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수행(修行)이란>
수행(修行)이란 행(行)을 닦는다는 뜻이다.
대승불교에서 수행은
무상(無常)ㆍ
고(苦)ㆍ
무아(無我)의 세 가지 성품[삼특상(三特相)]을
철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육바라밀(六波羅密)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불교 수행방법은 크게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ā)로 구분되는데,
이 두 용어는 일찍이 중국에서 각각 지(止)와 관(觀)으로 번역됐고,
전자는 집중(samādhi)인 정(定)을 닦는 집중수행을,
후자는 통찰지혜(paññā, 반야)인 혜(慧)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수행에서 행(行)이란 자아의식을 중심으로 한 사유의 흐름을 주도하는 의지작용이고,
행을 닦는다는 것은 의지작용에 따라 번뇌의 상속을 더 이상 지속시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모든 종교에 있어서 수행의 공통점은 집착하지 않고 놓아버리는 것[방하착(放下着)]이다.
그런데 진정으로 수행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꼭 집어서 이야기할 거리가 없다
. ‘그냥 눈 딱 감고 앉아 있는 것이 수행인가?’
‘그렇다면 절구통은 잘도 앉아있으니까 그것도 수행인가?’
그렇지 않다. 앉아 있는 것이 수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염불소리를 잘 내고 있으면 수행인가?’
녹음기를 틀어 놓으면 소리가 더 잘 나온다.
불교에서 제일 자랑으로 삼는 것은 불교에 수행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걸핏하면 수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확실한 답이 없어, 무엇이 수행인가를 이론적으로 정립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수행인가?
일단 종교적 신념에 따른 일상적 수련을 수행이라 한다.
즉, 자신의 마음작용과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해탈로 나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절대적 인격을 이루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는 것을 수행이라 한다.
그런 수행을 열심히 할 경우,
우리나라 선방에서는 치열하게 수행한다 해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이라 한다.
그러나 남방불교 국가인 미얀마에서는 수행을 달리 생각하는 것 같다.
올바른 수행을 위해서는 타국의 사례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나라 스님들이 미얀마에 수행하러 가서 너무 열심히 수행을 하니까
그곳 고승(샤아도)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희는 전투하러 왔냐?”라고 했단다.
앉아서 좌선을 하는데 그렇게 살기가 번뜩이게 하느냐 하는 말이다.
“코리아에서 영화 구경 안 해봤냐? 그래, 다들 영화 좋아하잖아,
그 영화 볼 때도 극장에 그렇게 살기등등해서 들어가나?
수행이라는 것도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우리가 영화 볼 때 긴장하고 보지 않는다.
뭔가 이빨 뽀드득 뽀드득 갈면서 안 본다는 말이다. 편안하게 본다. 수행도 그런 거란 것이다.
수행이라고 하는 거는 뭔가를 극복하는 게 아니라 즐겁고 재미있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선 수행에 대한 기본개념에 대한 이해부터 남방불교와 다르다.
불교수행은 개념과 직관, 경험, 이 세 가지를 통합하는 것이다.
불성상청정(佛性常淸淨)이라 해서 불성(佛性)을 찾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찾아야할 불성이 어디 있느냐?
마음과 다른 어떤 불성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마음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경험이 결합된 것이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미얀마의 수행법은 우리와 한참 다른 것 같다.
말을 바꾸어서, 수행은 그에 앞서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천태대사 지의(智顗, 538-597)는 득선지식(得善知識)이라 해서
수행을 지도해줄 선지식을 찾아야 하는 것 등 25방편(25方便)을 제시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있어서 수행은 역시 맹렬한 정진에 있다.
그리하여 관법ㆍ위빠사나ㆍ염불ㆍ간경 등의 수행을 하려면
마음 자세가 위법망구(爲法忘軀-법을 위해 몸이 망가지거나
목숨이 위태로운 것까지 피하지 않는 정신)의 정신을 가져야지
하루 품팔이 하는 식의 정신 자세로는 도저히 어찌 될 일이 아니다.
이번 생에 반드시 해결하고 말겠다는 마음, 기어코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그런 결연함으로 임해야 함이
우리나라에서의 수행 모습이다.
그리고 공부에 있어서 교리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되는 부분이지 수행이 아니다.
교리는 수행을 위한 이정표를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다. 교리를 안다는 것은 다만 지식일 뿐이다.
밥 이야기로 배가 불러 올 일이 만무하고, 수박에 관한 논문을 아무리 잘 써도 거기에는 수박의 맛이나
그 어떤 부스러기 하나도 없다.
