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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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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일반 이야기 게시판 이성계 조부는...속임수 노름의 보복을 피해 북해(北海)를 건너 남쪽으로 도주했다.
궐한 추천 0 조회 662 13.06.29 14:44 댓글 3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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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6.29 22:38

    첫댓글 "북해"는 조선사에서 빼 놓고 말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곳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북해는 최초의 기록이라는 "산해경"에서도 나타나는 곳인데, 그 주석을 보면, 중원을 기준해, <서북방향에도, 북쪽에도 있다>고 해 놓아 조금 혼돈스럽습니다. 그러나 돈황이나 그 서쪽지방의 "안서 사진"에 있었던 <잠삼>등의 변새시인들이 노래한 것을 보면, <지리적 위치>로 보면, 북해는 신강성과 카자흐스탄의 북방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며, 이곳은 백장의 얼음 벽이 가로막혀 있는 곳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거든요. 또한 한해는 오늘날의 지도에도 고비사막에 표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현재의 고비사막이 지금 그 자리에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 13.06.29 22:47

    <돈황연구논문>을 보면, 돈황의 석굴등에서 발견된 옛 문서를 보면, 당시에 "돈황주위의 사막지대를 고비사막"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의 약수가 있는 거연호 주위는 농사와 수초가 많았다는 설명도 있으며, 현 고비사막 지대는 모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초원지대와 자갈지대등등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고비사막은 여타의 사막지대와는 조금 다른 자연환경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역사서에서는 북해와 한해를 같은 것으로 표기해 놓고 있는데, 또 다른 곳에서는 북해와 한해는 다른 곳이라는 설명도 있습니다. 역사서는 승자의 것이기 때문에, 이성게에 대한 "미사려구"는 당연한 승자의 것입니다.

  • 작성자 13.06.30 05:17

    현재에도 몽골인들은 돈황주변 신장성도 다 서부 고비사막이라 부릅니다.
    고비알타이의 부분으로 칩니다.
    제 얘기가 그겁니다.
    고비사막 실계천과 염호들은 예전엔 수량이 훨씬 많아서...점점의 내륙호(내륙해)가 연결돼고...고비알타이 산들이 끝나는 지점에선 산(섬)과 내륙호가 어우러지고...일부 염분에 강한 수목과 초원도 형성됀 빼어난 경치의 한가이(한개=한해=절경)이였을거라 봅니다.
    조선 장수들이 말한 빼어난 음산의 절경(한해)은...고비알타이 산(올)과 주변을 이르는...올 한가이(올한개,한해)라고 전 봅니다.

  • 작성자 13.06.30 05:22

    몽골어론...고비는 사막(沙)이 아니라...자갈지대(砂幕,石幕)을 이릅니다.
    한자에서도 보이듯...옛 사막은 항시 주변에 물이 있는데...이는 멀잖은 과거엔 그곳이 물이였고...물이 빠진후 사막화돼고...뻘과 모래가 죄 날라가곤...자갈의 석막지대가 돼는 이치이며...
    이 현상은 몇백년이면 이뤄지는 현상으로...자연지형 변화중 물길의 방향이동과 물의의 소실로 이뤄지는 지형변화는 다른지형변화에 비하면 실로 순식간이라고 봅니다.

  • 작성자 13.06.30 05:27

    돈황주변이나 준가르나 타클라마칸에 고운모래사막들이 많음은...그곳 저지대들일수록 근세에도 물이 존재했단 것이며...특히 알타이서쪽 카자흐스탄의 알알해 주변 저지대들이 죄다 검은 사막인것은...
    그 알알해의 물이 급격히 빠지고...아직도 검은 갯벌조차 덜 날라간 근세에 형성됀 사막이란 얘기로...
    고대엔 거긴...알알해(天海)의 바닷물이 질펀한 내륙해였다 전 보는겁니다.
    문명의 건축물이 있었을 자리가 아니란 것이져...

