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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 |
재가불자라는 의식을 하는 정도가 되면 5계, 8계, 10선계, 보살계 등 수계를 하게 되고, ‘○○거사’ ‘△△보살’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법회 등 각종 활동을 위해 사찰을 찾는다.
삼보에 귀의하고 불보살을 신앙하는 불자들, 불공과 기도를 하는 불자들, 사찰순례를 하고 스님들에게 설법을 듣는 불자들, 시민선방에서 참선하는 불자들, 안거결제에 참여하는 불자들, 재가자이지만 출가자 중심의 승가에 편입되고 싶어 하는 불자들(재가불자의 일부는 약 15년 전부터 ‘재가불자들도 승가에 포함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과문한 탓이지만 이런 정도의 왕성한 신행활동을 하는 재가불자를 가진 나라들이 있을까 싶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한국의 재가불자의 모습은 ‘재가불자와 출가승려’의 길을 동일한 성격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재가자와 출가자는 불교의 교리를 이해하는 수준의 깊고 옅음의 차이, 준수해야 되는 계율의 규모와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동일한 목표를 구현하기 위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재가자는 초보적인 것이고 점차 완성도가 높아지면 출가 승려의 단계에 이른다는 소박한 생각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적 시각으로 보면 이는 순진한 생각이다. 대승불교는 재가불자들이 불교의 중심이라는 강한 주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불교이며, 보살행을 통해 중생계를 불국정토로 만들자는 불교이다. 그래서 ‘비구’라고 불리는 출가승려가 중심이 되는 불교에서 ‘보디사트바(보살)’가 중심이 되는 불교로 바꾸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출가자는 극소수이다(한국의 인구에서 조계종단 스님 숫자는 0.0002%임). 그런데 극소수인 출가자가 그들에게 적합한 형태로 불교를 만들어가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명상과 삼매 위주의 불교, 세밀한 교리탐구 위주의 불교는 출가자에게 적합한 형태로 진화된 것이라 생각된다.
재가불자들은 약 2000년 전, 이러한 출가자에게 적합한 불교보다는 일반대중에게 적합하고 필요한 불교를 만들어갔다. 대승불교시대, 대중불교시대를 연 것이다. 일반대중이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는 대승(대중)불교는 출가승려의 불교와 그 방법이 다르다. ‘대승’은 높은 경지를 뜻하는 질적인 표현이 아니라, 소수가 아닌 ‘대중적’이라는 양적인 표현이다.
출가자는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는 집단으로서 내부규율인 계율생활을 해야 하는 생활상의 한계가 많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잘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이 많다. 그리고 출가자의 불교는 많은 제약과 한계 속에서 특수한 형태로 진화할 수밖에 없으며, 사회생활을 떠나 있기에 방관적이고 논평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재가불자의 불교(대승불교)’는 생활(직업) 속에서 불교의 가치를 구현하고, 불교의 윤리의식으로 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이뤄가기 위해 사회적 노력을 하는 것이다. 대승정신의 재가불자들은 스스로를 보디사트바로 내세우길 좋아하지, 승가의 일원이 되는 것을 꿈에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출가승려가 대승불교권에 살고 있어서 비록 대승경전을 많이 읽고 보디사트바의 길을 흠모하더라도 그 길을 걸을 수 없다. ‘빽빽한 중생계의 숲에 들어가 그 차별상을 잘 알아서 보시, 애어, 이행, 동사섭의 바라밀을 펼치면서 자비행을 한다는 것(화엄경 십지품)’은 그저 염불이나 설법으로서밖에 할 수 없다. 우선 계율과 종단의 율법이 사회적 보살행을 제약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의 첨단문명시대의 사회는 전문적인 학습과 각종 노력을 통해서 그 세부사항이나 전체 시스템을 알게 되는데, 사찰생활과 명상수행에 전념하는 출가승려는 사회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을 갖지 못한다.
