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서원 중수에 대한 소감(所感)
제가 황희를 모시는 풍계서원을 보고 장수황씨집성촌이고 황희 부모와 처자식이 살았고 유배온 지역인데 장수황씨라는 성씨가 이렇게 형편없는가? 생각했습니다(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힘이고 위상이기에 결국은 돈이 있어야 하는데 대동서원 중수에 동원할 돈이?).
강당만 풍계서원 현판이 있고 사당, 내삼문, 동재, 외삼문의 이름 현판이 없는 것을 보면서 지금까지 대동서원은 관암선생때 사당, 내삼문, 강당 이름 현판이 있고 앞으로 더 건축할 경사재 현판까지 걸어놓았고 대동사 중수 공사하면서 보니 당시 최고 기술자와 최고 자재를 사용하여 사당을 건축했고 유림과 함께 최고 예우로 제사를 지냈는데…………
1964년 대동사에서 시작하여 차류대종회가 창립되면서 차문입장에서 보면 시조 차무일 38세손 류차달은 자기들 득성시조 차효전보다 경시하여 조선 후기 유학자 보다 못한 대우로 향사를 지낸 것이기에 1964년 이전에는 유림들이 대승공 찬양글을 쓰고 헌금을 냈는데 1964년 이후 차문이 들어오면서 유림들에게 돈을 주어 가면서 제사를 지내 달라고 한 꼴이 되었습니다(2007년 차류대종회는 양문합의로 해체됨).
이제 대동사 중수 사업이 완성되면 대동서원 원장이 필암서원처럼 돈을 내면서 서로 대동사원장을 하려고 해야하며 기관장들이 공물을 내면서 헌관을 하려고 하도록 후손들이 스스로 대승공 위상을 높혀야 합니다.
후손이 되어 가지고 고려 개국공신 외에 무슨 공적이 있으며 유학자가 아니다라고 하는 후손이 있는데 고려 개국공신 1,2 등 17명중에 시호가 없는 분은 5명으로 대승공, 이도(전의이씨시조) 함규(양근함씨시조) 홍규(홍주홍씨시조) 왕희순(왕건당질)인데 3등공신인 권행(안동권씨시조)는 안동태사묘에 김선평 장길과 함께 유림들이 모시지만 이들 역시 유학자는 아닌데 대승공만 유학자가 아니라고 자기 시조를 비하 하면 안됩니다.
참고로 불교국가인 고려 6대왕 성종 때부터 개국공신에게 시호를 내리고 태조묘(太祖廟)에 최응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유금필을 모셨고 권행 김선평 장길은 안동 태사묘(太師廟)어 모셨는데 이들 모두 유학자가 아닌데 묘정배향(廟庭配享)을 했고 현대는 시호가 없는 분은 호로 자손이 있는 개국공신 모두 묘정배향을 하는데 대승공은 서원묘정(書院廟庭)으로 선조들이 대동서원을 등록해 주었는데 후손들이 대동서원의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게 문제입니다(고려 3대왕 정종 때 반란이 많아 왕조가 위태롭게 되어 개국공신이 3200명으로 늘어 납니다).
류인석(1859~1931,고종조 유학자) 는 서산 자미의 15대손이며 농산 하영의 아들로 “서산선유고”를 간행하셨고 1918년 충현각을 지어 서산선생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하였으며 사후 유림들이 1957년 대산사(大山祠)를 창건하여 면암선생을 주벽으로 공을 배향하였습니다. 아들은 동열입니다.
동열에 이어 상열(1880~1962) 선생은 충현각에서 강학을 하셨고 “관암유고”가 있습니다. 충현각에 관암 강학기념비를 대동서원에 이전하면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이 확보되어 금상첨화인데 서산공 후손들의 선택이 변수입니다.
이 나무는 대동사 입구에 있음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