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8일) 국회에서는 한나라당이 발의한 '검찰총장 탄핵안' 표결이 있었습니다. 표결에는 한나라당 의원 136명 전원과 민국당 강숙자 의원, 무소속 정몽준 의원 등 138명이 참여했으나, 투표 후 민주당쪽에서 감표(監票)요원들을 내보내지 않아 논란 끝에 투표함을 봉인한 채 개표는 진행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만섭 국회의장은 "국민과 의원들이 원할 때 (봉인된 투표함을) 개봉하겠다"며 의사봉을 두드리고 산회를 선포했습니다. 이로써 '검찰총장 탄핵안'은 본회의 시작 1시간여 만에 '투표는 했지만 개표하지 않은 채' 자동 폐기됐고(본회의에서 24-72시간 안에 의결해야 함), 검찰총장 탄핵소추는 자동 무산되었습니다. 개표를 하지 못한 원인이었던 '감표요원 논란' 은 우리 헌정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서로 개표 결과는 자기들 쪽의 승리 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기국회가 정쟁으로 얼룩지고 꼭 처리해야할 내년도 예산안도 통과시키지 못한 채 폐회되고 말았습니다. 60여가지나 되는 민생 관련 법안도 더불어 낮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예산안 처리를 위한 임시국회 소집도 난항을 겪으리라는 관측이고 보면 우리나라의 정당과 국회는 무얼 위해 존재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국가 인권위원회가 출범한 직후 진정서를 첫 번째로 접수한 사람은 이희원씨입니다. 진정의 내용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제천시장이 자신을 보건소장 인사에서 제외시켰다는 것입니다.
지난 7월 24일 전임 소장 사망으로 소장 자리는 공석이 되었습니다. 제천보건소 소장 자격 조건은 사무관 5년 경력 이상의 의사나 보건행정직 공무원입니다. 그러나 8월이 지나고, 9월이 지나도 권희필 제천시장은 보건소장 임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제천보건소에서는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이희원 씨 한 명뿐이었는데도 말이죠.
이희원 씨는 여러 가지 경로로 의사타진을 했지만, 제천시장은 소장 인사를 차일피일 미뤘다고 합니다.
"장애인에게 15만 명 시민의 보건복지를 맡기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이유입니다. 장애인에게 보건소장을 시키면 창피해서 어떻게 기관장 회의에 데리고 갈 수 있느냐는 모멸적인 이야기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씨는 자신이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시장이 보건소장을 맡기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년에 시장 선거가 있습니다. 제천시장이 제가 소장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말하면서 왜 '장애인에게 육상을 시킬 수 없다'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보건소장이 되면 육상선수처럼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데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권 시장은 지난 번 선거에서 열심히 운동을 했던 보건소 유아무개 과장을 소장으로 승진시켜주고 싶어했습니다."
이희원씨(39)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수석을 놓쳐본 적이 없는 수재였다고 합니다. 1981년 서울대 의과대학 입학 이후 그는 야학활동을 했고, 1983년에는 한 해 쉬면서 1년 동안 공장 활동을 경험했습니다. 노동자들과 함께 하면서 졸업 후에는 직업병을 전공하겠다는 계획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본과 4학년이던 1987년 5월 19일. 이희원 씨는 통일민주당 창당대회에서 정치 깡패들과 한판 싸움을 벌이고, 마취과 수술실에 실습을 하기 위해서 들어섰다가 뒤통수를 도끼가 꽉 내리찍는 느낌을 받고 그 자리에 쓰러지는 불행을 당했습니다. 이희원 씨는 6개월 동안 의식 없는 식물인간으로 지내야 했으나 장례식 직전에 기적적으로 깨어났습니다.