대승불교는 이러한 문제를 2000년 전부터 통감하고 세상과 역사 속에서 작동되는 불교를 만들기 위해 대승불교를 표방했다. 재가불자가 앞장서는 사회적 보살행이야말로 대승불교 출현의 원인이다. 출가승려에게 사회적 보살행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출가승려는 ‘반야를 바탕한 자비방편행을 말하는 대승불교’를 ‘추상적이고 번다한 존재론’으로 굴절시켰고(중국 화엄종), 불교를 심층심리학의 영역으로 이해(중국 법상종)하는가 하면, ‘마음 깨치는 불교’(중국 선종)로 변절시키는 반대승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출가 승려는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오늘의 현실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600년의 지난 모든 불교를 담지하여 다음 세대까지 전승하는 일, 즉 불교의 혜명(慧命)을 잇는 거룩하고 엄숙한 임무를 담당하는 일이다. 출가승려란 불교 선생님(스승)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학교의 선생님은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직접 사회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출가승려도 불교의 역사와 교리를 가르치지만 직접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출가승려가 대승불교까지도 출가승려에게 적합한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 출가승려에게 또 하나 번거로운(좋은 것일 수도 있는) 임무는 지난 1700년간 한반도에서 형성된 불교의 유형적 자산을 관리하고 유지 전승하는 일이다. 이 일은 정말 고달프다. 조계종단의 스님들이 주로 이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애초의 출가목적은 수도하여 훌륭한 도인이 되는 것이었는데, 종단 구성원의 책무상 승납 10년이 넘으면 80%이상이 사찰과 불교자산을 관리 운영하는 일을 맡게 된다.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게 되는 경우지만, 이 일은 하다보면 익숙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 늘 마음으로 불편해 하기도 한 일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사찰운영과 불교자산을 관리하는 일은 매우 전문적인 능력을 요구한다. 출가승려에게 적합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종무원의 보조를 받는다.
수년 전부터 종단에서는 출가자는 수도와 교화의 일에 전념하고, 재가불자가 사찰과 불교자산을 관리 운영해야 한다는 요구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재가불자의 역할이 사찰과 불교자산 관리하는 일이라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재가불자의 역할을 축소하여 호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사찰과 종단의 관리업무를 담당하는 종무원의 일 또한 중요한 재가불자의 몫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숫자가 많아야 1만 명을 넘을 수는 없는 소수자의 일이라서 언필칭 2천만 불자라 하는 재자불자의 보편적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재가불자들이 진심으로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바로 중생계이며, 구체적인 한국사회 현실이다. 화엄에서 말하는 그 ‘중생계의 빽빽한 숲’ 말이다. 거기서 10바라밀을 행하면서 보디사트바의 삶을 사는 일, 이것이 진정 재가불자의 나아갈 일일 것이다.
재가불자가 현실에 지치고 힘들 땐 사찰에 가서 불보살을 경배하며 불교의 가치와 원력을 되새기도 하고, 출가자로부터 설법을 듣고 위로와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집안에 애경사가 생기면 사찰에서 불공을 하거나 천도재를 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디사트바의 본령은 바라밀행이며, 재가불자가 반야와 자비를 실현하는 장소는 사찰이 아니라 중생계인 사회현장이다.
생활 속에서 보살행(각종 바라밀)을 행하기에도 바쁜 대다수 재가불자들이 사찰운영, 종단운영을 제대로 하고 있나 살핀다거나, 출가자의 계율준수를 감시하고 지적하는 그런 문제에 시간을 낭비하기는 너무 아까운 일이다.
출가자와 재가불자의 바람직한 관계가 특별하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출가승려는 재가불자를 보디사트바로서 존중하여야 할 것이고, 재가불자는 스님들을 삼보로서 존경을 표하거나, 그럴 수 없는 경우에는 불교관련 특수한 직무를 수행하는 전문인으로 예우하면 될 것이다. 대신 출가자와 재가불자는 각자의 역할과 나아갈 길이 있다. 출가승단은 경제적 측면에서만 국한해본다면 현재 물려받은 사찰과 불교자산을 관리운영하면서 각종 법회를 한다거나 노력을 해서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출가승단은 불교자본가란 뜻이다. 재가불자들이 굳이 2000년전 인도의 무소유승단을 외호하듯 출가승려를 외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힐 것은 없다. 0.0002%의 종무원을 제외한 대다수 재가불자들은 이제 홀가분하게 사찰과 출가 승려를 떠나 대승불교의 현장인 사회현장 속으로 들어가 바라밀을 행해야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불교정신과 가치관이 작동되고 안 되고는 재가불자인 보디사트바에 달려있다.