  • 13.06.29 23:01

    1340년대의 두글라트 부의 차가타이가의 왕자로 알려진 인물이 "두글로크 티무르"인데 이 사람은 1347년에 칸으로 옹립되는 인물이다. 이 사람은 이 지역을 "이슬람개종과 정복자"로써 유명한 인물이란 것이 중앙아시아 역사 해설인데, "티무르"는 청년시절에 "샤이흐 자말 앗 딘"을 만나면서 감명을 받고, 그가 칸이 된 후,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아랍사"는 설명하고 있는데, 이 사람이 "이성계"라? 그렇다면 그 이후의 조선은 "이슬람교를 믿는 회교국가"이었다는 이야기다. 내가 아직 미숙한 단계에 있는 탓인지는 모르지만, "조선과 이성계와 이슬람"은 연결고리가 없다고 본다.

  • 작성자 13.06.30 05:36

    이슬람과 명나라,조선의 연결고리는 의외로 큽니다.
    근세조선 사서에서의 종교론에서도 보이듯...이슬람의 원류는 불교입니다.
    알타이인근의 사카족들이 서방으로 진출해 서방불교인 배화교등을 낳고...여기서 초기 기독교&이슬람교인 유대교가 나오고...유대교중 급진 무하마드계 모슬림들이 현재의 급진 서아시아 이슬람을 재 창출했을 뿐이며...유럽은 자기식대로...마리아란 아테네식 여신을 껴 넣으며 카돌릭을 만들었다 봅니다.
    원조 이슬람과 기독교는...알타이에서 이동한 아리안(사카족)들의 불(佛,火)종교로...부여계 키르키스(황두실위)의 영향이라고 전 봅니다.

  • 작성자 13.06.30 05:38

    투글룩티무르가 모굴리스탄(동차가타이한국)의 패자로 등극하는땐...
    몽골제국의 사한국들이...고려와 짬뽕이 됀 중원후빌라이계 원나라와 대립하던 극한시기로...텡그리신앙의 몽골이라도...각 지역의 종교는 포용했기에...당연 이슬람유다교지역 종교도 포용했던 것일뿐...현재와 같은 극단 이슬람은 아니였다 봅니다.

  • 작성자 13.06.30 07:09

    고려가 기황후의 원나라를 배격하고...친명정책을 썼단 것은...중원남방 홍건적괴수 주원장에게 복종했단게 아닌것이...고려가 친명정책과 유교를 받아들인단 싯점 자체가...주원장을 비록한 홍건적들이 고려를 침입했다가 박살나고 돌아간 싯점과 멀지 않으니...아무것도 아닌 도적패들을 고려가 섬겼다고 보는건 말도 않돼고...몽골전체를 배격했다간 그 서쪽 사한국들의 철퇴를 맞을 싯점의 처신이 아니였다 보이니...당대의 명나라는...몽골제국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모굴리스탄제국을 뜻한다 보는 겁니다.

  • 작성자 13.06.30 05:48

    모글리스탄한국의 동쪽영토는...문무님이 요동이라 보시는 현 신장성까지며...
    이를 티무르가 대부분 흡수한 걸로 보면...티무르는 고려와 무굴과 원나라의 접경지인 이성계집안의 알동(斡東)까지 지배한것이며...무굴과,티무르제국의 동쪽 국경은 반듯이 고려와 겹칠수 밖엔없었으니...
    바로 그것이 명이 철령위를 설치해 고려와 마찰했단 역사와 딱 맞아 떨어지는 겁니다.

  • 작성자 13.06.30 05:54

    티무르가 이성계라면...고려에서 조선으로 정권이양이 됄 시기...문화적으로 격변의 시기가 있어야 하는데...그런점이 없음으로 티무르를 이성계라할 근거가 턱없이 부족하다 하시는데...
    고려에서 조선으로 권력이양됄 시기 격변의 근거는 많습니다.
    고려말기 반원친명정책 이후 유교가 슬슬 고려에서 힘을 얻게돼도...고려는 확고부동한 불교의 국가였는데...
    이성게의 조선개국후엔...급작스레 과격한 유교로 고려(조선)이 문화격동기를 맞습니다.
    고려때도 몽수(차도르,장옷)는 있었으나...이를 여염집 아낙들 전체가 다 의무적으로 착용했다기 보단...
    당나라식 모자에서 면사포로 얼굴만 가리는 햇빛가림역할이 주였는데...

