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상소
고정국
“혈서는 언제나 마침표부터 찍는다.”는
시인 이정록의 ‘붉은 편지’를 다시 읽으며
구제역 방제요원의 피 묻은 장갑을 생각했다.
허옇게 눈 뒤집고, 흙속에서 꿈틀거리던
네발달린 짐승들의 비명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올 겨울 함박눈에는 피가 섞여 내린다지.
언 땅에 무릎 꿇어, 하늘의 용서를 빌며
가축 생매장 하고 농민 가슴에 얼굴을 묻던
일용직 근무일지도 피범벅이 됐다지 아마?
누가 또 핏빛하늘에 사의찬미를 띄우는가,
갈대들 수군거리는 4대강 하류로 와서
살처분 붉은 상소의 마침표를 찍는가.
<추천의 말>
임채성
다산 정약용은 나라와 세상을 걱정하고 시대를 아파하지 않으면 참다운 시가 아니라고 했다. 다산이 생각한 시인의 본분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바루고, 세상을 걱정하고, 시대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의 아픔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하는 외로운 영혼들에게 따뜻한 시심을 투사해 온 고정국 시인은 당대의 현실을 꿰뚫는 통찰을 통해 현대적 자아의 풍경을 밀도 있게 형상화한다. 그는 늘 깨어 있으며 세계와 자신에 대해 냉혹 할 만치 성찰적인 태도를 지닌다. 살아있는 존재들에 대한 시인의 마음은 풍성한 수확을 고대하는 농민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풍요에의 기대는 '구제역'과 '살처분'이라는 현실 앞에서 '함박눈에도 피가 섞여 내리"는 나락을 경험하고 만다. 그것은 삶의 의욕마저 송두리째 앗아가는 분노이자 허탈한 자조의 푸념이다.
제 분신과도 같은 가축들을 묻어야 하는 노동의 대가는 '사의 찬미'를 부르게 하는 아이러니를 낳고 만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농촌 경제의 파탄과 농민의 몰락을 외면한 채 4대강 사업만 부르짖는 위정자들의 형태를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현실인식이다. 아울러 서정에만 천착해 날로 유약해지며 쇄말적 감각에만 치중하는 오늘의 시조문단에 던지는 일침이기도 하다. 현실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주변의 문제들을 보듬는 문학의 실천적 변을 포기 할 수 없다는 점을 이 작품은 웅번하고 있는 것이다.
**시조 2012 상반기호에서 발췌
첫댓글 시도 훌륭하고 비평도 훌륭하네요. 임채성님을 예서 만나다니... 이번 만해마을 같이 다녀왔네요... 친구? 선배님인지라... 대단한 시인이시죠, 이제보니 평론가이시기도 하네요. 물론 어람님에 비할바는 아니지만요.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무지 사랑하더라구요... 좋은 시조, 좋은 비평... 자청비님 스크랩해 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