[1295호 / 2015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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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현응스님은 교육원장 5년 임기를 재임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한국불교의 교육을 이끌어갈 인재를 찾다가 더 이상의 인물은 없으니 재임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물론 탁월한 인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정치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저런 자리는 나아갈 수 없다.
현응스님은 지금 출가자와 재가자 사이에
여러 가지 갈등이 빚어지는 현실을 보다가 자신의 소견을 피력한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지위에서 말하는 것은
개인의 견해를 넘어 한국불교의 교육과 방향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글에 대해서 출가자와 재가자를 포함한 모든 불자들이 무조건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고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는 이런 글에 대하여 지혜로운 불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여 여기 싣고
의견을 들어 보고자 한다. 다음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두고 의견을 말하면 좋겠다.
@正牧
1) 대승불교와 보디사트바(보살)의 개념
2)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정립 ---- 다 같이 승가 또는 승보에 속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3) 출가자와 재가자의 역할 -----사찰과 재정관리를 누가 해야 하는가?
4) 출가자와 재가자의 신행 및 수행관 ---신행활동과 수행법이 달라야 하는가, 같아야 하는가?
5) 출가자의 수행환경 책임 소재----출가자의 자급자족이 옳은가. 보시에 의존해야 하는가?
6) 출가수행은 특수직업인가?
대략 이런 문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재가자를 포함한 대다수 대중의 동의를 구하지 못하면
법의 수레는 부처님과 조사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굴러가지 않을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나무아미타불
아마 댓글 올리기가 망설여 지나 봅니다. 무식한 제가 먼저 나서겠습니다.
이미 스님께서 저를(저희들 이라고 해도 될련지? ) 이렇게 훈련 시켜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뭐라해도 대승불교를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정신을 벗어나서 논한다는 것은 외도이다.
승가는 하화중생을 할 수 있는 인재를 배출하는 도량이 되어야 하며 모범이 되어야 한다. 대중들을 향하여 육바라밀행을 하라시며 법문을 하시는 스님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찹찹한 느낌이다. 재가자가 승보에 들면 많은 혼란이 야기될 수 있으므로 형식적이든 가식적이든 승가의 숭고함 내지 경외로움은 보존되어 가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재정문제는 승가든 재가자든 관리주체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승가의 정화가 선행된 후 새로운 형태의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컨대,재단대학에서 불교철학과 학생들을 모집할때 전액장학금을 주든지 하여 많은 학생을 유치하여 학사과정외 별도의 연수과정을 신설하여 그 이수자들을 종단에서 채용하여 사찰관리 및 재정관리에 참여시키는 방안을 모색해 보면, 물론 그 학생들의 대부분을 출가자화 시키는 것이 주된 목표이다. 신행활동은 근본적으로 같이 가야하지만
수행은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역시 같이 할 수 있는 염불법을 택하면서 교학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금강지체를 가진
동량을 발굴하여 참선수행을 시키면서
그 명맥을 이어 나가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사찰의 재정은 부익부 빈익빈의 악순환이다. 종단의 힘이 강력하여 모든 재정을 종단에서 관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본다.그러하기 위하여 사찰정비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출가 수행자를 어떤 특수한 직업집단으로 보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승가는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불교가 살아날 것이다. 사찰재정이 자급자족되면 좋겠지만 보시금은 승가가 올바르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본다.>
저의 견해를 말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일심광명화신아미타아미타아미타()()()
제좁은소견으론 참안타까운일입니다
스님법문이생각납니다
스님은 스님의향기가나야되고
부모는부모의향기가나야되고()()()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1)스님의 향기가 난다는 전제하에서는 누가 하든 상관이 없으나 2)스님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면 ㄱ)출가자 재가자 같은 승보 승가에 속해야 하고 ㄴ)사찰 재정관리는 신심 있는 전문 재가자가 해야 되고 ㄷ)신행활동과 수행법은 같아야 하며 ㄹ)출가자는 원칙적으로 보시에 의존해야 하고, , 예외적으로 자급자족해야 한다고 제 소견입니다, 대만의 정토염불을 벤치마킹하면 어떨까 하는생각도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1) 대승불교는 일심을 법으로 삼아 적극적인 전법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보리살타는 발심하여 상홍불도 화화중생하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2) 정정취에 올라야 출가자와 재가자는 모두 승보입니다.
