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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편이라는 대단원의 막을 열면서 “복(福)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傲慢)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律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晝夜)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라고 외쳤습니다. 진실로 복 있는 사람은 살면서 터득한 세상 원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거나 기뻐하는 길을 가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조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묵상(黙想)합니다. 여기서 “묵상”(하가 : dawgaw')은 “신중하게 생각하다, 상상하다, 숙고하다, 중얼거리다” 등의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조용히 암송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묵상에 해당하는 라틴어(meditatio)에는 “마음과 정신을 하나님께 몰두하여 하나님의 현존(現存) 속에서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일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잠긴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깊이 대면하고, 그것을 통해 깨닫게 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열망과 결심과 의지를 갖는 것이 묵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장 구석에 자리를 잡은 노인은 매일 스무 줄 정도의 양파만 팔았습니다. 어느 날, 그 앞을 지나가던 한 여행객이 다가와 한 줄에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20센트(약300원)라는 대답을 들은 그는, 남루한 차림의 노인을 측은히 여겼는지 한꺼번에 다 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뜻밖에도 단호히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가 이유를 묻자 금새 진지해진 노인은 “나는 지금 내 인생을 살기 위해 나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합니다. 북적대는 사람들과 내려 쪼이는 햇빛과 흔들리는 나무들과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이 장터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내 삶이지요. 나는 바로 이것을 즐기기 위해 하루 종일 이곳에 앉아 양파 스무 줄을 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꺼번에 다 팔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돈은 쉽게 벌겠지만 그걸로 내 하루는 끝나고 마는 거예요. 사랑하는 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노인은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고, 깊이 음미(묵상)하면서 누구보다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깊이 묵상하십니까? 얼마나 하나님과 대면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깊이 음미하십니까? 짐다우닝(Jim Downing)은 자신의 책 “묵상”을 통해 “우리가 묵상....을 통해 우리 영혼에 영적 영양을 공급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 반응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우리의 민감성을 향상시키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싸인을 주실 때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외모보다 마음을 가꾸는 것이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마음 가득히 하나님을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묵상하는 영혼은 아름답습니다. 묵상하는 삶은 깊고, 넓고, 높고, 풍요롭고, 차원이 다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소중히 여기고, 그 삶 속에 녹아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음미할 수 있습니다. 쫓기는 듯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가까이 하고 깊이 묵상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7, 103절입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97),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103)
본 절은 감탄문입니다. 너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던 시인은, 그 마음을 도무지 표현할 수 없어 이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진실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을 존중합니다. 사랑합니다. 절대적으로 순종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불순종을 책망할 때에도 사랑합니다. 거룩한 말씀과 같이 거룩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완전한 말씀과 같이 완전해지기를 갈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성취되고, 구현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한없는 애착을 느낍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깊이 묵상합니다.
사실 사랑하면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온종일 함께 있고 싶어 안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종일 대화해도 길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더욱 거룩하게 합니다. 더욱 경건하고, 더욱 행복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삶이야말로 참으로 복되고 아름다운 삶인 것입니다. 더욱이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 달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 하나 하나를 각기 사랑했습니다. 전체로서의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거기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달콤함을 맛보았습니다. “어찌 그리 단지요”라는 감탄조로 외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달콤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있어서 가까이할수록 마음의 평강과 즐거움이 더 풍성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억지로 지켜야 하는 의무 조항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또 묵상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계속해서 사랑하고 묵상할 수밖에 없는 대상입니까? 또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 시인은 원수보다 지혜로워졌습니다. 98-102, 104절입니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98-102),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104)
시인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했습니다. 순종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소중하고 지속적인 동반자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b),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라고 말씀합니다. 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미6:9a)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된 지혜요 명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여 연구하고 순종하고 지속적으로 함께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지혜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원수들의 모든 모략과 술수를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스승과 노인들보다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사람들의 모든 가르침들보다 더 많은 지혜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세상 사람들이 전혀 가르쳐 줄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지혜와 하나님께서 인자(仁愛)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대적들이 공격해 올 때, 곁에 놓인 하나님 말씀을 통해 충분히 반박할 태세를 취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 그 어떤 책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바로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폈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았습니다. 자신의 발을 금했습니다. 평탄하고 근사한 곁길들에서는 단호히 발을 돌이켰습니다. 비록 험할지라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바른 길로 줄곧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준수”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죄와 싸웠습니다. 단 한가지의 죄도 자신을 이기지 못하도록 싸우고 또 싸웠습니다. 사실 모든 죄는 거짓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범하는 이유는 거짓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와 손을 잡는 것입니다. 1인치도 정도(正道)를 이탈하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자는 자신이 가야할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술잔을 건드리지도 않는 자는 결코 술에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허탄한 말을 입에 담지 않는 자는 결코 신성모독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가까이 하십니까? 죄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쓰십니까? 전쟁터에 나간 병사들이 자신을 보호해주는 방패를 내팽개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역시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말아야합니다. 항상 가까이하고 묵상하고 순종해야합니다. 말씀을 통해 죄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가까이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낙타는 사막의 모래 바람을 견딜 수 있는 긴 눈썹과 두꺼운 눈두덩을 가지고 있습니다. 코의 예민한 근육을 통해 모래가 들어오는 것을 막아 허파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두꺼운 가죽과 털로 낮의 태양과 밤의 추위를 견딜 수 있습니다. 넓은 발굽으로 뜨거운 모래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평균 45kg의 지방이 저장된 육봉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받습니다. 소변의 요소 농도를 높여 수분의 배출을 최대한 줄일 수 있습니다. 체온을 사막의 일교차에 맞춰 낮에는 41도, 밤에는 34도로 조절할 수 있습니다. 물을 되새김질합니다.
물이 부족할 때는 주위의 조직으로부터 수분을 공급받을 수도 있습니다. 체중의 25%에 해당하는 수분을 혈액에 빼앗기고도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루종일 되새김질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낙타가 뜨거운 사막에서 견딜 수 있는 비결입니다. 자매로 보이는 유대인 두 명이 버스에 올랐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버스 안 누구도 의식하지 않은 채 말씀에만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고, 읽고, 묵상했습니다. 성경을 같지 못했던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다녔습니다.
마음에 담은 말씀을 틈틈이 꺼내 되새김질하듯 묵상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5)고 증거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백성들의 인기와 잘못된 의도를 발견하실 때마다 곧바로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그곳에서 깊이 묵상하셨습니다.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셨습니다.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정리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십니까? 얼마나 집중해서 읽습니까? 읽은 말씀을 얼마나 자주 묵상하십니까? 우리는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연합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복되고 능력 있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묵상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하나됨을 체험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참된 복까지도 누리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