들이 뜻을 모아 성전지대헌금을 작정하였고 주님은 이렇게 준비하고 애를 쓰는 그 눈물과 땀의 헌신 위에 응답을 주시는 놀라운 주님을 또 만나뵈옵게 되었다. 이렇게 건축하고 있을 동안에 살던 집이 팔려 아직 남은 작정기간의 헌금을 모두 올리고도 자꾸 부족한 마음이 든다. "그래 이왕 집을 판김에 전부는 드리지 못할 망정 반이라도 드려야지!"라는 감동이 솟구쳐와 이미 5천을 드리고, 1억3천에 매매를 하였기에 반을 채우려 천오백만을 추가하여 헌금을 올리게 된다. 모든 성도들이 힘을 합하고 눈물과 땀과 기도로 그렇게 기적같이 은혜롭게 교회성전건축은 지상 3층으로 완공되었다. 성전건축을 준비할 즈음에 주님은 내게 환상을 보여주셨다. 하늘이 열리고, 또 그 위에 하늘이 또 있는데 거기로부터 빛이 쏟아지고 그 하늘로부터 음성과 함께 글씨가 하늘에 씌여지기 시작한다. 5가지 말씀을 하시는데 4번까지는 알아듣기도 하고, 할 수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다섯번째 주신 말씀은 무슨 말씀인지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다. 그래서 당황하여 주께 물어보니 다시 설명을 하여 주셨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그러면서 교회가 지상만 혹은 지하를 파야할지 고심중이었을 당시인데 지상으로만 건축된 교회2층에 내가 서있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주님의 위로와 주님이 내게 기대하는 바가 있음을 깨닫고 "더 정성을 다하리라"! 마음먹고, 밤중에도 나와 기도의 무릎을 꿇게 된다. 그러면서 은혜롭게 성전건축은 진행되어 아름답게 지상 3층으로 교회는 완공되었다. 1층은 어린영혼들을 살릴 어린이집이고, 2층은 본당, 3층은 사무실과 사택등으로... 그렇게 성전건축이 아름답게 끝난 다음에도 내 마음엔 자꾸 부담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교회에 은행 부채가 있음이 왜 내게 그렇게 부담이 되는지.... 내가 빚이 있으면 그게 나는 싫어서 빨리 갚으려고 안달일 것이고, 나는 그걸 갚을 능력도 있다. 그러나 교회 빚은 어쩌란 말인가!..... 계속 밀려오는 부담때문에 간절히 기도하던중 일천번제를 올려야 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매예배때 마다 "교회부채청산을 위한일천번의 예물"! 이런 예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이 이러니 어쩔 도리가 없다. 이게 주님이 넣어주신 마음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부담스러울수가...... 그렇게 일천번의 예물(매번 오천원씩)과 함께 기도를 올리는 사이 교회는 평온하고 안정되어 은혜롭게 새로운 영혼들이 전도되어 갔다. 그리고 난 후 교회부채에 대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는데 하루는 또 장근태 목사님께서 헌신예배 설교자로 오셔서 강단에 서계셨다. 그때 갑자기 예배도중 교회에 빚이 아직도 남아있음이 기억나고 내가 이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음에 눈물 콧물이 나게 회개를 하며 기도를 하던 중 앞자리에 바로 회계집사님이신 박종락집사님이 계셔 "교회의 부채가 얼마 남아있어요?" 라고 묻자 그때 교회부채가 2억 5천정도 남아있다고 알려주셨다. 아직도 부채가 다 청산되지 못하고 남아있음은 내가 기도를 멈춘 탓이라 여겨져 "교회 부채의 십분의 일을 우리 가정에서 담당하리라!" 마음 먹고 결단하게 된다. 그러나 당장 목돈이 없기에 매달 100백만원씩 또 2년으로 나누어 내려고 작정하여 헌금을 하다보니 또 월급의 10의 5조를 2년 동안 헌금으로 올리게 되었다. 목돈을 헌금할 때도 은혜스럽지만 매달 월급을 타서 그중 반을 떼어 주님께 올리는 그 생활은 특별한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 된다. 아무리 부족해도 부족하지 않고! 아무리 절약해도 풍요로운! 그 비밀을 깨닫게 하시고 자족의 특별한 은총을 깨닫게 하신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교회의 은행 부채는 께끗하게 청산되었고 부채없는 교회로 세워져갈 뿐 아니라 지역사회를 위해 복음의 손길을 내미는 만나 요양센터가 생겨나고, 교회 공부방이 생겨나는 등 이웃을 향한 사랑의 손길이 확장되어 가는 중이다. 이런 과정들은 주님이 우리 가정에 베풀어 주시고 허락하신 특별한 은총이셨다!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우리 집이 세워지기전 한 교회가 개척할 수 있도록 기초석이 되는 은혜를 주셨고, 교회가 성장하여 이전할 때는 퇴직금이 모두 올려질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교회가 건축할 때는 우리집을 팔아 반을 올릴 수 있는 기회와 은혜를 주셨고, 교회 부채를 청산하려고 일천번제와 2년의 십의 오조 생활을 할 수있는 은혜를 또 주셨다. 교회를 채우기 위해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셔서 직장을 버리고 사람낚는 어부로! 살도록 초청해 주셨고 이제는 세계에 나가 말씀을 전하여 생명을 살리고 세우는 자로 인도해 가신다. 쁜 아니라 이젠 남편과 함께 자녀들까지 선교사로 살도록 부름을 받고 함께 주님의 길을 예비한 자로 서게 하신다. 교회가 생성되고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구비구비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는 영광을 주심은 특별한 주님의 사랑이요 손길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린 검소한 생활을 더 배워야만 했고 자녀들 과외는 맘놓고 시켜볼 처지가 아니었음에도 주님은 더 크고 놀랍게 역사하셔서 집도 좋은 집을 주시고 남편과 함께 온 가족이 미국에서 국비로 유학 할 수 있는 기회도 주시고, 학비뿐 아니라 한국에서는 공무원 월급을 그대로 다 받게 하시고, 미국 생활비도 나와 원없이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행복한 시간들을 갖게 하셨다. 자녀들은 둘다 미국 로타리 클럽의 초청으로 학비, 하숙비, 게다가 용돈 100불까지 매달 받으며 교환학생으로 공부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고 거기에 멈추지 않고 큰아이는 미국에서 또 멕시코 로타리 클럽의 초청으로 멕시코로 가서 스페니쉬를 공부하며 남미를 배울 기회도 부여 받게 되었다. 뿐 아니라 그 기적의 행진은 계속 되어지고 있다. 주님의 기적과 이끄심의 손길은 내가 상상도 못하고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어떻게 이렇게 주님은 기적이 상식이 되게 하시는지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헐떡여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고백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기이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