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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 (Ralner Maria Rilke)
1875.12.04 ~1926.12.29
독일 시인 .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 출생. 철도회사에 근무하는 아버지와 고급관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미숙아로 태어났으며, 9세 때 양친은 이혼하였다.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육군실과학교에 적을 두었으나, 시인적 소질이 풍부한데다가 병약한 릴케에게는 군사학교의 생활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1891년에 신병을 이유로 중퇴한 후에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세 때 첫시집 <인생과 소곡>(1894) 을 출판하였다. 20세 때인 1895년 프라하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문학수업을 하였고, 뮌헨으로 옮겨 간 이듬해인 1897년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알게 되어 깊은 영향을 받았는데, 1899년과 1900년 2회에 걸쳐서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와 함께 러시아를 여행한 것이 시인으로서 릴케의 새로운 출발을 촉진하였고, 그의 진면목을 떨치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시작詩作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독일어 표현능력을 높혔고, 표현할 수 있는 시어의 영역을 확대시킨 점에 있다. 그것은 종래의 양식이나 언어표현에 의해서는 파악이 불가능했던 근대도시의 생활감각에 대하여 신체감각 자체를 지성화하는 차원에서의 한 표현의지의 성과이다. 특히 후기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스스로 육체성을 갖춘 낱말에 바탕을 두고 시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시법詩法은 유럽 근대의 로고스중심주의를 벗어나 현실적 재구성을 꾀하려는 현대시 방법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출처; Daum 백과사전-
라이너 마리아 릴케
화가 파올라 모데르존 베커가 그린 릴케의 아내 클라라 베스트 호프(왼쪽)와 릴케의 초상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문학이 처음부터 화려한 꽃을 피운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독학하다시피한 문학청년 시절에 첫 시집을 냈으니 미숙할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청소년기에 두각을 나타낸 아르튀르 랭보 같은 천재는 아니었다.
시인으로서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생애는 4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그의 향리인 프라하에서 시인으로 출발 한 때로 《인생과 소곡小曲》(1894) 《가신봉폐(家神奉幣):Larenopfer》(1896) 《꿈의 관(冠)》(1897) 《강림절:Advent》(1898) 등 몽상적이고 낭만적인 신낭만파풍의 시집을 냈는데, 이 중 후자의 세 시집을 1913년에 《제1시집:Erste Gedichte》이라는 제목으로 한데 엮어 펴내었다.
제2기는 릴케가 자기의 개성에 눈을 뜬 시기로서 러시아 여행의 체험은 그의 시세계에 깊은 종교성을 가미하게 하였다. 《나의 축일에:Mir zur Feier》(1899)는 그의 개성이 처음으로 확립된 시집으로 새로운 생(生)의 개화와 그에 대한 불안을 노래한 것인데, 이것은 1909년에 《구시집(舊詩集)》이라는 이름으로 증보 ·개정되어 간행되었다. 《형상시집(形象詩集):Das Buch der Bilder》(1902)과 《시도시집(時禱詩集):Das Stundenbuch》(1905)에서는 그의 개성이 한층 더 아름답게 전개되어 독자적인 시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기도서'를 문학적으로 수용한 이 <시도시집(時禱詩集)>은 자신의 시 창작이 극본적으로 종교적인 치열성을 담고 있음을 암시하면서 멀리 있는 존재인 신을 향한 끝없는 날갯짓임을 웅변하였다. 이
시집을 펴냄으로써 릴케의 문학은 평자와 독자들에게 강열한 인상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27세의 릴케와 62세의 로댕
릴케는 1902년 8월 <로댕론(1902~1907)> 집필을 의뢰받고 파리로 갔다.
조각가 로댕과 한집에 기거하면서 로댕 예술의 진수를 접하게 된 것이
그의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제3기는 파리시절로서, 조각가 로댕과 일하면서 조각품처럼 그 자체가 독립된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사물(事物)’로서의 시를 창작하려고 하였는데, 《신시집(新詩集)》(1907)과 《신시집 별권》(1908)은 그 훌륭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파리에서의 고독한 생활은 그로 하여금 인간 실존의 궁극의 모습에 눈뜨게 하여 사랑과 고독과 죽음을 깊이 생각하게 하였다. 《말테의 수기(手記):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1910)는 이러한 내적 묵상(默想)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로댕의 조각수법을 산문에 적용한 것이다.
