逍遙遊 1-1 상상의 나래를 펴자.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齊諧者 志怪者也 諧之言曰
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
飜譯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곤(鯤)이다. 鯤의
크기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이 붕(鵬)이다. 鵬의 등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鵬이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에 구름을 드리운 것 같다. 이 새는 파도가 치면 장차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고 한다. 남쪽 바다란 하늘의 연못이다.
제해(齊諧)라는 사람은 괴이한 것을 많이 알고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鵬이 남쪽 바다로 갈 때 그 날개 짓으로 물결이 삼천리나 일어 올라갔고,
회오리 바람을 타고 구 만리나
올라간다. 육 개월 동안 날아간 다음 그제서야 숨을 쉰다.”
紬繹
먼저 莊子(BC 370 ~ 287)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보자. 莊子는 孟子(BC 372 ~
289)와 동 시대 사람으로 孔子에서 시작된 儒家思想이 크게 성행하던 周나라가 분열되어 전국 칠웅(七雄)이 그 세력을 겨루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살았던 사람이다. 儒家思想에 젖어있던 사람들은 莊子를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미치광이로 맹비난하였으나, 한편으로는 莊子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 이유는 莊子의 생각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범위를 크게 벗어나 있고,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감히 상상이 안 되는 영역의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실제로 말로서 莊子를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율법이 성행하던 유태인 중에 예수가 태어나 예수를 크게 두려워하지만 한편으로 크게
대립하고 있었던 양상과 비슷하다.
莊子는 왜 곤(鯤)이라는 물고기와 그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된 붕(鵬)을 처음에 언급하면서 이같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을까? 그것은
그 당시 시대적 배경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를 예수가 살았던 시대와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33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의
행적과 말이 인류에게 미친 영향은 엄청나게 크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예수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깊게 살펴보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는 깨달은 자이다. 무엇을 깨달았다는 말인가? 인간의 本質, 眞理, 神?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지만 예수는 그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정말 잘못되었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었는가? 그 당시 유태인들은 구약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율법(律法)에 강하게 얽매어 있었다. 매우 높은 사회적 도덕적 규범으로 인간들이
속박되어 本質로서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가 깨달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표현할 수 있는 용어는 무척 많지만 여기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바로 ‘완전한 自由’이다. 律法에 束縛되어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그 속박을 풀고, 사람들을 옥죄는 그물에서 빠져 나와 완전한 自由를 찾으라고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말했던 것이다. 束縛과 自由! 人爲와 自然! 虛像과
本質! 그 차이에서 예수는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웠을까? 그
차이에서 예수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莊子도 그것을 똑같이 느낀
것이다. 孔子와 孟子로부터 시작된 율법, 禮와 樂이라는 束縛, 小康이라는 미명아래 만들어진 사회규범.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와 진정한
인간의 삶! 완전한 自由, 虛像이 아닌 本質로서의 삶, 人爲가 아닌 自然으로의 삶! 그것을 莊子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束縛과 自由! 人爲와 自然! 虛像과
本質! 그 차이에서 莊子는 얼마나 마음이 안타까웠을까? 그
차이에서 莊子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자유로운가? 우리는 진정 虛像이 아닌 本質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莊子 소요유(逍遙遊) 편(篇)의 첫머리에 나오는 곤(鯤)이라는
물고기와 붕(鵬)이라는 새의 이야기가 허구(虛構)라는 것은 莊子도 알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허구임이 분명한 이야기를 莊子는 왜 그의 긴 이야기의 시작으로
삼은 것일까?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단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言語이다. 인간에게 언어가 없다면 동물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세계 4대 문명인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더스 문명 그리고 황하 문명으로 시작된 인간의 역사는 지금의 찬란한 문명으로 그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이렇듯 인간이 찬란한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그 원천은 인간의 사유(思惟) 능력이다. 생각의
힘이 이렇듯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운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생각을 하기 시작한 배경에는 바로 言語가
있었던 것이다. 인간에게 言語가 없다면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동물에 불과했던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바로 言語이고, 言語로
시작된 생각이 인간으로 하여금 지금의 찬란한 문명을 만들었지만, 단순한 기호에 불과한 言語와 그 언어로써
시작된 인간의 생각에는 그만큼의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모순이 갈등을 빚게 되었던 것이고, 그 갈등으로
인하여 인간의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 莊子는 인간의 言語와 생각, 그리고
마음이 갖는 모순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그리고 莊子는 인간의 言語와 생각, 그리고 마음이 갖는 모순을 속속들이 파헤치기에 앞서 생각의 한계에서 벗어나라는 의미에서 길이가 삼천리나 되는
곤(鯤)이라는 물고기와 붕(鵬)이라는
새를 등장시킨다.
莊子는 작은 생각(小知)보다는 큰 생각(大知)을 소요유(逍遙遊) 편에서
줄곧 강조하고 있다. 생각이 크면 삶의 스케일도 그만큼 커지고, 삶을
대하는 태도 또한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길이가 삼천리나 되는 곤(鯤)이라는 물고기와 붕(鵬)이라는 새의 크기도 대단하지만,
북쪽 바다에서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고 하는 붕(鵬)이라는
새의 의도, 구만 리나 되는 하늘을 오르며 육 개월 동안 날아간 다음 숨을 쉰다는 발상 자체도 보통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생각에는 현실 세계와 일치하는 생각도 있지만,
현실적이지 못하고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그려보는 공상(空想)과 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된 생각인 망상(妄想)도 있다. 그리고 인간의 네 번째 신체인 멘탈체(mental body)에서 나타나는 능력인 꿈을 포함한 염력, 텔리파시, 최면, 내부투시력, 심령현상, 유체이탈, 초감각적 지각 등도 있다. 이렇게 인간이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을 환상(幻想)이라고 정의하고, 그런 능력을 환력(幻力)이라고 정의하자. 공상(空想)과 망상(妄想)은 인간이
생각으로 그려내는 이미지이지만, 환상(幻想)은 인간이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아닌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머리 속에 저절로 떠올려지는 이미지이다. 莊子라는 책의 내용으로 보면 莊子는 예수, 釋迦 및 老子와 같이
깨달음이라는 道의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 충분히 보여진다. 따라서 보통사람은 모르는 멘탈체(mental body)에서 나타나는 환력(幻力)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莊子가 곤(鯤)이라는 물고기와 붕(鵬)이라는 새를 소요유(逍遙遊) 편(篇)의 첫머리에 등장시키는
이유도 두 가지로 해석하여야 한다. 첫째는 보통사람도 할 수 있는 공상(空想)과 망상(妄想)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큰 생각(大知)으로 사고의 전환을 꾀하고자 하는 측면과 둘째로 멘탈체(mental body)에
이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환력(幻力)에 의한 환상(幻想)으로 자신에게 보여진 이미지를 이야기로 전개시켜 나가는 경우의
두 가지 모두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나는 이 두 가지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고 莊子의 해설을 이어가고자
한다.
그리고 莊子가 자신의 이야기에 등장시키는 인물들의 이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莊子에는 莊子가 지어낸 허구의 인물들도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제해(齊諧)는 ‘이야기꾼’ 정도로
풀이하면 될 것 같다.
아무튼 뛰어난 심리학자이고, 인간의 本質을
그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파헤친 莊子를 본격적으로 들어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