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州 지명 추적중 ...
1.宋史
卷四百八十七 列傳第二百四十六 外國三
二月,遣秘書丞直史館陳靖、秘書丞劉式爲使,加治檢校太師,仍降詔存問軍吏耆老。
靖等自東牟趣八角海口,得思柔所乘海船及高麗水工,即登舟自芝岡島順風泛大海,再宿抵甕津口登陸,行百六十里抵高麗之境曰海州,又百里至閻州,又四十里至白州,又四十里至其國。治迎使於郊,盡藩臣禮,延留靖等七十餘日而還,遺以襲衣、金帶、金銀器數百兩、布三萬餘端,附表稱謝。
2월,비서승지사관 진청을 파견하고 비서승 유식을 사신으로 보냈다.왕치를 겸교태사로 하고 군리가 오래되어 그대로 존치시킬지에대해 물어보다.유청등은 동모에서 팔각해구로 향하여 고려항해사가 운행하는 배에 승선하였다.즉 지강도에서 배를 타고 나아가니 대해에 이르렀다.옹진구에 상륙하여 다시 묵었다. 160리를 가니 고려의 국경인 해주에 다다랐다.또 다시 100리를 가니 염주였다.또 40리를 가니 백주였고 또 40리를 가니 왕치가 교외에 나와 사신을 영접하고 신하의 예를 다하였다.진청등은 70여일이 지난후에 돌아왔다.고려에서 습의,금은기 수백냥,3만여단의 베를 보내니 감사하다는 표를 보냈다.
2.원문을 해석한 중국사서,
陈靖出使高丽
淳化二年(991),高丽国王王治遣使韩彦恭朝贡宋朝,并求佛经。太宗诏赐《藏经》及御制《秘藏诠》、《逍遥咏》、《莲华心轮》。四年 (993),王治遣使白思莱答谢圣恩。太宗加王治检校太师,特遣秘书丞直史馆陈靖、秘书丞刘式出使高丽。陈靖等乘船自芝冈岛顺风越海,抵瓷津口登陆,途经海州、阎州、白州至高丽都城。王治亲迎于郊,尽藩臣礼。陈靖等留高丽七十余日,携带金银宝器而还。
991년 고려국왕 성종 왕치가 한언공을 사신으로 송나라에 불경을 구하기위해 보냈다.태종이 장경및 어제 비장전을 주었다.993년 성종이 백사채를 사신으로 보내 고마음을 표시하였다.이에 태종이 성종에게 검교태사로하고 특별히 비서승지사관 진청과 비서승 유문식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냈다.지강도에서 배를 타고 배다를 건너갔다.옹진구에 상륙하였다.고려의 해주에 다다랐다.염주였다.또 백주를 지나 그나라에 이르렀다.왕치(성종)가 그나라의 교외에 나와 주변국 신하의 예를 다하였다.진청등은 70여일이 지난후에 돌아왔다.
3.중국사이트의 중국인다운 해석
宋與高麗交通之海路主要有二,初發自登州,後改由明州前往。據《宋史.高麗傳》載,「(淳化四年,993年)二月,遣祕書丞直史館陳靖、祕書丞劉式為使,加(高麗王 王)治檢校太師,仍降詔存問軍吏耆老。靖等自東牟(登州冶所,今山東蓬萊)趣八角海口(在蓬萊東南,位今古現北),得(高麗使白)思柔所乘海船及高麗水工,即登舟自芝岡島(今山東 芝罘島)順風泛大海,再宿抵甕津(Ongjin)口登陸,行百六十里抵高麗之境曰海州(Haeju),又百里至閻州(或今朝鮮延安Yonan一帶),又四十里至白州(或今朝鮮白川Paikchon一帶),又四十里至其國」
지강도는 현 산동성의 지부도,옹진은 황해도 옹진,해주는 황해도 해주,염주는 연백군 연안일대?,백주는 황해도 백천일대라 해석한다.
지강도가 지부도라는것은 나에게 고맙다 스스로 고려의 강역이 산동이라는것을 인정하는것이니...그러나 왜 예성강에서 곧바로 개경으로 안가고 수백리를 우회하나? 매우 비논리적인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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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윗 구글사진 처럼 여정이 매우 불합리하다 즉 개성의 목적지를 놔두고 옹진에서 해주로 이후 연안으로 백천으로 강을 건너 개성으로 들어가는 여정인데 어찌하여 정사에도 나와있는 개경으로 가는 길인 예성강에서 개경으로 들어가지 않는가? 해주는 고려의 경계라했는데 옹진은 고려의 경계가 아니라면 한반도 고려도 송나라하고 분할되었다는 말인가? .
5.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옹진은 儒州 소속의 현이고 해주와 다른 행정지명이다.