제4기는 1910년 이후 생애를 마칠 때까지로, 10년이나 걸려서 완성한 대작《두이노의 비가(悲歌)》(1922)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1922)는 인간 존재의 긍정을 희구하는 예술정신의 흔적을 보이고 있으며, 보들레르 이래 내면화의 길을 걸어온 서구시의 정점(頂點)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만년에는 프랑스어로 시를 쓰고 발레리의 작품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완성한 뮈조트城館
두이노의 비가(悲歌)
Duineser Elegien
릴케 미학의 완성품이라 불리우는 <두이노의 비가>는, 릴케가 두이노 성 주변을 산책하다가
바람이 전해주는 소리를 듣고 시를 썼다고 하며, 모두 10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시이다.
이<두이노의 비가>는 당시 교류했던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에 비견될 만한
'생의 약동'에 대한 웅대한 찬양가이다.
북부 이탈리아, 아드리아 해안의 '두이노성(城)'
릴케는 1911년 10월 마리 투른 운트 탁시스 후작부인의 초청을 받아 이탈리아의 아드리아 해안에 위치한 그녀 소유의
두이노성(城)에 오게 되고, 모든 손님이 떠나간 12월 중순부터는 혼자만의 고독에 잠긴다. 그러다 1월 하순의 어느 날
릴케는 영감을 얻어 순식간에 제1비가(悲歌)를 쓰게 된다. 그야 말로 "시의 첫 단어가 솟아올라 걸어 나온" 것이다.
[제1비가悲歌]가 나오게 된 과정은, 릴케가 투른 운트 탁시스 후작부인에게 이야기함으로써 후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밖에는 거센 북동풍이 몰아치고 은실로 엮어놓은 듯한 바다 위엔 햇살이 빛나던 어느 날 릴케는 밖으로 나가 방벽 쪽으로
내려갔는데 윙윙대는 바람 속에서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 내 소리친다 한들, 여러 서열의 천사들 중 누가 , 내게 귀기울일 것인가?" 라고 외친 것 같았다. 그는 늘 지니고 다니던 수첩에다 그 구절을 적었고 이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음 시 구절이 쏟아져 나왔으며 그리하여 이미 그날 저녁에 제1비가(悲歌)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릴케가 어떻게 시를 썼는지를 잘 보여준다. 릴케는 '외부로부터' 또는 '위로부터' 복음이 오며, '미지의 힘'이
자신으로 하여금 그것을 받아 적게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스스로를 "시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안에서 또는 그를
통해서 누군가가 시를 쓰게 하는 도구"라 여겼다. 그랬기에 "머리를 흔들며 놀라움 속에서 받아 적을 작품이 떠오르는
순간"을 몇 년이고 기다린 것이다.
'두이노성(城)'
〈두이노의 비가〉는 비통하기 그지없는 허무감을 한탄한 뒤 존재 그 자체의 위대성을 일깨우고 삶의 찬가로 대단원을 장식하고 있다. 그 바람에 위기의식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위안과 희망을 안겨 준다. 때론 생의 길라잡이 역할도 한다. 인간이 유한존재에서 무한존재로 나아갈 가능성을 제시한〈두이노 의 비가〉 가운데〈제1비가〉에서는 작품 전체를 통해 등장하는 여러 모티브가 상호 연관 속에 나타난다. 천사와 동물, 인간의 존재, 사물, 생과 사, 영웅, 연인 등. 여기서 천사는 신의 사자와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허무한 존재에 대한 대극으로서 릴케가 빚어낸 완벽한 존재의 소유자다. 지상 존재와 통하면서도 지상을 초월한 존재다. 〈제2비가>도 천사와 인간의 단절을 거듭 한탄한다. 다만 인간 존재의 허무성이 지속되지 않으리란 믿음을 슬며시 드러낸다. 릴케는 영원하리라 스스로 확신하는 연인들조차 이별로 허무를 체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존재의 허무감에 눈을감거나, 억지로 저항하는 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차라리 인간다운 절도를 지켜나가는 가운데 구원의 길을 모색하라고 암시한다. 그 모범으로서 이별과 사랑을 하나로 표현한 고대 그리스 예술의 인간상을 제시해준다. 〈제3비가〉에서는 사랑의 근원을 성에 대한 본능이라 갈파한다. 여기서 성 본능은 ‘피의 가신’으로 불리며 그 잔인성은 제물이 되는 소녀의 청순함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결국 무분별한 성 본능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건 인간의 순수성과 청순성뿐이다. 〈제4비가〉는 인간이 자연과 하나가 된 전일세계로부터 멀리 떨어 져 있는 이유로 의식 분열, 나아가 존재의 분열을 들고 있다. 인간은 관조를 통해 전일적 존재로 나아갈 수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자연합일이 아니다. 따라서 릴케는 자연과 합치돼 전일적 존재를 구현했던 초년 시절을 그리워한다.
