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의(無作意)>
‘무작(無作)’은 신(身)ㆍ구(口)ㆍ의(意)의 동작을 빌리지 않고 저절로 상속하는 것을 말한다.
인연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닌, 생멸의 변화를 초월한 것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는 ‘열반’을 달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때로는 무위(無爲)의 법성(法性), 열반(涅槃)을 뜻하기도 한다.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깨달아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경지,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 목적이기도 하다.
‘작(作)’은 ‘짓다’, ‘일어나다’ 등의 뜻을 가진 글자이다.
사람 인(人)변에 잠깐 사(乍)가 합한 글자이다.
사람이 잠깐도 쉬지 않고 일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이다.
그래서 ‘작(作)’에는 짓다, 만들다, 행하다, 하다, 실행하다, 이런 뜻이 있다.
지적(知的) 혹은 정신적 활동에 있어서,
사물 또는 사람의 이름을 짓는 것을 작명(作名)이라 하고,
일을 결정함을 작정(作定)이라 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음을 작심(作心)이라 하고,
싸움(전투)을 진행하는 방법의 세움을 작전(作戰)이라 하며,
글을 지음을 작문(作文),
악곡을 만듦을 작곡(作曲),
작품을 새로 쓰는 것을 창작(創作),
그렇게 해서 생산 된 것을 작품(作品)이라 한다.
이런 문학이나 예술의 창작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작가(作家)라 하고,
그들이 제작(製作)하는 작품을 저작(著作)이라 한다.
또 시작(始作)이란 말이 있다.
처음으로 작(作)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즉, 처음으로 유위(有爲)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작(作)은 시작이 좋아야 한다.
시작이 좋아야 끝도 좋은 법이다. 시작부터 삐꺽거려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플라톤(Platon)은 시작은 그 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한 해의 시작, 일주일의 시작, 작게는 또 하루의 시작,
시작이란 단어에는 무한한 희망이 담겨 있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새 달력은 나에게
새로운 시작의 메시지, 희망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해주고 있다. 그래서 시작이 반이라 한다.
이와 같이 「현대사회에 있어서 ‘작(作)’의 의미와 양상은 매우 다양하다. 농사와 노동이 개인과 소규모 집단의 차원에 머무는 작(作)이라면, 다양한 인간관계가 널리 교류되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좋은 글을 SNS에 올려서 생각의 변화를 이끌어 주는 것도 작(作)이고, 심리상담을 통해 불안한 마음을 치유해줘도 작(作)이며, 명상법을 지도해주며 스스로 정신적인 평안을 이루게 해도 작(作)이다. 작(作)을 몸 쓰는 노동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는 시대이다.」 -
하지만 이런 말들은 모두 사회생활에서 흔하디흔하게 쓰는 상식적인 말들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렇게 함부로 쓰지 않고 요긴하게 쓰면서 ‘작(作)’에 중점적인 의미를 둔다. 그리하여 ‘작(作)’에는 ‘고의로, 일부러, 의도적으로’ 이런 뜻이 함의돼있음을 강조한다.
작(作)의 반대말이
무작(無作)이다. 신(身)⋅구(口)ㆍ의(意)의 동작을 빌리지 않는 고의성이 전혀 없는 경지를 말한다.
반대로 작의(作意)란 ‘
뜻한 바[意]를 지음[作]’ 또는 ‘마음먹은 것[意]을 행함[作]’을 뜻하는데,
무언가를 결심하고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작의는 마음을 일으키는 작용이다.
인간은 끝도 갓도 없이 분별하고 만들어 내는 작의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대개 마음에
하고자 하는 의식이 없이 하는 일을 무작의(無作意)라 한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진리대로 행동하되 인위적인
재주를 부리지 않는 것이 무작(無作)이며,
그에 따른 무심(無心)한 행동이 묘용(妙用)이다.
즉, 무작(無作)은 인위적인 잔재주를 부리지 않음이다.
이에 비해 작의(作意)란 ‘뜻한 바[意]를
지음[作]’ 또는 ‘마음먹은 것[意]을 행함[作]’을 뜻하는데,
무언가를 결심하고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작심(作心)과 작의(作意)는 비슷한 말이다.
무작의(無作意)는 이런 의도된 행을 하지 않음, 생각을 지음이 없음을 말한다.
선가(禪家)에서 흔히 자기를 잊는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자아의식(自我意識)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무심(無心)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 ‘작은 나’가 자연이나 우주 같은 ‘큰 나’로 승화돼,
이 ‘작은 나’ 자신이 발전적으로 해소되는 것을 뜻한다. 무심과 무작이 같은 맥락의 말이다.
그리고 지음이 없는 것을 무작상(無作相)이라 한다.
무작상(無作相)에서 ‘작상(作相)’은 모양을 짓는 것을 말하므로
무작상은 지음이 없는 것, 법이 모두 공해 지어 일으킬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
마음공부의 가장 큰 병통은,
작심(作心)을 해서 작상(作相)을 일으켜, 수행을 해서 반드시 깨닫겠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경우, 다른 말로 하면 유위(有爲)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다.
수행을 해서 깨닫겠다고 여기는 동안에는 깨달을 수가 없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분들 중에 깨달음의 관문을 통과하는 경우가 드문 이유이다.
오히려 수행을 해서는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때
부지불식간에 모든 수행의 작상(作相)이 무너져 내리면서
의식이 깨어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새벽에
보리수 나무아래에 앉아서 별을 보면서 경험을 했던 깨달음이다.
그런데 깨달음을 체험하고 나서 곧 바로 ‘이것뿐이니 불법을 따로 찾을 것이 없다’라고
여기는 이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진실로 둘이 없는 ‘이 하나의 진실’을 깨달을 수가 없다.
이런 무작상(無作相)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나름의 생각으로 법을 정리하게 되면, 그로 인해 겪게 되는 가장 보편적인 현상이
어떤 다른 경계가 닥칠 경우, 스스로 돌아보기보다는 모든 것이 법 아님이 없으니 원래
아무 일도 없다고 여기게 되며, 따라서 정법(正法)과 외도(外道)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경계가 닥칠 경우, 일단 원래 아무 일이 없다’고 하는
하나의 무작상(無作相)이 만들어지게 되면, ―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기엔,
감정의 기복이 심한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불편함을 못 느끼는 것이다.
이런 병이 깊어지면 심지어 공부인이 아니라도 느낄 수 있는 간단한
윤리적 문제까지도 분간을 못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옳고 그른 것의
구분하지 않는 것이 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조단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또 만일 깨닫지 못한 채 늘 무작상을 지으면 큰 죄인이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무기공(無記空) 가운데
떨어져 혼혼한 것이 마치 술 취한 사람과 같아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못한다.”고 했다.
또 불⋅보살께서는 많은 문자어언(文字語言)을 이용해서 교법을 설하시고는
이 교법에 매달리며 상념화(想念化) 해서 마음에 떠올려 붙잡으려고 하지
않을까 염려해서 거듭거듭 이를 경계하고 또 강조했다. 마음이란 본래
얻을 바 없는 무상(無相)인데, 이 마음을 어떻게 하고자 하는 작상(作相)을
일으키는 것은 이미 대승의 교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억지로 마음으로 어떤 상을 내어 몰두하거나 집중해서 붙잡고 있는 것은 옳지도 않고 오래 가지 못한다.
그래서 마조(馬祖) 선사가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道)다"고 함은 바로 마음을 따로 어떻게 하려고
하지 않는 상태의 무작의(無作意)를 말함이다. 무작의(無作意)란 아무 생각을 지음이 없음,
어떤 의도함이 없는 평상심(平常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