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리옹 근교에서 가톨릭 신자이며 농부인 아버지 ‘마태오’와 어머니 ‘마리 블루즈’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비안네가 어렸을 때는 주로 아버지의 농장에서 양을 치면서 지냈는데, 당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성당과 수도원에서 쫓겨나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빈번했음에도 혁명가들의 눈을 피해 사목활동을 지속하는 사제들의 모습에서 영웅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가족은 먼 곳까지 가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했고, 정식 교육을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무사히 첫 고해성사(1794년)와 첫영성체(1796년)까지 받았는데, 당시 혹시라도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갈까 염려되어 창문을 건초더미로 막고 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종교탄압이 끝나고 교회가 안정을 되찾자 그는 사제가 될 꿈을 안고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다르디이를 떠나 에퀼리 본당 ‘발레’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개인적으로 사제직을 위한 공부를 시작하게 되는데, 기초가 부족하고 수학 능력도 많이 떨어져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특히 라틴어를 어려워했는데, 하루는 8살이나 어린 ‘마티아’라는 학생이 그에게 라틴어를 가르쳐 주고 있었는데, 마티아의 물음에 그가 대답을 못 하자 답답하고 화가 난 마티아는 "이 멍청아!"라며 그에게 소리를 질렀고, 이에 그는 "내가 모자라서 미안해!"라며 오히려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이후로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렇듯 그 자신도 얼마나 머리가 둔한지 알아서 발레 신부에게 늘 "저 그냥 집에 갈게요"라고 말하곤 했지만, 발레 신부는 그가 얼마나 신앙심이 깊은지 알았기 때문에 결코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교육받는 도중인 1809년에는 나폴레옹 군대에 징집까지 당하게 되는데, 원래 신학생으로 등록되어 있으면 면제될 일이었지만 나폴레옹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위해 병사가 더 필요했을뿐더러 몇몇 교구들은 아예 면제를 철회해 버렸기 때문에 징집에 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리옹으로 가게 된 비안네는 입대하지 말자 이틀 후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그 사이 프랑스군은 그를 놔둔 채 먼저 전쟁터로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또다시 군대에 합류하여 로안으로 가던 중 기도하기 위해 성당에 잠깐 들렀다가 또다시 부대 행렬에서 낙오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대 복귀를 돕도록 파견된 한 젊은이를 만났지만, 도리어 그를 르포레즈 산 깊숙한 곳의 탈영병들이 모인 곳으로 데리고 갔을뿐더러 그 자신은 당시 과부였던 ‘클로딘 파요’의 농가 외양간에서 이름까지 ‘제롬 뱅상’으로 바꾼 채 14개월 동안 숨어 지내며 그사이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겨울이 가고 날이 풀리면서 병사들이 탈영병을 수색하러 몰려오자 그들의 눈을 피해 발효된 건초더미 속에 몸을 숨겨 수색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1810년 3월, 드디어 모든 탈영병을 사면한다는 나폴레옹의 칙령이 떨어지자 그는 다시 에퀼리로 돌아가, 1811년에는 삭발례를 치르고 1812년에는 베리에르 소신학교에, 1813년에는 리옹 대신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그러나 모든 수업이 라틴어로 이루어지는 대신학교에서 역시나 학업 성취도가 딸리던 그는 동기들에게 비웃음까지 받으며 결국 퇴학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보다 못한 발레 신부는 개인교습을 하면서까지 다시 대신학교 시험을 보게 했지만, 여전히 문턱이 높아 입학이 좌절되고 맙니다. 마지막으로 발레 신부는 그의 경건함이 조금 모자란 학식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교구에 간절히 청원하게 되는데, 이에 교구에서는 ‘비아네에겐’이라는 감독관을 파견하여 그가 사제로서 자질이 있는지를 평가하게 됩니다. 다행히 시험지는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고, 일단 감독관들에게는 합격점을 받았지만, 주교는 그를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 새롭게 주교가 바뀌면서 그의 신심과 성품을 높게 평가한 ‘시몽’ 주교로부터 1815년 8월 13일 그르노블에서 드디어 공식적으로 사제품을 받게 됩니다.
