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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소리 문인수 적막도 산천에 들어 있어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적막도 복받치는 것 넘치느라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새소리 매미소리 하염없는 물소리, 무슨 날도 아닌데 산소엘 와서 저 소리들 시끄럽다, 거역하지 않는 것은 내가 본래 적막이었고 지금 다시 적막 속으로 계속 들어가는 중이어서 그런가, 그런가보다. 여기 적막한 어머니 아버지 무덤가에 홀로 앉아 도 터지는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소주 몇잔 걸치니, 코끝이 시큰거려 냅다 코풀고 나니, 배롱나무꽃 붉게 흐드러져 왈칵! 적막하다. 내 마음이 또 그걸 받아 그득하고 불콰하여 길게 젖어 풀리는 저 소리들, 적막이 소리를 더 많이 낸다. 또 그 소리에 그 소리인 부모님 말씀, 새소리 매미소리 하염없는 물소리..... 적막도 산천에 들어 있어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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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탐구>
올 / 박지혜
소금 헝겊을 들고 소금 가마니는 아니고 올이 굵은 소금 헝겊을 들고 소금 가마니는 아니고 이런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닌데 그렇지만 도무지 다른 말을 하기가 어렵고 시작은 아무거나 하면 되고 소금 할아버지는 눈이 멀고 눈먼 눈 속 소금 사막이 들어가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고 도대체 말해 본 적 없는 시간은 너에게 들어가고 소금 헝겊 소금 가마니는 아니고 아직도 다른 말을 하지 못하지만 시작은 아무거나 하고 너는 소금 사막을 보여주었지만 나는 소금 사막이 보고 싶다고 중얼거리고 이런 건 말이 되지 못했고 그래도 말이 되지 못한 말들로 움직였고 여전히 버석거리는 말들은 소금 헝겊을 들고 올이 굵은 소금 헝겊을 들고
“시작은 아무거나 하면” 되기에 정말 아무렇게나 뱉어낸 말이라는 듯, 화자는 “소금 헝겊”과 관련한 이야기가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못을 박으면서 시를 연다.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에 매몰된 사람처럼 화자는 횡설수설 문장을 잇고, 읽는 이들이 따라가기 힘든 간격으로 의미들이 배치된다. 독자는 할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 뒤에 감춰진,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데 집중한다. 그런데 자꾸 “소금 헝겊”이 튀어나온다. 의도적으로, 매우 자주 반복되는 이 단어는 독자들의 시선과 집중을 끌어당긴다. 시인은 의미가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눈먼 “소금 할아버지”나 “소금 사막”처럼 하고 싶은 말을 보여줄 것 같은 시어들 사이에 “소금 헝겊”을 반복적으로 삽입하여 의미를 연결해 낼 수 있는 지점을 끊어내는 것이다. 흩어진 시어들이 굵은 올처럼 얼기설기 시를 짜 올리고, 독자들은 그 틈을 메우려 시도하지만 모호한 이미지와 반복구를 아우르는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다. 그때 눈에 띄는 것이 바로 “그래도 말이 되지 못한 말들로 움직였”다는 화자의 진술이다. 그것은 「올」 자체에 대한 화자의 평가다. 「올」은 시어들을 따라 연결되는 의미들의 간격이 발생시키는 리듬에 의해 시가 된다. 의미 자체가 아니라 의미를 조작하는 기표가 텍스트를 견인하고 있다. 의미를 건조하다 무너뜨리고 다시 건조하다 무너뜨리는 그 리듬이 바로 「올」이 시가 되는 지점이다. 이처럼 의미보다 기표를 앞에 두고 시를 읽을 때 박지혜 시인의 작품들은 빛을 내기 시작한다. (김동진)
핑크문 / 박지혜
핑크문은 분홍문이거나 분홍달이거나 무엇이지 그렇다고 분홍문이나 분홍달이 핑크문이 되는 건 아니야 외로운 핑크문은 입이 사라져 말을 하지 못하고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시간을 떠돌고 영원이란 이런 것일까 생각했다 영원에 대해서는 흰빛 속으로 들어간 그림자에게 물어보면 된다 영원과 흰빛에 고유한 감각을 가진 핑크문은 누군가 영원을 물어봐주기를 흥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은 흥분한 분홍문이 되어야지 흥분한 분홍문 흥분한 분홍문 흥분한 분홍문의 결정체가 되어야지
「핑크문」 역시 마찬가지다. 풀리지 않는 시어들과 정황들이 가득하다. 눈에 띄는 것은 화자와 대상의 거리감이다. “외로운 핑크문은 입이 사라져 말을 하지 못하고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시간을 떠”돈다는 “핑크문”에 대한 서술은, 화자가 겉으로 드러나는 핑크문의 특성을 관찰하며 기술한 문장이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영원이란 이런 것일까 생각했다”는 다르다. “핑크문은 누군가 영원을 물어봐주기를 흥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서술로 미루어볼 때, ‘영원이란 이런 것일까’ 생각한 주체는 화자가 아니라 관찰 대상에 자리하고 있던 핑크문이다. 그런데 어떠한 인용 표지도 없이 화자는 그것을 자신의 문장 안에 삽입하고 있다. 마치 순간적으로 기존의 화자와 핑크문이 결합되어 복수 주체가 되는 듯한 모습이다. 흔들리는 발화 주체는 이어지는 문장들의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영역으로 이동시킨다. “흥분한 분홍문”이 되겠다는 문장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핑크문을 관찰하던 화자인지, 또는 핑크문인지 아니면 그 둘을 모두 포함하는 복수 주체인지 불명확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의미의 혼란이 가중된 뒤에 “흥분한 분홍문”이 반복된다.
“흥분한”과 “분홍문”의 반복에서 독자들은 ‘분’의 반복과 앞뒤로 배치된 ‘흥’과 ‘홍’이 갖는 발음의 유사성을 감지하며 문자 자체의 특성을 환기하게 된다. 문자와 연결된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본래 특정한 소리를 시각화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다. 반복되는 어구에 증폭되는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의미를 기표 밖으로 밀어낸다. (김동진)
* 박지혜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0년 『시와 반시』로 등단했다. 시집『햇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