피카소 : <곡예사 가족> 1905/ 워싱턴 국립미술관 소장
피카소의 그림 〈곡예사 가족〉에서 영감을 받아 씌어진 것으로 알려진 〈제5비가〉는 ‘곡예사의 비가(悲歌)’란 별칭을
지니고 있다. 릴케는 허무한 인간 존재의 표본을 정처없이 떠돌며 생활하는 곡예사를 통해 보여 준 뒤 ‘어려서부터 조급히, 누구의, 그 누구를 위해 한 번도 만족하지 못하는, 의지가 졸라매는 이들, 우리보다 한결 허망한 이들’의 허위 연기를 진정한 연인과 대비시키며 곡예사들에게서 진정한 연기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제6비가〉에서는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고 위험은 물론 죽음조차 회피하지 않으면서 자기 존재를 확립해가는 영웅을 내세운다. 〈제5 비가〉까지 엿보이던 비탄의 어조가 서서히 찬가로 바뀌고 있다. 〈제7비가〉는 인간 정서의 힘을 찬양한다. ‘애인이여, 내부 이외의 아무 데도 세계는 없으리라-.’ 이는 인생무상 속에서 릴케가 도달한 최초의 커다란 전환점이다. 세계의 내면화를 통해 생의 긍정을 자각한 것이다. 그러나 〈제8비가〉에서는 인간 존재의 허무성이 동물의 존재방식과 대비를 이루며 다시 한번 돌이켜진다. 의식 분열을 모르는 동물은 ‘열린 세계’와 교감하는데 비해 인간은 의식 분열 때문에 죽음의 세계에 대한 공포만 인지한다.
마지막 <제10비가>에서는 〈제9비가〉가 도달한 생에 대한 긍정을 보다 신중한 자세로 다시 한 번 다짐하고 있다. 비통과 고뇌, 죽음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존재의 긍정성을 담보해주고, 나아가 자연과 일치된 세 계로 이끌어주는 견인차란 것이다. 자각이 곧 환희인 셈이다.
두이노城의 붉은 지붕
[ 제1 비가]
내가 이렇게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중 대체 그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까!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끌어안으면, 나보다 강한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 쓰러지고 말텐데.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디어내는 무서움의 시작일뿐임으로.
우리 이처럼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를
파멸시키는것 따윈 아랑곳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는 무섭다.
나 이러한 심정으로 어두운 흐느낌의 유혹 소리를
집어삼키는데, 아 ! 대체 우리는 그 누구를
필요로 하는가? 천사들도 아니고 인간들도 아니다.
영리한 짐승들은 해석된 세계속에 사는 우리가
마음 편치 않음을 벌써 느끼고 있다. 우리에게 산등성이
나무 한그루 남아있어 날마다 볼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건 어제의 거리와, 우리가 좋아하는
습관의 뒤틀린 맹종, 그것은 남아 떠나지 않았다.
오 그리고 밤, 밤, 우주로 가득찬 바람이
우리의 얼굴을 파먹어 들어가면, 누구에겐들 밤만이 남지 않으랴?
그토록 그리워하던 밤, 쓸쓸한 이의 가슴앞에 힘겹게 서 있는
약간의 환멸을 느끼는 밤, 밤은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더 쉬울까?