그가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집전한 고해자 역시 발레 신부였는데, 본래 사제가 된 후에도 고해성사 집전 자격이 유보되어 있었던 그는, 스승 발레 신부의 피나는 노력 덕분에 그렇게 온전한 사제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워낙에 힘들게 사제서품을 받아서인지, "훌륭한 성직자가 되는 방법은 훌륭한 신학생으로 사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은 현재 가톨릭 신학생들의 좌우명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후 그는 발레 신부가 있는 에퀼리 성당에서 2년 동안 보좌 신부로 생활한 뒤 1818년에는 230여 명의 주민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 아르스의 본당신부로 부임하게 됩니다. 아르스는, 신자 모두가 세례성사를 받긴 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후유증으로 주민들 모두가 신앙생활에서 멀어져 있었는데,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때도 있었으며 그 시간에 다들 들판에 나가 일하거나 술집에 모여 술을 마시며 놀고 있을 만큼 심각한 상태의 마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내와 기도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는데, 온종일 고해소에서 기도로 시간을 보내며 어쩌다 고해소를 찾는 신자들에게 술과 놀음을 멀리하고 예전의 참된 신앙인으로 돌아올 것을 부탁하곤 했습니다. 그의 노력이 결실을 보기 시작한 것은 주민들이 그런 신부의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였는데, 물론 처음에는 고지식하고 타협이 없는 신부의 행동을 험담하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하나둘씩 교회로 돌아오던 주민들은 그가 부임한 지 8년 만에 모두 신앙심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런 그의 노력으로 아르스 마을의 종교적인 분위기가 일신되면서 그 또한 설교자와 고해신부로 대단한 명성을 얻게 되는데, 1827년 무렵부터는 수천 명의 고해자들이 그에게 성사를 받기 위해 아르스를 찾아오더니 머지않아 매년 2만여 명의 신자들이 그를 찾아 작은 산골 마을로 몰려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전 11시에 강론을 한 뒤 성무일도와 식사, 특별한 상담 시간을 제외하고는 매일 새벽부터 저녁때까지 잠자는 몇 시간을 빼고는 모든 시간을 고해성사에 주력했는데, 그러나 그런 그의 모습에 동료 사제들은 그를 무식하고 지나치게 열성적이며 허풍선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당시 ‘시몽’ 주교는 “저 신부만큼이나 모두 미쳤으면 좋겠다!”라며 오히려 그를 옹호했다고 합니다. 그의 성품은 지극히 단순하였고 충고는 간단명료하였으며 신심이 차고 넘치는 직선적인 설교를 하기로 유명했는데, 순례자들의 소란과 끊임없는 고해성사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후 그는 단지 세 번 아르스를 떠났는데, 그것은 모두 수도원에 잠시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이미 살아있는 성인으로 추앙받던 그는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키곤 했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이 일으켰다고 알려진 이야기를 숨기며 겸손해했습니다. 그는 배우지 못한 소녀들을 위하여 프로비당스 여학교를 개설한 후 신자 중에서 몇 사람을 교사와 식사 담당으로 선발해 학교를 운영했는데, 한번은 밀가루가 떨어지고 살 돈도 다 떨어져 아이들을 내보내야 할 처지에 이르게 되자 그가 다락방으로 올라가 바닥에 흩어진 밀알을 모은 뒤 프랑스의 선교사이자 신부였던 ‘성 요한 프란치스코 레지스’(1597~1640년)의 유해 위에 낱알을 놓고 기도하자 잠시 후 질 좋은 밀이 다락방 바닥에 넘쳐나도록 채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날은, 밀가루가 한 줌밖에 없어 24명이 먹을 빵이 부족해지자 음식 조리를 담당하는 ‘자네’에게 "밀가루 속에 누룩을 넣고 다음 날 반죽하라."고 지시했는데, 이튿날 ‘자네’가 반죽을 시작하자, 통이 넘칠 정도로 반죽이 커져 빵을 10개나 구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하루는 지하실에 보관한 포도주 통이 새는 바람에 통이 빈 걸 ‘자네’와 ‘빌리아’ 자매가 발견해 그에게 알리자, 신부는 "포도주가 달아나는 걸 허락하신 분께서는 포도주가 돌아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자매에게 바닥에 고인 포도주를 긁어모아 빈 통에 부으라고 지시했는데, 다음날 보니 작은 두 통밖에 되지 않던 포도주가 평소에 마시던 것보다 더 좋은 포도주로 바뀌어 큰 통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또 점심때 신부가 호박 한 접시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면서 조각을 너무 크게 썰자, 교사였던 ‘카타리나 라사늬’는 "그러다 호박이 부족할지도 모릅니다!"라며 걱정했는데,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큼지막하게 썰어 아이들에게 충분히 나눠주고도 접시에 호박이 조금 남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오병이어’의 기적 외에도 치유와 관련된 기적 또한 부지기수로 많아 중병에 걸린 사람을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종양에 손을 대자 곧바로 종양이 사라지는 일도 있었고, 걷지 못하는 소년에게 "다음 날부터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자 신부가 말한 그대로 이뤄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 중에는 증인들의 확인서를 통해 사실로 드러난 것도 있다고 전해집니다.
서기 1859년 7월 29일, 무려 17시간이나 고해성사를 집전한 그는 사제관으로 돌아와 "저는 더 이상 못합니다." 하고 외친 뒤 쓰러졌으며, 닷새 뒤인 8월 4일 새벽 2시에 73세의 나이로 선종하였습니다. 그가 숨을 거두기 전, 마을 사람들은 무더운 날씨에 신부의 마지막을 시원하게 만들기 위해 지붕 위로 찬물을 부었으며 그가 숨을 거두자 마을 사람 전체가 울었다고 전합니다. 그의 유해는 얼굴을 밀랍 마스크로 덮은 상태로 아르스 대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 사실 아르스의 성당은 허름했지만, 그가 자신의 소유물을 모두 포기하는 대신 성당을 예쁘게 꾸미는 데에 열성적이어서 보수도 많이 하고 규모도 많이 키웠다고 합니다. 지금도 아르스 성당에 가면 유리관에 모셔진 비안네 신부의 유해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1874년 10월 3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로, 1905년 1월 8일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로, 그리고 1925년 5월 31일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으며, 1929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본당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나무위키 백과사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도 성 마리아 비안네 신부의 성유물 일부가 보관되어 있는데, 가로세로 각 2cm의 작은 옷 조각으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출생지인 충청남도 당진시의 솔뫼성지(천주교 대전교구)에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