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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선(如來禪)>
여래선이란(여래라는 말이
부처님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부처님이 가르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선이다.
즉, 여래선(如來禪)이란
‘여래의 말씀’ 즉 ‘부처님께서 설한 경전에 의거, 수행해서 깨닫는 선’이라는 뜻이다.
또는 여래가 깨달은 경지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다른 말로는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
‘최상승선(最上乘禪, 최고의 선)’이라고 한다.
이러한 여래선은 <능가경(楞伽經)>, <반야경(般若經)> 등 여래 교설에 따라 깨닫는 선을 가리킨다.
이 시기는 대개 석존으로부터 달마 대사 이전까지를 가리킨다.
이를 여래선이라고 하는 것은 석존으로 부터 직접 전수 받은 수행방법이 계속해서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래선은 '여래의 가르침에 의한 선'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마음이 본래 청정해 번뇌가 없으며,
중생은 누구나 최고 지혜인 무루지성(無漏智性)을 갖추고 있고,
또 이 마음이 본래 부처(진리)와 다름없다는 이치를 믿고 깨닫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 경지와 관점, 목표, 지향하는 바는
조사선(祖師禪),
묵조선(黙照禪),
간화선(看話禪)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여래선, 조사선에 대한 구분은 육조 혜능(慧能, 638~713) 때까지는 없었다.
혜능 계통의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의 문하에서 종래의 선(禪),
특히 북종선과 차별화하기 위해 조사선(祖師禪)을 내세우면서 시작된 것이다.
한편 이것은 혜능의 남종선에서 자파(自派, 조사선)가 월등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종래의 선을 여래선, 의리선(義理禪)이라고 격하하고 자파의 선(禪)인 조사선을 우월한 위치에
놓고서 차별화를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선학(禪學)에 알려진 여래선(如來禪) 용어의 기원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1 앙산 혜적장(仰山慧寂章)에서,
앙산 혜적(仰山慧寂, 803~887)이 사제(師弟) 향엄 지한(香嚴智閑, ?~898)이
항상 경전에만 열심인 것이 꼴사나웠는지 앙산이 향엄의 경지를 물었다.
“향엄, 근래 그대의 깨달은 바가 어떠한가?”라고 점검하려하자,
향엄이 말했다. “모갑졸설부득(某甲卒說不得)입니다.”라고 했다.
자기를 겸사할 때에 스스로를 모갑이라 한다.
“제가 졸지에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 뜻인데, 그러고는 게송으로 읊었다.
「작년에 가난한 것은 아직 가난하다고 할 것이 없으나(去年貧未是貧),
금년에 가난한 것은 비로소 참으로 가난한 것이고(今年貧始是貧),
작년에 가난한 것은 송곳을 세울 만한 땅이 없었으나(去年無卓錐之地),
금년에 가난한 것은 송곳마저도 없습니다.」고 했다(今年錐也無).
<전등록>에 수록되어 있는 이 시는 깨달음의 경지를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 혹은 공의 상태로 표현한 지극한 말이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작년에 깨닫고 비로소 주객이 모두 없어진 경지를 체험했다.
다시 말해 무(無)를 체험하고 공(空)을 체험했다.
그러나 마음속에 깨달았다는 희열감 내지 충만감이 꽉 차 있었는데
금년에는 그것마저 사라져버리더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무소득(無所得)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 지안 스님
향엄 스님의 이런 대답에 앙상 스님이 말했다.
“사제는 다만 여래선만 얻고, 아직 조사선은 얻지를 못했네 그려.”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사선과 여래선을 비교해 헤아린 최초의 근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래선’이란 말이 위에서는 마조 도일(馬祖道一) 선사 문하에서 나왔다고 하고,
여기서는 앙산 혜적(仰山慧寂) 선사가 말했다고 한다. 어느 말이 옳은지? 그러나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여래선을 의리선(義理禪)이라고도 한다는데,
의리선이란 학문적 교학적,
또는 언어적 논리적인 방법을 통해 이해하는 선이란 뜻이다.
경전이나 언어문자, 뜻풀이 등에 의존해 이해하는 선이란 뜻인데,
후대에 성립한 조사선과 간화선 쪽에서 폄하하기 위한 의도로 정의한 것이다.
그것은 실참보다 교리에 의거해 이치로 이해하는 선이라고 규정했다
그리하여 문자나 뜻풀이에 얽매여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는 전해지지 않고 우리나라에만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닫기는 했으나 아직 미흡한 경지에 있을 때를 여래선이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다시 진귀조사(眞歸祖師)를 찾아가서 조사선을 전해 받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여래선이 조사선보다 한수 아래라고, 여래선을 폄하하려는 이들에 의해 조작된 이야기로 보인다.
여래선과 조사선을 간결하게 정의한 말이 있다.
“여래선은 팔만사천 법문(法門)이요. 조사선은 오직 일갈(一喝)이로구나!
여래선은 일체중생을 구제하려 하나 조사선은 죽기를 각오하고 달려드는 자에게만
오직 졸탁동시(啐啄同時) 하는구나! 달마가 동토(東土)로 온 후
언제 찾아다니며 장광설(長廣舌)을 했던가, 그게 바로 조사선의 진수가 아니던가!”