아, 그들은 그저 몸을 합쳐 그들의 운명을 가리고 있구나
너는 아직 그것을 모르는가? 우리가 숨쉬는 공간을 향해
한 아름 네 공허를 던져라. 그러면 새들은
더욱 당차게 날개짓 하며 넓어진 대지를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 下略 -
피카소 : <곡예사 가족> 1905 / 수채물감과 잉크
[제5 비가] 별칭='곡예사의 悲歌
그런데 그들은 누구인가, 나에게 말하라, 여행자들, 조금은
우리 자신들보다 더 덧없는 이들을, 일찍부터 조급하게
누구를, 누구를 위해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의지가 쥐어짜고 있는가? 아니면 의지가 이들을 쥐어짜고,
구부리고, 휘감고 흔들대면서,
던졌다가는 되받으면, 그들은 마치 기름칠해서
닳아빠진, 그들의 끝없는 도약으로
더 얇아진 양탄자, 우주 안의
이 버림받은 양탄자 위에서.
반창고처럼 놓인 것이, 마치 교외의
하늘이 그곳의 땅을 아프게라도 한 듯
그리고 그곳에서
똑바로, 나와 서자마자, 그리하여 그 '나와 섬'의
첫 큰 글자가 보이자마자------, 벌써 그 가장 힘 센
남자들을, 그들까지도 장난삼아 다시 굴리려고
언제나 찾아오는 손길, 마치 힘센 아우구스트 대왕이 식탁에서
주석 접시를 굴리듯이.
아하, 그리고 그 중심을 둘러싸고 바라보기의 장미꽃
피고 진다. 이 땅 구르는 자를 둘러싸면, 그는 암술, 저한테서
피어오르는 꽃가루를 뒤집어쓰고, 다시
내키지 않은 마음의 거짓 열매를 맺으면서도,
결코 의식하지 못하는ㅡ 가장 얄팍한
표면으로 반들거리며 가볍게 거짓 웃음짓는 그 마음.
- 中略 -
그대여 열매들만이 알고 있는
뛰어오르기로, 덜 익은 채로,
하루에도 수백 번씩이나 떨어지는구나, 함께 쌓아올린
움직임의 나무로부터 (물보다도 빠르게, 몇 분 동안에
봄, 여름, 그리고 가을을 맞는 나무)ㅡ
그대는 떨어져 무덤에 부딪친다.
때때로 잠시 쉬는 동안에 그대한테서 귀여운
표정이 일어나 따사로운 적 드문
그대의 어머니 쪽으로 가려 한다 ; 그러나 그대의 육신은
그것을 문질러버리니, 수줍게
겨우 지어본 얼굴을 사라지고 만다 ㅡㅡㅡ 그리고 다시
그 남자가 뛰어오르라고 손뼉을 친다, 그리하여 미처 그대가
늘 뛰는 심장 가까이에서 한 번이라도 어떤 고통을
분명하게 느끼기도 전에 발바닥의 타는 듯한 아픔이
그 원천인 그 고통보다 앞서 오는 것이다.
재빨리 눈 속으로 감춘 육신의 눈물 몇 방울과 더불어
그러면서도 맹목적인
그 미소여 ㅡㅡㅡㅡㅡ
천사여! 오 가져라, 꺾어라, 이 작은 꽃 달린 약초를.
꽃병을 마련하여 간수하라! 그것을 우리에겐 아직
열리지 않은 저 기쁨들 사이에다 놓아라. 아담한 단지에 넣어
꽃러럼 멋들어진 글씨를 새겨 찬미하라, '곡예사의 미소'라고
- 下略 -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Die Sonette an Orpheus
베라 오우카미 크노프를 위해 묘비명으로 쓰다 - 1922년 2월 뮈조트성에서
19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한 무용수 베라 오우카미 크노프를 위해 쓴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는 진정한 사랑의 노래로서 시인 릴케의 꿈을 보여주는 시다. 릴케는 1922년 초에 그녀의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한 자료를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넘겨받았으며 그녀의 죽음을 아쉬워하면서 아름다운 그녀의 이른 죽음을 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스스로를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로, 그녀를 에우리디케로 설정하여 이 소네트를 끌어가고 있다. 이 작품은 2부로 구성되었으며 제1부에 26개의 소네트, 제2부에 29개의 소네트, 총 55개의 소네트로 이루어져 있다.