결론은 참선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이 화두(話頭)을 의심하는
소위 간화선(看話禪)이다. 그리고 다른 것은 필요 없고, 다만 믿음이 문제이다.
이 화두만 깨달으면 부처를 이룬다는 철저한 믿음만 있으면 시작할 수가 있다.
승속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든지 참선의 원칙은 특별한 자세가 없다.
다만 끊이지 않고 간절하게 화두를 의심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
물론 좌선을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다.
그리고 불교수행의 완성은 지혜의 성취와 자비의 실천이다.
그러면 수행에 대한 미산 스님의 법문을 들어보자.
「수행을 할 때 현재의식 상태에만 머물러 가지고는 깊은 곳까지 못 들어간다.
하지만 화두를 들거나 진언ㆍ염불을 하면서 전의식을 거쳐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면
그 안에 어마어마한 양의 함축된 정보가 내장돼 있다.
이런 여러 정보들 중에 신ㆍ구ㆍ의 삼업으로 지은 업의
부정적인 종자들이 많을수록 이것들이 현재의식이 되면서 정화가 일어난다.
수행 체험을 한 사람은 몸으로 체득한 일이기에 금방 이해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축적돼 있던 업(業)이 맨 먼저 몸으로 나오는데, 엄청나게 많다.
취착이 얼마나 우리 삶을 힘들게 하는지 이걸 통해 알 수 있고,
취착을 버리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견해(見解)에 대한 취착,
이것은 지적 사유를 많이 하는 사람들의 경우 아주 강하다.
예를 들면, 교수들은 견해와 주관이 굉장히 분명하다.
이게 학문 활동을 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수행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무척 큰 방해가 된다.…
그리고 미세하게 잠재된 망상과 번뇌는
수다원도(須陀洹道)나 수다원과(須陀洹果)에 들어가야 비로소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들은 잘 안 되는 것이다. 다 약한 존대들이니까.
그리고 내 몸이 있다는 집착, 이것을 유신견(有身見)이라고 한다.
자아에 대한 집착은 성자(聖子)의 지위에 들어가야 비로소 떨어진다고 한다.
이런 취착심 때문에 계속 윤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행은 불교의 이상계에 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불교수행의 범주에 대해 정확하게 정의 내리기란 쉽지 않다.
팔정도(八正道)ㆍ
육바라밀(六波羅蜜)ㆍ
십선행(十善行)ㆍ
사무량심(四無量心)ㆍ
사섭법(四攝法)ㆍ
삼심칠조도(三十七助道) 등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수많은 방편을 수행으로 본다면 수행의 범주는 대단히 넓다.
하지만 불교수행을 논한다면 정학(定學)과 혜학(慧學)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정학과 혜학은 모든 불교수행의 근본이다. 그러나 정학과 혜학을 수행하는데 있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초기불교건 대승불교건 정혜를 중심에 놓고 있는 것은 같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에서 언급하지 않는 많은 방법들을 권장한다.
초기불교에서 정학과 혜학은 별개의 수행법이었다.
정학은 삼매를 얻는 방법이고
혜학은 지혜를 얻는 방법이다.
삼매를 얻는다고 해서 지혜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삼매보다는 지혜를 수승하게 보는 초기불교로서는 삼매는 지혜를 얻기 위한 전 단계의 수행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정학을 닦는 도중 삼매가 지혜로 전환돼 열반을 성취하는 예가 많이 등장한다.
수행체계에 있어서 정학과 혜학이 분리되고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삼매를 얻기 위해 소개되는 수행법은 지ㆍ수ㆍ화ㆍ풍ㆍ허공 등을 떠올리는
까시나(빠알리어 kasina) 수행, 시체를 떠올리는 부정관(不淨觀)을 비롯해 대략 40여 가지 정도이다.
수행자는 수행 주제 중에 하나를 택해 계속적으로 마음속에 떠올린 다음, 표상을 얻고 그 표상이
높은 차원의 선정 단계로 나아가도록 집중한다. 그리고 수행자는 이런 삼매에서 얻어진 평정의 힘으로
몸과 마음을 직접적으로 관찰하는 혜학을 닦아나간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정학과 혜학을 뚜렷하게 분리하고 있지 않다.
정혜쌍수(定慧雙修)라 해서 정과 혜를 함께 닦는 법을 말하고 있다.