3)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통하여 재가자에게 일임합니다.
4) 수행의 과정을 거쳐서 신행활동이 나와야 됩니다. 아무렇게나 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보통의 경우이고 염불수행이 곧 신행활동입니다.
5) 자급자족을 한다면 비불교적 상업행위가 늘어날 것이고
보시에 의존한다면 그것에 휘둘릴 것입니다.
둘다 장단점이 있으나 자급자족이 조금 더 희망적입니다.
6) 특수적입니다.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영리나 일신의 안위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출가자든 재가자든 불교도라면 불교 종단 또는 소속 사찰에 대한 일정 수준의 재정 지원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가자들은 이 외호 의무를 포기하라는 주장은 결국 사찰 운영을 온전히 출가승려와 종무원끼리만 하겠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현재 불교 종단이나 사찰에서 재가자의 시주나 보시를 받지 않고 운영할 수 있는 종단이 어디 있을 것이며 혹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재산이 많아 그게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재산은 또 원래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결국 기존 재산 역시 그동안 수많은 세월 동안 무수히 많은 재가자들의 보시로 조성된 게 아닙니까. 만일 필자의 주장대로 출가승려가 수준 높은 불교 교리나 수행을 담당하는-
전문직업인이어서 사회 현상을 외면하는 게 원칙이라면 사찰 운영을 담당할 게 아니라 그 직업에 걸맞게 대중과 격리된 공간에서 전문적인 교학 연구와 수행에 전념하고 일정한 급여만 받으면 될 것입니다. 그런 취지라면 필자 스님의 주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할 것입니다.
출가는 오직 발보리심을 위한 방편이라는 원효성사의 말씀이 새삼 가슴에 와닿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종단의 주요 직책을 맡은 스님으로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많이 하고 있다.
교학도 바르지 않고, 무소유정신도 없고,
불교와 불자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는 참으로 한심한 글이다.
숲속에 갇혀 있으면 산을 보지 못한다,
지금 수많은 현명한 불자들이 산 밖에서 숲을 바라보며 염려하고 있다.
이 글을 올린 인터넷 <법보신문> 에는 많은 불자님들(출가자 및 재가자)이
혹독한 비난의 댓글을 올렸다. 현응스님은 그들의 댓글을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
오로지 깊은 신심으로 수행하는 스님들과 선량한 불자들을 서운하게 하는
마음자세나 글들을 삼가해 주시기 바란다.
나무아미타불
초기불교인 소승불교는 교단이 출가자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관념에서의 불교를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대승불교는 자리이타행의 수행으로 옮겨져 재가자도 함께하는 승단으로 재구성 되었다고 본다.
대승에서 출현하는 보살은 위로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육바라밀의 수행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부처님지혜로 제도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글쓴이는 보살의 역할을 아주 편협된 사고로 그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
출가자들은 오직 선과 명상, 삼매위주와 세밀한 교리탐구의 역할만을 말하고 이 사회에 그들이 하는 행위로써의 범위를 극소화 시켜 말하고 있다.
승가를 승보로만 얘기 한다면 자기모순에 빠지는 일이다.
불 법 승 삼보가 재가불자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재가자가 출가자의 수행의 형태만을 모방하는 차원으로 저급하게 평가 절하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면 글쓴이가 말하는 출가자들의 고유영역이라 하면서 종단이나 각 사찰에서 재가불자들에게 명상 또는 참선이라는 이름으로 수행 프로그램을 하고 있는 것은 무슨 의도인지 묻고 싶다.