대개 인도 계통의 선이 여래선이고,
중국 선이 조사선이다.
여래선은 인도불교 즉 여래장사상을
선(禪)의 입장에서 소화해 자리매김한 용어로서,
여래선을 곧바로 설명하는 핵은,
본래공적(本來空寂),
본래무사(本來無事),
진공(眞空),
절대평등,
불가득(不可得) 등 개별의 모양을
허용치 않는 진리의 본원 자체를 표현한 것들이다.
따라서 만일 여러 모양이 모양 아님을 볼 때는
여래를 볼 것(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이라고 한 것과 같이,
모든 현상들은 다만 절대평등의 진리, 여래를 가리키는 현상으로서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여래선자(如來禪者)는 일용 중에도 진공(眞空)의 진리에 과녁이 맞추어 있다.
이에 비해 조사선(祖師禪)은
‘진공(眞空)’이라는 미세한 알음알이마저 거부한다.
드러난 현상 그 자체가 진리,
본마음의 실상일 뿐 별도의 진리는 없다는 입장이다.
성스럽고 존귀하다거나 거북이 뿔처럼 있지도 앉은
진리를 따로 세울 필요 없이 드러난 현상에서
바로 진리를 체득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그때그때 마음을 알아차려 바로 진리를 실천하라고 한다.
이는 상대적으로 여래선에 비해
진공(眞空)보다 묘유(妙有),
본체(本體)보다 작용(作用)을 강조하는 활용의 입장에 선다.
그리하여 조사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했다.
참다운 진리는 원래 문자를 세울 수가 없다.
다만 우리 중생들에게 표현하기 위해서 문자를 빌린 것이지,
참다운 진리 자체는 말도 떠나고 문자도 떠나고 생각을 떠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참다운 도는 교 밖에서 전한다.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니까
교를 하나도 안 배운다 하더라도,
사람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니까
바로 마음 깨달으면 된다.
바로 본래 성품을 보고 성불하는
이른바 격외(格外)도리에 입각해
조사가 본래 전하는 선을 말한다.
<능가경>에서 말하는 여래선(如來禪)의 이름에 대해 조사선이란 명칭을 세웠고,
“여래선은 교(敎) 안의 미처 덜 된 선이고,
조사선은 교(敎) 밖에 달리 전하는 지극한 선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즉, ‘조사선(祖師禪)’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역사적인 석가모니의 견해보다는 오ㆍ육백년 이후에 나타난 대승불교가 훨씬 수준이 높은 불교다.
특히 대승불교에는 보살행을 하자고 하는 것을 불교로 본다.
그리고 부처보다 보살을 더 높이 본다. 중국 선불교에 와서는 그러한 현상을 빌려서
여래선 위에 조사선을 두었다. 하지만 과연 이런 무엄한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 것인가.
어떻든 “여래선(如來禪)은 봤지만 조사선(祖師禪)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라 든가
, “여래선은 알았어도 조사선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여래선은 봤지만 조사선은 못 봤다는 말은 결국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훨씬 높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도 여래선보다 조사선을 위라고 해왔다.
그러나 부처가 깨달은 여래선이 아래라고 하면, 말이 될 수가 없다.
여래선이란 바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만덕을 원만히 갖춘 무루(無漏) 청정선(淸淨禪)인 것이다.
일본의 선종사에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도원(道元-도오겐) 선사가 있다.
중국 송나라 천동여정(天童如淨) 스님에게 사법(嗣法)하고
일본 조동종의 개조(開祖)인 도원 선사는, 여래선 조사선의 우열론에 대해 말했다.
“여래선이다. 조사선이다 하는 이름이 일직이 옛날에는 전하지 않았는데,
오늘날 비로소 망령되게 전해져 부질없이 헛된 이름에 미혹해 집착하기 몇 백 년이니,
참으로 가련한 일이 아닌가. 말세에 용렬한 인연 때문이니, 다 이익이 없는 한갈등(閒葛藤)이다.” 이렇게 말했다.
조사선은 여래선의 교선일치설(敎禪一致說)에 반대해서 여래언구(如來言句)에
집착함을 경책하는 의미에서 여래선과 간별(簡別)해 조사선을 창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래선(如來禪) 외에 조사선이 없고 또한 조사선(祖師禪) 외에 여래선이 따로 있지 않다.
부처님께서 주로 말씀하신 여래선(如來禪)이나, 달마 스님 이후에 발달된 조사선(祖師禪)의
내용이 둘일 수가 없다. 여래선과 조사선이 원래 둘이 아니라는 데 입각해야 한다.
종래의 선은 여래선(如來禪)으로서 경전과 교리에 의존하고 있으며,
언어문자(義理, 義解)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선이라고 폄하했다.
그리하여 조사선이란 여래선, 의리선(義理禪)의 상대적인 말로,
부처님이 설한 경전이나 언어문자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곧바로 그 마음을 직시해 깨닫게 하는 선법이다.