죽은 자의 나라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나오는 오르페우스
-제1부 -
첫 번째 소네트
저기 한 그루 나무가 솟았다. 오, 순수한 승화여!
오, 오르페우스가 노래한다. 오, 귓속의 우람한 나무여!
그리고 모든 것은 침묵했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도
새로운 시작과 눈짓과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고요한 짐승들이 동굴과 둥지를 박차고
맑게 풀어진 숲 밖으로 몰려나왔다 ;
그들이 저희들끼리 그토록 잠잠했던 것은
꾀를 부리거나 불안해서가 아니라.
다만 듣기 위해서였다. 포효, 지저귐, 음매소리는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하찮아 보였다. 그리고 거기
이것들을 받아들일 오두막 한 채도 없던 곳.
가장 어두운 욕망으로부터의 은신처,
입구의 기둥들이 흔들리는 그곳에
그대는 그들을 위한 경청의 신전을 세웠다.
두 번째 소네트
그것은 거의 소녀같았으며 노래와 칠현금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이 기쁨에서 흘러나와
제 봄 너울 사이로 해맑게 빛나며
네 귓속에다 잠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내 안에서 잠들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잠이었다.
내가 언제나 경탄하곤 했던 이 나무들이며,
느낄 수 있던 그 거리, 직접 느껴본 초원,
그리고 너를 사로 잡았던 그 모든 놀라움이.
그녀는 세계를 잠재웠다. 노래하는 신이여, 그대는
어떻게 완성시켜 놓았기에, 그녀는 잠에서 깨어날
생각도 안하는가? 보라, 그녀는 일어났다 또 잠들었다.
어디에 그녀의 죽음이 있는가? 오, 그대는 그대 노래가
사라지기 전에 이 악상을 생각해내지 않을 텐가?
그녀는 내게서 나와 어디로 가라앉고 있나?......거의 소녀같은......
스물다섯 번째 소네트
그러나 나 이제 그대를, 이름 모를 한 송이
꽃처럼 알아온 그대를 다시 한번 기억하여
신들에게 보여주려네, 빼앗겨버린 여인이여,
억누를 수 없는 절규의 아름다운 놀이친구여.
원래는 무희였지, 머뭇거림 기득한 몸, 갑자기
누가 그녀의 젊음을 청동 속에 부은 듯 멈추었네.
슬퍼하며, 귀기울이며, 그곳, 드높은 능력자들은
변화한 그녀의 심장 속으로 음악을 던져 넣었네.
병이 가까이 다가왔네. 이미 그림자에 사로잡혀,
검은 피가 쏟아졌네, 그러나, 의심도 잠시 뿐,
피는 자신의 자연스런 몸 안으로 솟아올랐네.
어둠과 추락으로 중단되기는 했어도, 언제나 다시
피는 이승의 빛으로 반짝였네. 무섭게 고동치다가
마침내 절망적으로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죽은 자의 나라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나오는 오르페우스
{참고}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줄거리
음악의 신 아폴론이 뮤즈인 칼리오페를 사랑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천하제일의 명가수라 불리는 오르페우스이다.
오르페우스는 아폴론에게 현악기의 일종인 리라, 즉 수금(竪琴) 한 대와 연주하는 기술을 물려받았다. 오르페우스의 수금 켜는 솜씨는 참으로 훌륭했다. 또한 노래를 잘 지었고 부르기도 잘해 그의 음악에는 매혹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짐승까지도 오르페우스가 고르는 가락을 들으면 그 거친 성질을 눅이고 다가와 귀를 기울이곤 했다. 나무나 바위도 그 가락에 감응하여, 나무는 그가 있는 쪽으로 가지를 휘었고 바위는 그 단단한 성질을 잠시 누그러뜨려 말랑말랑해졌다. 이 천하의 명가수가 나이가 들자 에우리디케와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한 지 열흘이 채 못 되는 어느 날, 새색시는 동무들과 함께 올림포스 산 기슭의 템페계곡으로 꽃을 꺾으러 갔다가, 양을 돌보면서 꿀벌을 치는 아리스타오스라는 청년을 만났다. 에우리디케는 추근대는 아리스타오스를 피해 도망치다가 그만 독사에게 발꿈치를 물려 숨을 거두었다. 졸지에 새색시를 잃은 오르페우스는 신과 인간은 물론이고 숨쉬는 모든 것에게 수금 소리와 노래로 슬픔을 전했다. 오르페우스의 슬픔은 함께 슬퍼하는 자의 슬픔으로 삭여질 수 있는 그런 슬픔이 아니었다.