피나는 재활 훈련 끝에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게 되었고, 3급 장애인으로 1990년 다시 학교에 복학했습니다. 졸업 후 의사시험에도 합격한 그는 잠시 경기도에 있는 한 병원에 근무하다가 충북 제천시 보건소 관리의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제천 생활 10년째. 이희원 씨는 이 곳에서 결혼을 했고 7살, 4살 된 아이들도 낳아 키웠습니다. 보건소에서도 소외계층이나 독거노인, 몸이 불편한 사람들과 친구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나름대로 보건소 사업 개선을 위해 노력했고, 재가환자 방문진료사업, 지역사회 장애인 재활사업 등. 그 공로가 인정돼 1998년과 1999년 제천시장과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대조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권력의 최상층을 이루고 있는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임무가 무언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마 이런 모습은 우리 후세들에 의해 단군 이래 최악의 당파싸움이 있었던 시대였다고 규정지어질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해야할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고, 소외계층의 벗이 되어 살았던 사람은 권력층에 의해 또다시 소외를 당하고 마는군요. 다행히 국가 인권위원회가 이런 문제를 시정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종교의 목표는 태평천국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들이 발 딛고 서있는 곳에서 하늘의 뜻을 쫓아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종교인의 임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도 비슷한 목표와 실천과제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좀더 잘살고 모두가 행복을 누리는 나라를 만들라고 국민들은 그들을 뽑아 주었습니다. 국민의 공복으로 그들은 백성들을 보살피고 이롭게 하는 정치를 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현실은 그렇지 않죠. 뭘 해보겠다고 나를 뽐아 달라 외치기 전에 자기를 바로 세웠어야 할 일입니다.
노장 사상은 중국의 최악의 혼란기인 춘주전국시대에 발흥한 사상입니다. 노자는 춘추 말기에 장자는 전국 말기에 활동하였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서는 무리들을 향하여 이런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세상의 어지러움을 보면서 “누가 흐린 것들과 어울리면서 고요함으로써 그것들을 천천히 맑힐 수 있을꼬” 하고 탄식합니다.[塾能濁以靜之徐淸-노자 15장]
위나라 영공의 태자 괴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천성이 매우 악날 하고 독살스런[天殺]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비의 첩이었던 남자(男子)라는 희대의 탕녀와 놀아나다가 질투에 불타 그녀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외국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는 아비가 죽은 후 위나라로 돌아와 자기 아들인 출공(出公)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장공(莊公)이 됩니다.
장공이 어린 시절 그를 보필하라는 임무가 안합에게 떨어졌습니다. 안합이 걱정이 가득하여 위나라의 대부 거백옥에게 찾아 왔습니다. 안합은 이렇게 말하죠. ‘그는 천품이 박덕하여 남의 허물만 볼지 자기 허물은 모르며 모든 일을 제 멋대로 합니다. 그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면 나라가 위태롭고, 바른 말로 그를 보필하면 제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거백옥은 안합에게 삼가 조심하여 자신을 먼저 세우고, 겉으로 따라 주되 한통속이 되지 말며, 속으로 맞추어 주되 너무 두드러지게는 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화이부동(和而不同)하라는 것이죠. 화이부동이란 상대와 함께 어울리면서 그들에게 동화되어서는 안 되며 그들을 견인하여 바른 곳으로 이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성경에서 또 읽게 되었습니다. 바울 선생의 고백입니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 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상대에 따라 그들과 같이 되어 그들을 해방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유다인에게는 유다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율법에 매인 자들에게는 자신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지만 율법에 매인 자처럼, 악한 사람에게는 악한 사람처럼 어울렸습니다. 바울 선생님이 그렇게 처신한 것은 바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노자의 탄식에 적적히 응답한 분이었다고나 할까요?
모든 상대와 동화하되 거기서 멈추지 말고 상대를 자기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이제 광명에서 유일하게 남은 산동네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이제 우리 공동체에 주어진 사명은 이곳 사람들과 동화하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변화시켜 내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 소외당하는 사람들, 고통 속에 울부짖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참 벗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루 1선행운동을 결산하며 우리들 속에 이웃 사랑이 체현되어 그리스도의 향내를 항상 풍기게 되시기를 아기 예수도 탄생하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