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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중국공안에게 볼모 잡힌 `광개토태왕비`
문배샘 추천 0 조회 12 10.08.26 15: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중국공안에게 볼모 잡힌 '광개토태왕비'

 

 

우리나라 명칭:광개토대왕비라 불리고 있지만 중국측:호태왕비(중국사람들은 '영토를 넓혔다는 뜻'의 광개토라는 말을 절대로 쓰지않은 이유는 고구려가 자기 변방의 역사이기에 광개토대왕이란 말은 그들을 침략했다는 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이란 용어도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광상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란 용어를 사용한다.-영토를 넓힌 임금(광개토경)이라는 말과 백성을 평안하게 한 임금(평안호)이라는 말을 합친 것 

광개토태왕은 재위기간에는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 불렸다. 북중국의 강자 북위(조조가세운나라)에 대한 정벌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39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한다.

<비석의 대석>-무게 37톤을 받치고 고정시키는 대석은 가로 3.35미터,세로2.7미 직사각형 모양이지만 3개면이 깨어져 그 형체만 겨우 유지하고 있음.

한국관광객들이 지폐를 놓고 절하고 위대한 태왕에게 겸허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옆면 수지 밖에서 촬영하였다. 안쪽에서 촬영이 금지되어있음 

 

 중국식 비각이 눈에 거슬린다. 이런 것까지 동북공정의 의한 역사왜곡이다.

 광개토태왕비가 발견당시 허허벌판에 홀로 방초에 서 있었다. 나라을 잃었던 시절, 단재 신채호 선생은 홀로 만주지방에 고구려 유적을 찾아서 다녔다.

이 광개토태왕비를 만나서 비 둘레를 팔둘레로 재고, 위대한 광개토대왕의 위업에 감개무량,벅찬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통곡했다는 글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 동북아를 호령하던 고구려인의 기상,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는 언젠가는 또 다시 세계를 향해 나아갈 것을 단재선생은 예측하였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1928년에 집안현 지사 유천성(劉天成)이 2층형의 소옇 보호비각을 세웠고, 다시 1982년 중공 당국이 단층형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비각의 지붕형태는 한족의 형식이었다.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비각, 건물, 성곽까지 중국식풍으로 바꾸고 왜곡을 서슴치않고 있는 중국당국은 하루 빨리 역사를 바르게 되돌려 놓길 부탁한다.  비각 주위에 공안들을 배치하여 놓고 대한민국 관광객들이 비각안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었다.

 

땅을 지배하였다하여 조상까지 바꿔치기 하는 한족의 얄팍한 자기기만의 역사의식 앞에 분노마져 느끼게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다시 대한 민국의 영역으로 돌아오길 기원하며, 강대민족으로 힘을 길려 다시 찾는 "다물"의 역사가 이뤄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뜸하던 비가 슬픔의 눈물인양, 대한민국의 관광객 대신 울고 있었다.  촉촉히 내려서 광개토왕릉이 있는 곳까지 계속 내리며 우리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광개태왕비는

장수왕이 자기 선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거대석 비이다(414년). 방추형 자연석으로

비석의 높이 6.39m로 배면 너비는 1.46m, 1.35m 2m 1.48m 로 각 면이 다른 크기와 문양, 무게는 약37톤으로 추정되는 세계적 규모이다.

비에는 모두 1,775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중 1.592자를 판독가능하다.

 

비의 내용은

 시조 주몽의 건국과 광개토태왕의 즉위에서 사망에 관련된 사항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복사업과 업적

광개토대왕릉을 지키는 묘지기의 배정과 준칙사항에 관련 기록이다.

 

1600연 전 고구려인들이 직접 기록한 것이라 가치가 크고, 옥개석이 없는 고구려 석비이다. 석재는 응회암으로 화산지역인 백두산 천지 인근에서 옮겨왔을 가능을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됨.

 

플라스틱 수지(유리판처럼생긴) 보호막이 바람은 막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부온도를 상승시켜 악영향을 야기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어우려된다.

플라스틱 수지판은 동북공정에 따른 대한민국인의 차단을 의미하는지 보이지 않는 음모가 들어있다. 직접 촬영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안내판에는 '영락'이란 고구려 연호가 아닌 중국 한족 왕조 연호인 '진 의희'를 사용하여 중국 왕조의 우위를 내세우고 있었다.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태왕비에서 태왕릉 사이에 무질서하게 자리잡고 있던 400여호의 인가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대형 제단 유적이 발견됨(1.5m간격으로 2곳)

 

 

 

 

광개토대왕 비문이 던지는 한반도 역사의 해석의 毒

 

 

호태왕의 비문 속에 일본인들이 훼손,왜곡하였다는 각자 중에서 한국측을 곤욕스럽게하는 대목과 각자가 보여 광개토대왕비가 대한민국의 고대사를 곤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왜(倭)가 신라성에 쳐들어와서 신라 매금이 호태왕에게 구원요청하여 손수 5만대군을 이끌고 '백잔'과 왜군을 무찌르는 대목이 나온다.' 일본은 이 대목을 빌려 '왜' 가 신라를 정벌한 일본서기상의 신공여왕 '다쿠신라'를 정벌한 내용이라고 우기고 있다. 한국측은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리고 신라,백잔(백제),임나가라를 정벌하였다는 비문을 통해 마치 고구려 광개토왕이 한반도 신라,백제를 비롯하여 가야를 정벌한 것 처럼 

김해 대성동박물관에는 가야가 광개토왕에게 정벌당한 것 처럼 정리되어 있다. 이 비문 기록을 인정한 셈이다. 그런 논리라면 '왜'가 신라를 정벌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순점에 빠지고만다. 하지만 비문 외의 삼국사기, 일본서기, 삼국유사에는 고구려가 한반도를 정벌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이 비문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 환단고기에는  비문 기록과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의 내용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손수 5만군대를 선박에 의존하여 임나가야(대마도)와 일본구주의 소국들(백잔,모한,신라(시라기),막한,안라)을 정벌하고 그 곳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들을 퇴치시킨다는 기록이 있다. 대마도에는 계지가라(백제계통),좌호가라(신라계통), 인위가라(고구려계통)이 나눠어서 분치한 것을 광개토대왕때 이른 모두 접수하고 규슈의 소국들을 복속시키 임나10국을 두고 호령하였다. 3국은 바다에 속한 지역에 7국은 내륙에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참조하면 비문의 기록은 결코 한반도의 가야,신라, 백제가 아니고 대마도를 비롯한 규슈의 열도 소국정벌임을 알게 한다(임나신론/고려원/95년 김인배.김문배)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기록들과 맥락을 같이하는 대목들이다.  이 부문의 정확한 정립이 되지 않을 경우, 한반도의 역사에 관해서 비문은 毒으로 작용할 것이다

 

 <사진:광개토태왕비 탁본 앞 2006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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