마침내 오르페우스는 결심했다. 죽은 자의 나라로 가서 아내를 찾아 오기로. 그의 심금을 울리는 수금 소리와 애간장 저미는 노래는 명부의 신들을 감동시켰고 결국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데려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에우리디케는 다시 지하 세계로 떨어졌다.
(좌측) - 강에 떠내려가는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수금
(우측) - 아들의 머리와 수금을 들고 있는 오르페우스의 어머니 칼리오페
에우리디케의 손목을 잡고 왔어야 할 손으로 수금을 뜯으며 지상으로 올라온 오르페우스는 일곱 달 동안이나 트라이카 땅의 어느 동굴에 은거했다. 트라이카 처녀들이 오르페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갖은 수를 다 썼으나 그는 에우리디케와의 슬픈 추억에 잠겨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녀들은 화가났다. 드디어 포도주의 신을 섬기는 디오니소스의 축제가 있던 날, 술에 취한 처녀들은 오르페우스를 향해 창을 던져 죽인 후, 몸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머리와 수금은 헤브로스 강에 내던졌다.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수금은 슬픈 노래를 부르며 떠내려갔다. 그의 갈가리 찢긴 몸은 수습되어 레이베트라에 묻혔는데, 그 무덤 위에서 우는 레이베트라 꾀꼬리의 울음소리는 그리스 다른 지방의 울음소리보다 더 아름답다고 전해진다.
제우스는 오르페우스의 수금을 거두어 별자리로 박아 주었다. 오르페우스의 혼령은 저승으로 내려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사랑하는 아내를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지금도 `엘리시온(Elision),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은 저 낙원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고 있다. 오르페우스는 앞서가면서 뒤를 돌아보기도 한다. 하지만 더 이상은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註) 엘리시온(Elision) -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은 영웅들이 보내지는 낙원
전해 오는 이야기- 릴케의 장미 한 송이
시인 릴케가 파리에서 지낼 때였다. 그는 매일 산책을 다녔는데 그가 산책하는 길 중간에는
할머니 한 분이 고개를 푹 숙이고 나뭇가지처럼 마른 손을 내밀며 동냥을 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몇몇 사람이 할머니의 손에 동전 몇 닢을 놓고 총총히 사라지는 것을 본 시인은
어느 날 할머니의 마른 손에 하얀 장미 한 송이를 조심스럽게 쥐어 주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시인을 쳐다보더니 그의 볼에 입맞춘 후 장미를 가지고 자리를 떠났다.
그러고는 한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며칠 후 다시 예전처럼 동냥을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동냥을 하지 않았던 며칠 동안 과연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궁금하여 시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릴케는 "장미의 힘으로!" 라고 대답했다.
릴케가 할머니 손에 쥐어준 장미 한 송이는 단순한 동정이 아닌,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릴케의 이런 마음을 알았기에 할마니는 그의 볼에 입맞추고
며칠을 "장미의 힘으로"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아스센하우젠에 있는 주택
릴케는 1914년부터 1915년까지 이곳에서 지냈다. 거주지라는 것은 릴케의 삶에 있어서
결코 지속적일 수가 없었다. 심한 방랑벽과 정신적 표류는
그의 집필활동을 수시로 중단시키곤 했다.
서울대공원 장미원에서 (2008년 5월)
첫댓글 릴케의 장미詩를 모아 꽃사진과 어우려놓다가 내친 김에 그의 작품 두어 개를 더 조사했습니다.
덕분에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완독할 수 있었는데
길이 관계로 여기에는 일부분만 올립니다.
열심히 조사했는데, 님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