  • 작성자 13.06.30 07:12

    조선 개국후엔...일체의 여염집 아낙들에겐 모두 온몸을 다 가리는 장옷(몽수,차도르)가 거의 의무적으로 보급돼는 문화적 격변...이는 아주 자유분방했던 중앙아 이슬람여인들이...티무르 이후 급격히 의무적으로 차도르를 착용한 싯점과 딱 맞아 떨어집니다.
    이슬람도 유교같이 업드려 절합니다.
    우리 유교같이 웅엉웅언 뭔 축문을 읽으며 경배합니다.
    이슬람같이 조선 주자학도 모든 여타종교&학설을 죽음으로 배격합니다.
    공자의 유교라기보단 주자의 엄격한 유교가 조선의 통치철학이 돼는데...이도 중앙아 티무르제국의 엄격한 이슬람으로의 변모와 맞아 떨어집니다.
    원조 이슬람은...동방의 불교에서 시작돼나...중세 이슬람은...

  • 작성자 13.06.30 06:02

    동방의 유교를 서아시아식으로 변형시킨것 뿐이라고 전 봅니다.

  • 작성자 13.06.30 06:05

    티무르가 대 제국을 건설하고도 대칸(황제)를 참칭하지 못한 것은...황금씨족(태무진가계)가 아니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엄연히 고려의 병마절도사였기 때문으로 보이고...티무르가 지배지를 파괴만 하고 관리를 않했다 함도...고려에서 너무 먼 변방(서북면)의 여진지역였으니...겁만 주고 약탈만하고 동북면(돈황일대)으로 돌아가는 식이였기 때문이라 봅니다.

  • 작성자 13.06.30 07:16

    티무르의 생몰연대와 이성계가 거의 일치하고...그의 일대기도 이성계와 거의 일치합니다.
    티무르의 아들 쇼호르가 일으킨 왕자의 난도...이방원의 왕자의 난과 이유와 과정이 그대로 일치합니다.
    티무르의 손자인 울르그벡의 신문자개발,과학,문화 중흥은...이성계의 손자 세종대왕의 그것과 일치합니다.
    티무르와 왕자의난 주범쇼호르가 동서 티무르제국으로 나뉘어졌다 함도...
    이성계의 함흥전권과 이방원의 동쪽 정권얘기와 일치합니다.
    동시대에 동서역에서 이같이 일치하는 행적의 대제국이 동시에태동하며 마찰하나 없었을 기적적 확률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의심입니다.

  • 작성자 13.06.30 07:17

    제일 의문은 이겁니다.
    아무리 서역 사한국들이 원나라와 황위(대칸)계승권으로 다퉜다고 해도...자신들의 본거지인 성스러운 징기스칸의 고향이 고려와 동남방 홍건적들에게 유린당하는데...서역 사한국들...그중 가장 강력했던 접경지역 티무르제국이 구경만 하고 있었다,,,?
    말이 않 됍니다.
    고로, 고려와 함께 원나라를 몰락시킨 명나라는...허접한 중원남부 홍건적들이 아니라...새로운 몽골의 강자로 떠오른 무굴제국과 이를 인수한 티무르제국이라고 봐야합니다.
    홍건당이 고려에 들어와 갖은 만행을 부리고 전멸당한 이전부터도 고려는 친명정책을 썼는데...

  • 작성자 13.06.30 07:18

    고려가...아직 홍건당 내에서조차도 정권도 잡지 못한 주원장을 명태조로 받들었단것 자체도 코메디고...
    신흥강국였던 요나라 금나라 대원제국에도 그리 뻗대던 고려가...그 당시엔 하찮은 식인종 도적떼들의 두목도 아닌 부장정도인 주원장을 명태조로 받들었단 자체도 코메디입니다.