이러한 수행형태가 출가자에게만 적합한 형태로 진화된 것이라 하면서 재가불자에게 수행에 참여케하고 있는 것은 재정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것인가?
중생계와 함께 하는 동체대비행이 없는 도를 이룬 후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서명수 목적이 없는 단순 출가자의 모습일 뿐이다.
수행의 궁극은 입전수수로 결국은 중생계로 나아가는 것인데 글쓴이는 바라밀을 오직 재개불자만이 할 수 있고 출가자는 할 수 없다 하니 참으로 우수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재정적인 문제에서도 중생계라고 말하고 있는 재가 불자의 참여 없이는 승단이 유지 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인데, 부분적으로 사회적으로 비쳐지는 승가의 모습에서 사찰의 규모에 따른 경제적 형편이 다름을 인식하지 않는 부자사찰의 목소리로만 보여지며 구조적인 문제를 성찰하지 않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묻고 싶다.
@서명수 사찰의 운영 유지를 위해 경제적인 부분에서의 여러가지 방법으로 보시를 받고 있는 규모가 작은 사찰을 배려하지 않는 종단에서의 역할을 재고해야 할 것이다.
또한 불교의 맥을 이어가는 출가자들의 질적인 향상을 위한 교육이나 수행에 관계되는 재정적인 지원도 함께 고려 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다
출가수행이 특수 직업인가에 대해 출가자라면 수행자의 입장이지 직업이란 용어를 쓴다면 일정한 일을 하고 그에 상응하는 수입을 얻는 것이라 생각된다
직업이란 사회속에 아니면 사회를 떠나서는 이름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러한 이름을 쓴다면 출가자와 재가불자를 떨어뜨려서 이분법적으로 각각의 세상과 역할을 나누는 것이라고 본다
@서명수 분명히 출가자와 재가자의 수행의 형태나 모습에서 차별은 있지만 이글의 저자가 말하는 의도에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려는 근본 뜻과 우리과 배우고 있는 일심사상과 부처님의 지혜에 대하여 많이 어긋나 있어서 기사를 읽는 내내 불교의 현재모습이라 생각되었으며 우리가 불법을 바르게 배우고 익혀서 깨어 있는 현명한 불자가 되어야 겠다고 내내 생각되었다.
이글의 저자의 사상으로는 진훍속에서 연꽃은 끝내 피어오르지 못할 것이다.
또한 바다가 울어도 붕새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날수 없을것이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불교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부처님 고행수행의 깨달음이 무엇을 위함이었는지, 출가의 근본정신은 무엇인지, 전법의 목적은 무엇인지. 바른 지도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고 이에 맞는 덕성과 실천행을 갖춰야 한다고 봅니다. 왜 반드시 정정취여야하고 묘관찰지를 깨달아야만이 중생제도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지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청정하고 밝은 불교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나무아미타()()()
도대체 무슨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글이네요. 글라고 하기도 뭐한
어디서 이상한 짜집기 지식으로 말도 안되는 논리로 뒤죽박죽
제대로 교육은 받으셨는지, 공을 들어보기라도 하셨는지
오직 이글에서 느끼는것은 스님이 아주 대단한 직업이고,
재가자는 공부하지말고 교회처럼 봉사나 하러 다녀라.
스님들일에 간섭하지말고 쳐다보지도 말아라 이렇게 얘기하네요.
이건 일반인이 글을 써도 이렇게 분별을 하지는 못할 겁니다.
분별하면 집착한다. 인데 오직 분별밖에 없네요.
뭔말을 하고 있는지...
너무 동떨어져서 어디부터 말을해야 할지요?
파란 하늘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4)은 출가자와 재가자의 신행 및 수행관이 뭐가 다른가요?
저는 근본적으로는 같다고 봅니다. 출가자는 올인해야 겠지요! 공부하는데...
역할이 조금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원효스님의 출가는 발심의 방편이라는 말만 생각납니다.
차라리 우리가 교육원장 하고 싶습니다.
