逍遙遊 1-4 오래 사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큰 앎으로 한바탕 신나게 놀자.
小知不及大知 小年不及大年
奚以知其然也
朝菌不知晦朔 蟪蛄不知春秋 此小年也
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
上古有大椿者 以八千歲爲春
八千歲爲秋 此大年也
而彭祖乃今以久特聞 衆人匹之
不亦悲乎
飜譯
작은 앎은 큰 앎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수명은 긴 수명에 미치지 못한다. 어찌하여
그런 줄 알겠는가?
하루를 사는 버섯은 그믐과
초하루가 있는 한 달을 알지 못하고, 한 여름을 사는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짧은
수명의 경우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冥靈)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오백 년을 봄으로 삼고, 오백 년을 가을로 감는다.
아주 옛날에 대춘(大椿)이라는 참죽 나무가 있었는데 팔천 년을 봄으로 삼고, 또한 팔천 년을 가을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긴 수명의 경우이다.
그리고 팽조(彭祖)는 지금 오래 산 것으로 별나게 소문이 났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와 같이 오래 살기를 바라니 이 또한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紬繹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가 초승달과
보름달 그리고 그믐달이 있는 한 달의 변화를 어찌 알겠는가? 한 여름을 사는 쓰르라미가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 있는 일년의 변화를 어찌 알겠는가? 명령(冥靈)이라는 나무는 오백 년을 살았고, 대춘(大椿)이라는 참죽
나무는 팔천 년을 살았으며, 중국 전설에 나오는 오래 살았던 것으로 유명한 팽조(彭祖)는 팔백 년을 살았다. 莊子는
앎과 수명의 상관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수명이 길면 당연히 아는 것도 많아지리라.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그와 같이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도, 한 여름을 사는 쓰르라미도, 오백 년을 사는 명령(冥靈)이라는 나무도, 팔천
년을 사는 대춘(大椿)이라는 참죽 나무도 그리고 팔백 년을
사는 팽조(彭祖) 또한 그 삶이 전부이다.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의 삶도 그 삶이 하루살이에게는 전부이고, 팔천
년을 사는 대춘(大椿)이라는 참죽 나무의 삶도 그 삶이 대춘(大椿)이라는 참죽 나무에게는 전부이다. 전부라는 차원에서는 그 삶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다라는
말은 그것에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오래 사는 것과 많이 아는 것은 분명히 상관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인 상관관계는 아니다.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도
팔천 년을 사는 대춘(大椿)이라는 참죽 나무가 아는 것을
알 수 있고, 팔백 년을 사는 팽조(彭祖)가 아는 것을 알 수 있다. 莊子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에 깊이를 더해 자유로운 영혼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런 노력은 하지 않고 오래 살기만을 바라고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本質과 核心은 버려둔 채 虛像만을 쫓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답이 있다면
그 답은 항상 지금 이 순간에 있다. 과거와 미래는 지금 이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虛像이기 때문에
그 虛像에 답이 있을 수가 없다. 과거에 연연한다는 것은 지금의 고통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일 뿐이고, 미래에 희망을 갖는다는 것 또한 지금의 고통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일 뿐이다.
莊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서라
말아라! 다가올 세상은 기다릴 수 없고, 지나간 세상은 쫓을
수 없다네(已乎已乎 來世不可待 往世不可追也).’ 우리가 삶을
힘들고 어렵게 사는 이유는 지금을 살지 못하고, 지금 이 순간에 과거에 얽매여 있고, 지금 이 순간에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과 과거, 지금과 미래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이 만들어지게 되고, 그 괴리감이
바로 인간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괴리감이 심하면 각종 정신질환의 원인이 되는
것이며, 그 괴리감이 극에 달하면 자살 또는 살인까지도 이어지게 된다.
예수도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지금만을
살면 그것이 天國의 삶인데,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지금을 살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에 얽매어 있는 살고
있으니 그것이 地獄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너희가 살려고 한다면 너희는 영원히 죽을 것이고, 너희가 죽으면 너희는 다시 태어나 영생을 얻으리라.’ 관념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만들어진다. 그 관념은 또한 미래를 살기 위한 기준이 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면 그 어떤 관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관념을 自我(ego)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自我(ego)를 더욱 쌓으려고 한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예수는 自我(ego)를 버리면 그 즉시 天國의 삶을 살게 되고, 自我(ego)로서 살려고 한다면 그것인 고통뿐인 地獄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莊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씩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莊子의 이 이야기들이 담긴 장(章)의 제목은 소요유(逍遙遊)이다.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철벽과도 같은 생각의 한계에 갇혀있지 말고, 그
생각을 모두 깨부수면 얻어지는 자유롭고 드넓은 세상에서 한바탕 신나게 놀자는 것이 바로 소요유(逍遙遊)이다. 우리가 생각을 깨부수지 못하는 이유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모두 깨부수면 얻어지는 자유롭고 드넓은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에 관념이 마치 철벽같이
버티고 서있다. 관념은 自我(ego)이다. 관념의 우리의 마음이다. 그 自我(ego)를
모두 버리면 우리는 인간의 다섯 번째 신체인 靈體(spiritual body)에 도달하게 된다. 그때 우리의 ‘I’(自我,
ego)는 떨어져 나가고 여여(如如)한 ‘am’(存在)만이 남는다. 그때
우리에게는 지극한 사랑과 평화만이 남게 된다. 혼자 있을 때에는 더할 나위 없이 고요한 평온을 유지하고,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에는 지극한 어울림(和)만이 있고, 무엇을 하고 있을 때에는 그것과 한바탕 신나게 논다. 莊子의 소요유(逍遙遊)는
이렇듯 한바탕 신나게 노는 것이다.
큰 앎(大知)! 自我(관념, ego)가
없을 때 얻어지는 자유로운 영혼! 그런 삶에서는 나는 鵬이라는 새가 되어 온 세상을 마음껏 노닐 수가
있다. 그것을 예수는 天國의 삶이라고 했고, 붓다는 그것을
涅槃의 삶이라고 했다. 그것은 완전한 自由이다. 그것은 완벽한
삶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莊子는 우리를 그런 삶으로 인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