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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그 위대한 고구려의 영웅, 광개토태왕릉 파괴된 채 방치상태로 개방
문배샘 추천 0 조회 4 10.09.01 13: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그 위대한 고구려의 영웅, 광개토태왕릉 파괴된 채 방치상태로 개방

 

 

 

 

 고구려 고분의 형태

 

고구려 고분은 외형적으로는 돌무덤(계단식 적석총)과 흙무덤(봉토분)으로 둘로 구분된다.

초,중기까지는 돌무덤이 주로 만들어지고 후기는 적의 흙무덤이 만들어졌다. 이 곳 광개토태왕릉과 그의 아들 장수왕릉은 돌무덤의 형태로 남아있다. 돌무덤 중에는 내부에 돌방(널방)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지만 흙무덤은 대부분 돌방을 가지고 있다.

 

장수왕의 돌무덤은 비교적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외관이 적석총으로 잘 정비되어있었다. 그에 비해 명성에 걸맞지않을 정도로 적석이 파괴되어 있는 광개토태왕릉을 바라보는 심정은 착잡하였고 실망스러웠다. 과연 한족인은 고구려인과 다른 관념으로 태왕릉을 취급하고 있지않나 의구심이 일었다.

 

능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무덤 주인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무덤에서 '원태왕릉안여신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태왕릉이 산처럼 안전하고 큰 바위처럼 단단하기를 기원한다)라는 돋을 새김 글자가 새져긴 벽돌(전)이 '태왕'이라는 글귀가 쓰인 청동방울이 나와 광개토왕릉임을 확인시켜주었다.

 

2003년에 발굴된 무덤 동쪽의 제단으로 인해 더욱 확실해졌다. 제단의 길이가 60미터나 되었다고 한다. 널방이 있는 쪽이 무덤의 앞이 아니라 제단쪽이 무덤의 앞이다.  형식은 대형 돌을 직사각형을 다듬어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구조, 본래 7층이며 7층에 널방이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어떤이는 8층이라는 설도 있음. 장군총의 경우, 7층이며 널방이 5층에 있다.  계단 안은 작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다. 태왕와 비를 합장한 것으로 보임. 거대한 보호석이 본래 각 면에 5개씩 모두 20개였는데 지금은 13개만 흩어져 있다. 보호석은 높이가 3~5미터에 이르고 무게만 10톤이 넘음.

 

 

보호석은 무덤의 붕괴를 막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최근 학자들의 설에 의하면 '거석숭배문화'에 기인하고 있다함.

시신을 모시는 곳이 널방은 무덤 상단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데 널방 입구는 서쪽을 향하고 있고 서쪽은 무덤의 뒤쪽에 해당된다.

널방의 크기는 너비 2.8미터, 높이 1.5미터이다. 널방이 7층에 있는 태왕릉이 널방이 5층인 장군총보다 먼저 만들어진 무덤임을 알 수 있다.

 

능의 정상부에서 기와조각, 벽돌조각등이 발견된 점을 미뤄 향당(제사드리는 집)이 있었던 것으로 추증하고 있다. 최근 왕릉 앞에서 제단터가 발견됨으로 현재는 용도 불명의 건물임을 알았다.  집안에는 왕릉급 무덤 12기 중에서 제단이 발굴, 확인된 무덤이 모두 9기가 있다.

 

가는날 전후로 큰물과 빗물 때문에 집안 부근은 홍수 피해가 심하다. 우리가 찾은 날도 광개토태왕비각에서 부터 약 500미터 정도 거리에 구릉같은 봉분에 흘러내리는 갈색 쌓은 돌이 보였다. 장군총 계단식 적석총을 인식하고 봐라본 태왕릉의 모습은 파괴로 방치된 무덤임을 한눈에 느꼈다. 산사태로 흩어져 내린 돌들 처럼

봉분 주위은 갈색돌 투성이였다.  관광객들 편의를 위해 철책 계단이 널방과 연결되어있었다. 비오는 오후 촉촉한 비안개 속에 계단을 오르면서 흩어져 방치된 적석돌들 사이 잡초를 보면서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일까 혼자말로 되뇌어 보았다.

 

동북아 땅을 제압한 4세기 왕중왕 호태왕인 광개토태왕릉이 빗속에서 널방 문마저 떨어져 나간채 텅빈 돌방 시상대만 남아있어 허전하기 짝이 없다.

관광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대대적인 복원을 하지 않는 이유는 파괴가 심각하여 인력,예산 문제로 우선 순위가 후순위라고 하였다.

중국 한족 중심의 문화재 복원이 선 순위이고, 변방 역사인 고구려 유적에 무관심함을 드러낸 처사이기도 하다.

 

광개토태왕비에도 선조 무덤지기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 있는 이유가 다 근거가 있다. 영토에서 좇겨난 후손, 단절된 역사의 결과는 역시 비참함이다.

하루 빨리 대한민국이 부강하여 만주에 남아있는 고구려 문화재를 보수,복원하는 날을 고대하는 바이다.

 

 

 

 

 

 

 

 

 

 

 

 

 

 <경주 길벗회원 고구려 역사 탐방차>

 <돌방 내부 시상대-비오는 날 6시경에 갔기 때문인지 공안이 퇴근하고 없었다. 촬영이 가능하였다>

 <습기 때문에 현도로 만들어진 벽에 물방울이 심하다> 벽화가 있는 오호분은 어떻겠는가.

 훨씬 내부가 깊기 때문에 습도로 인한 결로현상이 심하였다>

 문화재 복원 및 보수는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는 다면 훼손이 더욱 심화될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호태왕 자료실에서 본 옛 광개토태왕비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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