언어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으로 깨우침이 전해지는
사자상승(師資相承) 하는 것이다. 선은 마음을 닦는 수심법(修心法)인데,
조사선은 달마 정전(正傳)인 부처님의 마음을 마음으로 아는 참된 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란 뜻이 여래선 가운데 안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여래선 공덕 가운데는 일체상을 떠나고 생각을 떠난 도리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여래선이라고 한 것이다.
선가(禪家)에도 그 본질은 같으나 깨달음의 경지나 방법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남종과 북종, 조사선과 묵조선 등 다양한 선사상체계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돼왔다.
여래선은 조사선의 개념이 제시되기 이전 최상승선으로 불려왔다.
여래선에서는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을 불법의 최고단계 혹은 선(禪)의 최고 단계로 보고 있다.
조계혜능(曹溪慧能)ㆍ
하택신회(荷澤神會)ㆍ
규봉종밀(圭峰宗密) 선사들의 어록에서도
이와 같은 흔적들을 곳곳에 보일 정도다.
혜능 선사는 여래선과 관련해서,
“만법을 통달하고 만행을 갖추며 일체 섞이지 않고
법상을 떠나 짓되 얻는바가 없는 것이 최상승이다.” 라고했다.
규봉종밀 선사는
또 “자심이 본래 청정하고 원래 번뇌가 없으며 새어나감이 없는
지혜의 성품을 스스로 갖추고 있음을 문득 깨달으니 이 마음이 곧 부처이고
결국에는 다름이 없다는 선리에 근거하여 닦는 선법이다”고 말했다.
이렇듯 여래선은 조사선이 확립되기 전에 최상승선으로 통용됐다.
석존의 큰 깨침은 일찍이 그 유래가 없는 대각이었다.
그이 뒤를 이은 이가 바로 마하가섭이다.
그 이후 28대인 달마(達磨, 470~536년경) 대사가
중국으로 넘어와 선불교를 폄으로 선불교는 극치를 이룬다.
달마 대사 때부터 선(禪)만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禪宗)이 탄생했고,
이로부터 선불교는 불교의 한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달마 대사를 최초의 조사로 해서 6조 혜능까지 이어지다가 혜능으로부터
남악 회양(南岳懷讓, 677∼744), 청원 행사(靑原行思, 671~738)를 두고
그 밑으로 오가칠종(5家7宗)이 파생됐다.
이러한 선종은 신라 선덕여왕 5년(784)에 도의(道義) 선사에 의해 한국에 전해지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형성했으며 현 한국조계종의 사상적 기반을 형성했다.
석존으로부터 시작해,
남인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 520년경 중국에 들어온
달마 대사에 이르기까지를 여래선이라고 하고,
달마 대사로부터 6조 혜능까지를 조사선이라하고,
혜능 이후 무수한 조사들에 의해서 전개된 독특한
중국식 선불교를 분등선(分燈禪)이라고 분류해
선의 흐름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조사선이라고 하는 것은 (달마대사를 초조달마라고 하듯이) 달마 대사를
최초의 조사(祖師)라고 칭하면서, 그의 영향 밑에서 형성된 선을 이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선은 달마 대사 이후의 선불교를 말한다.
그것이 중국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중국 선불교라고도 하게 되는데,
불교의 깨침과 노자(老子)의 무위(無爲)사상인 도(道)에 연결되면서
불교의 선이 급속도로 중국에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이 혜능 이후의 선종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분파되면서 완전히 선의 중국화를 이루게 된다.
이를 분등선(分燈禪)이라 한다. 분등선(分燈禪)이란 구체적으로
당⋅오대시대(618~960) 선종의 발달과정에서 형성된 다섯 종파, 즉
위앙종,
조동종,
법상종,
임제종,
운문종을 말한다.
오가칠종(五家七宗)이란
위의 오가 외의 임제종에서 분파된 황용파와 양기파의 두 파를 추가한 것을 말한다.
여래선은 인도적인 선 수행에 가깝다고 볼 수 있고, 조사선은 달마 대사이후 선이
중국에 정착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분등선은 완전히 정착된 중국식의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언설을 정리하면, 조사선이란 여래선의 교선일치설(敎禪一致說)에 반대해서
제언했다고 볼 수 있다.여래선 도리는 교나 선이나 원래 둘이 아니라는 도리를 역설해서 말한다.
그러나 불법(佛法)에 있어서 무엇이 둘일까. 어리석은 중생이 공연히 갈라서 둘인 것이지,
어느 것도 불법 속에 들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본래에서는 절대로 둘일 수가 없는 것이다.
교나 선이 특징은 다 있으나 원래가 둘이 아니다.
그래서 여래선이나 조사선이나 근기에 따른 수시(隨時)의 말로서
여래선 외에 조사선이 없고 또한 조사선 외에 여래선이 따로 있지 않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일호(一毫)의 상위도 없고 천심(淺深) 우열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디가 깊고 어디가 덜 깊은, 또는 어디가 더 수승하고 또는 용렬한 차이가 있을 수가 없다.
마땅히 이런 도리를 깊이 생각해서 부질없는 갈등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