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정읍에 다녀왔습니다. 그때 백정기 의사의 기념관을 보고 참배한 바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012년에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 인연을 디딤돌 삼아 짤막하게 백정기 의사의 소개글을 쓰고자 합니다.
(백정기 의사에 관한 책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백정기 기념관의 팜플렛 글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다음에는 꼭 책과 자료를 보고 제대로 작성하고 싶네요. )
백정기 의사는 1896년에 부안에서 태어났고, 소년시절에 정읍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정읍출신으로 알려져있었고, 기념관도 정읍에 지어졌죠. 아마 본인도 스스로를 정읍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태어난 곳은 부안입니다.)
1914년에는 일본 순사가 동네 여자를 희롱하는 것을 보고 분에 못이겨 폭행했다가 일본 경찰 폭행 및 유괴죄로 처벌받았습니다. 이때가 우리나이로 하면 19세였을 때였습니다.
이후 서울에 상경하여 공부하려고 했다가, 1919년 3.1운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에 독립운동을 위해 직접 국내의 일본군 시설물을 파괴하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여 만주로 도피하였고, 자금모집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1920년에 체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북경으로 간 백정기는 그곳에서 이회영, 신채호 등을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해나갑니다. 이 무렵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회영, 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즘으로 전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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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아나키즘이란?
아나키즘이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될 만큼, 오래되었으나 근대사상의 맥락에서 살피면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유주의에서는 대체로 인간을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로 인식하며, 따라서 경제적으로는 인간의 자유로운 이익추구를 긍정하고, 이익추구와 무한경쟁에 의해 인류가 발전한다고 믿습니다. 이에 자본주의 경제를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면서, 국가는 이런 자본주의 경제를 어지럽히는 세력에 대한 처벌만을 수행하게 합니다. 즉, 치안과 국방을 중심으로한 이른바 '야경국가'라면 충분하다는 것이죠.
공산주의는 여기에 반대하여 무한한 이익추구가 가져온 재앙을 경계하는 동시에, 이런 무자비한 경제체제를 가져온 자본가들에 대항하여 무산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국가를 장악하고, 국가의 강제력을 이용하여 새로운 사회체제를 수립하려고 했습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자유주의를 불신하는 동시에 각 인간 개인에 대해서도 불신을 가지고 있어서, 현실에서의 공산주의는 개인에 대해 국가기구를 이용하여 억압하였습니다.
아나키즘은 자유의 이름으로 이 두 사상을 모두 비판합니다. 아나키즘은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인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에서 주장하듯이, 인류의 발전은 인간의 무한경쟁이 아니라 상호부조, 즉 상호협력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원래 협력을 추구하는데, 자본주의 등 인간을 경쟁으로 내모는 경제체제를 무너뜨려야 인류의 본래의 본성인 자유와 협력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성이 기본적으로 협력을 추구한다는 등 어찌 보면 성선설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들이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도록 하면 스스로 협력할 수 있는 체제를 잘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국가기구를 통해 인간을 억압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가려는 공산주의측과도 격렬하게 대립했습니다. 아나키즘은 보통 '무정부주의'라고 번역되지만, 실제 그 내용은 '자유연합주의'에 가깝습니다. 인간들을 자본주의와 국가로부터 해방시켜 스스로 협력할 수 있는 체제를 (보통 소규모 공동체들) 자유롭게 구성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제가 생각하는 아나키즘이므로 정확도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혹 저보다 더 많이 아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수정, 보완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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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아나키즘을 자신의 주된 신념으로 믿는 사람. 무정부주의자, 자유연합주의자 로 번역할 수 있음.)가 된 백정기는1924년에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 연맹' 창립에 기여하고, '정의공보'라는 기관지를 발행했으며, 1928년에는 '동방무정부주의자 연맹'에 참가하였습니다.
이어 1931년에는 한국, 중국,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이 모여서 만든 '항일구국연맹' 휘하의 아나키스트들의 테러조직인 '흑색공포단'의 책임자가 됩니다. ( 아나키즘은 기본적으로 국가를 배격하고 인간의 자유로운 연합을 추구하는 사상이었으므로 민족주의적 지향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국제주의적인 기질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흑색공포단에도 2명의 일본인이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
1932년 4월에 윤봉길의사가 홍커우 공원의 의거로 일본군 대장을 즉사시켰고, 일본공사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그는 평생을 다리를 절게되었고, 그래서 일본이 미국에 항복할때 일본대표였던 그가 다리를 절면서 항복서명을 하러 가는 영상이 찍히게 되었습니다.)
백정기 의사도 그러한 의거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1933년에 또 다른 일본공사가 상해 홍커우에 있는 일본 요정 육삼정(六三亭)에서 연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에서 일본공사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하여 동지 2명(원심창, 이강훈)과 함께 그곳을 습격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밀정(흑색공포단에 가담한 2명의 일본인 중 1명이 밀정이었습니다.)에 의해 이 거사가 이미 알려진 뒤였고, 결국 백정기 의사와 다른 2명의 동지까지 모두 체포되었습니다.
체포된 백정기 의사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어 일본의 감옥에 갖혀있다가 1934년 6월 5일에 사망하셨습니다.
해방이후 김구선생이 3의사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유해를 모셔와서 지금의 효창공원에 모셔오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중에 아나키스트들로서는 이회영선생, 신채호선생 등과 함께 백정기의사가 그나마 잘 기념되게 된 것은 김구선생이 이때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 함께 모셨기 때문이지는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해방이후 아나키즘운동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만큼 세력이 약했고, 따라서 아나키스트들을 기념하려는 움직임도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자유인 이회영'에 나온 백정기 의사 캐릭터에 대한 설명. 최근 이회영선생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지면서 그와 함께 활동한 백정기 의사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다.)
백정기 의사의 여러 말씀들이 남아있는데, 몇가지를 올려보겠습니다.
"나의 구국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평화위에 세계 일가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공생공사의 맹우 여러분 대륙침략의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주시오. 겨레에 바치는 마지막 소원을..."
이 말은 육삼정의거를 결의하면서 남긴 말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그의 사상이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나키스트였지만 기본적으로는 한국의 독립을 목표로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에게 아나키즘은 한국 독립운동의 방법이자, 독립된 한국이 추구해야할 이상적인 정치사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목표는 전세계에서 인류의 선한 본성을 억압하는 독재자들을 타도하여 인류전체가 자유와 평화 위에서 공존하는 이상적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강대국들이 제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하는 상황에서 '평화'의 이상은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폭탄과 테러, 즉 '몰살'이라는 방법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죽기 며칠 전 자신의 동지들인 이강훈, 원심창에게 이런 유언을 남깁니다.
"나는 몇달을 더 못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제들은 자중자애하여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송스럽고 한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표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돌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송이를 무덤위에 놓아주기 바란다."
백정기 의사는 독립과 아나키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읍니다. 오히려 함께 갇힌 동지들이 흔들릴까봐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굳게 간직하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어머니(아버지는 1908년에 사망)에 대한 죄스러움과 자신의 유골이 해방된 조국에 묻힐 것을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백정기 의사는 윤봉길 의사처럼 거사에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거사의 성공여부에 상관없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투쟁했습니다. 감옥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켰습니다. 해방 70년의 광복절의 날이 저물었지만, 그분의 투철한 신념과 의지는 아직도 짙은 여운을 남깁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