또 초기불교에서 정과 혜가 열반을 이루는 수단인데 비해 대승불교에서는 정과 혜는 열반 안에 수반되어지는
경지 그 자체다. 초기불교가 정혜와 열반을 분리하고 있는 반면 대승불교는 정혜와 열반이 다른 경지가 아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삼매를 깨달음과 열반을 대신하는 용어로 삼고 있다. 초기불교의 근접삼매(近分定)니
본삼매(根本定)니 하는 용어들은 열반을 이루기 전 수행의 과정에서 얻어지지만, 대승의 삼매들은
수행과정과 함께 열반에서도 얻어진다.
이를테면 대승불교의 경전에 따라 소개하고 있는 해인삼매(海印三昧)니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니
금강삼매(金剛三昧)니 하는 용어들은 모두 부처님이 이루신 경지 자체를 나타내는 말들이다.
지나칠 수 없는 점은 대승의 이러한 삼매들이 대승의 주된 사상인 불성(佛性)과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중생들의 불성 안에는 본래부터 정과 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정혜는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고 깨달음과
열반을 성취할 때에 비로소 드러난다. 대승불교에서 삼매를 얻기 위해 소개되는 방법은 초기불교에서
권하고 있는 40여 가지의 주제와는 별개의 방법들이다.」 - 이제열 법사
그런데 초기불교를 논한 「<청정도론>에서는 부처님께서는 출입식념(아나빠나사띠, Ānāpānasati,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격찬을 하고 있고, 이 출입식념(出入息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세존 당시에도 수많은 스님들이 출입식념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도(道)와 과(果)를 얻었다.
이렇게 수행방법과 명상주제는 벌써 그 사람의 기틀에 따라서 부처님 당시부터도 다양하게 가르쳐진 것이다.
그러므로 북방의 간화선이나 묵조선 나아가서는 염불선까지, 아니 염불이나 기도나 주력까지도, 그리고 남방의 위빠사나와 사마타 기법은 물론이고 이 모든 수행법들이 불교의 가르침 체계에 튼튼히 뿌리한 수행법이라면 자기에 맞는 방법을 택해서 열심히 정진하면 된다. 거기서 오는 문제점은 여러 경들이나 논서들을 보면서 점검하고
널리 다른 수행하는 분들과 함께 진지하게 탁마하면 된다.
<청정도론>에서도 벌써 40가지로 명상주제를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절에서 일상으로 행하는 염불, 기도, 간경, 축원 보시 등의 모든 실천이나 수행이나 의식이 이 40가지 안에 다 포함된다고 본다.」 - 각묵 스님
다음은 <성철 스님의 “공부인에게 주는 글”이다.>
안으론 가난을 배우고 밖으론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 수행이다.
분노와 미움을 가지고는 싸움에서 이긴다 해도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상대로 싸움과 살인을 한 것과 같다.
진정한 승리자는 자기 자신의 분노와 미움을 이겨낸 사람이다.
자신은 예쁘게 만드는 사람은 세월이 가면 추해지지만
남을 예쁘게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빛나리.
용서는 단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를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 놓아 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풂은 가장 큰 베풂이자 사랑이다.
두려워할 일이 없는데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데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다.
왼손은 아버지 손 오른손은 어머니 손
탐욕이라는 이름의 아버지와
무지라는 이름의 어머니가 결함하여 내 몸이 되었구나.
나 이제 불법을 만나 지혜의 아버지와 자비의 어머니를
하나로 받들어 온전한 보살의 길을 걸어가리라.
꽃 중에 꽃은 웃음꽃 미소에 에너지는 사랑의 물로 샤워를 할 것이다.
입속에는 말을 적게
마음속엔 일을 적게
위장에는 밥을 적게
밤에는 잠을 적게
이 네 가지만 적게 해도 그대는 곧 깨달을 수 있다.
네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나는 너에게 가난을 주리라.
빛나는 금관보다도 반짝이는 보석 목걸이보다도
무엇으로 바꿀 수 없는 사랑보다도
빛도 모양도 없는 타고 남은 재까지도 없는
이 간난을 너에게 주기 위해
나는 너에게 눈을 깜빡여 보리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행
그리고 고통 모두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해결도 나에게 달렸다.
번뇌와 죄업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는 것 하나뿐이다.
부모 된 사람의 가장 어리석음은 자식을 자랑거리로 만들고자 함이다.
부모 된 사람의 가장 큰 지혜로움은
자신의 삶이 자식들의 자랑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수행이란 안으론 가난을 배우고 밖으론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다.
어려운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일이다.
용맹 가운데 가장 큰 용맹은 옳고도 지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으면 위에서 수행에 관한 말들이 너무 초라하게 보인다.
백 마디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