확 바꿔버리게
감사합니다. 일심 광명 화신 나무아미타불()()()
한국은 경제적으로 급성장에 따라 분수를 모르는 위가 난립하여 도덕과 질서가 파괴되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는 삭막한 현실이다.
한국 불교계도 예외는 아니다. 정목 스님 법문의 반은 분통을 참지 못해 통분할 때마다 믿고 싶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은 곳곳에서 현실과 마주한다.
정목 스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은 성품이 맑은 질박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소지장에 의해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머리로만 계산하니 존중과 존경의 대상도 없어졌다.
스님과 재가자는 삶의 목적이 다르고 가는 길이 달라 아예 인연 생기 조건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스님이나 재가자는 자기가 처한 분수
를 모르고 해야 할 바와 가야 할 길을 모른다.
그래서 지혜를 얻지 못하고 질척거리는 불교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스님은 깊은 산 중에서도 진실한 구도의 길을 걷는다면 재가자들은 자연히 존경하고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선지식인으로 지극정성으로 예를 다할 것이다.
출가는 오직 발보리심을 위해서 하여야 하는데 세상 살기 어려워 도피처로 직업으로 하다 보니
발원이 오직 개인의 안위를 위한 것 같아 안타까운 실정이다.
스님으로서 살아야 할 목적이 다르면 재가자들과 스님의 관계에서 위가 없어지고
부처님 법으로 살아가는 예우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시대가 말법 시대라고 하지만 오롯이 할 바를 알고 분수
@좋은인연678 를 지키며 자신의 위치를 고수한다면 청정의 세계로 자연히 순리의 세상과 마주할 것이다.
부처님의 일대사인연으로 온 바른 법을 전할 도인이 없는 시대이다.
이 시대의 선지식인으로 고군분투하는 정목 스님의 가르침 속에서
아미타파 정토원의 질박한 스님과 도반의 감동적인 스토리가 불행한
이 시대를 일심 정토의 순리로 이끌어 갈 것이다.
어느 하나 문제의 원인이 아니고 시대에 따른 수많은 인연 조건에 의한 현상이 극에 달했다고 본다.
도인이 없는 불행한 시대다.
그러나 난세에 영웅 나고 위기가 기회이고 파도가 쳐야 붕새가 날고 민중이 울어야 준비된 인물이 나타난다.
궁하면 변하게 되는 게 진리이다. 부처님의
@좋은인연678 지혜는 궁하여 극에 달하여 전도몽상이다.
지금의 시절 인연에 정목 스님이 계셔서 다행이고 부처님 법의 정수 원효 성사 일심 사상으로
세상은 진리를 바탕으로 역사를 쓰면서 순환할 것이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사회적인 권위를 가졌다고 부처님의 지혜를 갖춘 것은 아닌듯 하다.
진실의 모습은 자기만 모르고 가진 실력만큼 냉정한 평가로 나타난다.
잘 잘못을 탓하기보다 정목 스님의 가르침을 통한 희망을 찬탄하며
아미타 삼신의 지혜 광명이 가득함을 대신하고 싶은 마음으로 적어 보았다.
일심 광명 화신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자신의 견해를 허심탄회하게 열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들의 진솔한 의견은 곧 바른 법, 바른 지도자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출가자와 현명한 불자님들의 의견을 듣고
법보신문은 기사를 내렸습니다.
꼬리만을 감출 것이 아니라, 깊이 반성하는 계기로 삼고,
출가자의 사명을 다해 불교의 미래를 밝게 하는 종단의 지도자가 되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댓글을 올려주신 아미타파형제님들 당신들이 계서서
한국불교 희망 이보입니다. 든든합니다.
현응스님! 역시 불교를 모르십니다.
왜~ 부처님의 지혜를 모르십니다. 종교체험 이없는 출가수행 비구스님! 이십니다.
아미타파 법당 정목스님 제자들 ~ 이시대에 한국불교 희망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파형제님들 또한축하합니다 정목스님의 가르침으로 공부하시는 "인연" 을.....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 아미타파 아미타한국()()()!!!.
조계종에 관심없음...종파, 종단..이런거 다 비정상으로 봄. 정토종이라고 하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