○儒州 瓮津縣(유주 옹진현)
本高勾麗瓮遷高麗初改今名顯宗九年置縣令.有麒麟島昌麟島魚化島孤島謀島屬縣二.
본시 고구려 옹천으로 고려초에 개명되었고 현종9년에 현을두었다. 기린도,창린도,어화도,고도,모도가있다.
○安西大都護府 海州(안서대도호부 해주) -현재 하북 풍윤현 인근으로 밝힘(★)
本高勾麗內米忽[一云池城一云長池.]新羅景德王改爲瀑池郡. 太祖以郡南臨大海賜名海州成宗二年初置十二牧州其一也十四年置十二州節度使稱右神策軍與楊州爲左右輔. 顯宗三年廢節度使九年定置四都護府改爲海州安西都護府睿宗十七年又陞爲大都護府. 高宗三十四年爲海州牧恭愍王二十二年倭寇入侵殺牧使嚴益謙. 於是誅州吏之不救者降州爲郡後復陞爲牧別號大寧西海[成廟所定.]又號孤竹. 有首陽山 大首*??島[一作睡鴨下同.]小首*??島 延平島[平一作坪.]龍媒島. 屬縣三領防禦郡一縣令官一鎭一.
본 고구려 내미홀,신라경덕왕때 폭지군으로 개칭되고 태조가 군의 남쪽이 대해에 임하여 해주라 이름을 내렸다.(중략) 현종3년 절도사를 폐하고 9년에 4도호부를 고쳐 해주안서도호부로하였다. (중략) 고죽이라 이름하며 수양산이있다.
이지명은 현재 하북 노룡좌측의 풍윤현임을 운영자가 밝혀내었습니다.
○塩州 (송사에 기록된閻州로 추정된다 해주에 포함되는 주이다.)
本高勾麗冬音忽[音一作彡一云豉塩城.]新羅景德王改爲海臯郡. 高麗初更今名成宗十四年置防禦使顯宗初廢防禦使來屬後置監務. 高宗四年以禦丹兵有功陞爲永膺縣令官四十六年以縣人將軍車松祐有衛社之功陞知復州事元宗十年又以衛社功臣李汾禧之鄕改爲碩州. 忠烈王三十四年又陞爲溫州牧忠宣王二年汰諸牧降爲延安府別號五原[成廟所定.]有大堤號曰南大池州東有氈城古祭天壇.
염주는 고려에서 소금염 송에서는 이윤날염으로 쓰였는데 뜻은 같다고 본다.
염주는 하북성 천진남부 염산으로 비정된다.
○白州(고려와 조선초에 배주라 불리웠다)
本高勾麗刀臘縣[一云雉嶽城.]新羅景德王改名雊澤爲海臯郡領縣. 高麗初更今名顯宗九年屬平州毅宗十三年創免山重興闕陞知開興府事後復舊名來屬高宗四十六年以衛社功臣李仁植內鄕陞爲忠翊縣令官元宗十年又以衛社功臣趙璈內鄕陞知復興郡事恭愍王十八年避侍中慶復興之名還稱白州別號銀川[成廟所定.]有溫泉.
○東牟- 즉 현 등주가 아닌 동아현 제남인근
移登州平海軍於海口安置
구당서>등주 평해군을 이동해서 해구에 안치했다.
登州
漢東萊郡之海口。如意元年,分置登州,領文登、牟平、黃三縣,以牟平為治所。神龍三年,改黃縣為蓬萊縣,移州治于蓬萊。天寶元年,以登州為東牟郡
구당서>등주는 한나라 동래군의 황현이다.여의 원년에 등주를 분할해 문등과 모평 황의 3개현을 두었다.신용3년에 황현을 봉래현으로 개명했다. 주치소를 봉래로 옮겼다. 천보원년에 등주를 동모군으로 했다.
송사지리지
登州,上,東牟郡,防禦。崇寧戶八萬一千二百七十三,口一十七萬三千四百八十四。貢金、牛黃、石器。縣四:蓬萊,望。
八角海口,芝岡島,甕津口,海州,閻州,白州 가 고려개경을 찾는 열쇠이다.
운영자 심제 글.
첫댓글 大海에 주목하면 산동반도에서 한반도 사이의 지금의 서해 또는 황해로 밖에 달리 해석 할 수 있을까요? 황하나 양자강을 대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저 시대에 대규모 사막을 대해라고도 하지 않았다면 한반도 개경 가는 길을 묘사한것으로 밖에 달리 해석이 안되는 군요. 그리고 육지에 올라 1백6십리 고려의 땅 해주라고 하는것에서도 거리상 한반도 개경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옹진은 이미 한반도이고 들어왔으면 고려 경내인데 60리를 가면 고려의 경계인 해주가 나올까요? 해주는 고려경내 아닌가요? 그렇다면 옹진은 고려 경내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