  • 작성자 13.06.30 07:19

    실제로 주원장의 못난이 초상화엔 면류관의 규(구슬)이 아홉줄 밖엔 않 됍니다...제후란 얘기저...
    잘생긴 명태조의 초상화가 바로 투글룩 티무르가의 홍무제라고 전 보는 이유입니다.
    식인 도적패 두목 주원장이 명태조(투글륵 티무르)로 둔갑하는건...현재의 짱께(쭝궈,중가르속민)국 지배층들이...티벳과 서남아 출신 식인 홍건적 후손들이기에 그런다 봅니다.

  • 13.06.29 23:07

    이때부터 이곳의 몽골제국은 대부분 "이슬람"을 신봉하게 된다고 "아랍사"는 설명하고 있다. 만약 조선의 개국시조나 그 이후의 조선이 "이슬람"과 관계가 깊다면 분명 그에 대한 것들이 우리들속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어야 하며, 불과 일이백년전의 일이다. 조선왕조는! 이러한 역사 추리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성계라는 분이 몽골계 여진, 또는 달단계라는 주장은 본인도 한 몫을 했는데(십여년 전), 고려에 귀한한 몽골계 여진계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치 않을까 생각합니다.

  • 13.07.03 01:35

    현 이슬람 주류(수니파=新派)는 원래의 이슬람(시아파)과 상당히 이질적인 유대교의 짝퉁이라고 봅니다.
    이란의 샤머니즘 비슷한 것이 이슬람의 원류이자, 조선의 국교의 유교(儒敎)와도 상당히 흡사한 수피즘이라고 봅니다. 아미르 티무르가 이성계라는 주장은 저도 동의하지만, 난장이 왜구장수 아기발도가 이성계라는 주장은 역사연구를 희화시키려는 돌팔매질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왜구토벌로 명성을 얻은 이성계가 왜구대장이었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궐한님의 한심한 주장의 반복의 목적이 있겠지만, 어째 그 효과가 김홍필 센세를 연상하게끔 합니다. 역사는 텍스트의 장황한 해설이전에 심플한 감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 작성자 13.06.30 07:25

    티무르님은...같은말을 희안하게 자신잣대로 재단해 엉뚱한 주장을 하십니다.
    왜장 아기발도를 이태조인 아기발도가 진압한건 조선사 맨 첫머리에 누누히 자랑하는 이성계의 최대영웅담입니다.
    두 장수가 이름이 우연히 같은건...당대는 몽골치하였기에...개나소나 죄다 영웅은 벌트(발도=강철)라 한 연유고...
    이는 무쇠(태무르,티무르)의 또다른 별칭이라 그리도 설명했는데...앞뒤설명 다 자르고...왜장을 이성계라했다고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 작성자 13.06.30 07:25

    문제는...왜(倭)가 원나라에 속국이 됀 적이 없는데...왜장이 아기발도란 몽골식 영웅칭호를 사용했다하는데 있는데...이로보아...당대의 왜장은...대륙남방 남송지역 변방의 왜들진영에 들어가 원주민들을 흡수한 오고타이계 몽골인였다 봅니다...철갑을 두른 기마 창검술의 달인인걸로 봐도 당시의 왜장 아기발도는 빤스도 못입던 난쟁이섬 원숭이족인 원주민 왜(倭)족이 아니였다 봅니다.

  • 작성자 13.06.30 07:23

    아기"란건...이름이나 호칭의 앞자가 아"자로 시작돼면...약칭으로 모두 "아기"라 호칭하는 몽골어와 관련있기에...왜장 아기발도는 아미르"란 호칭이 아닐수도 있는 겁니다...마자로 시작돼면 마기...바자로 사작돼면 바기..태"자로 시작돼면 "태기"이런 식입니다.
    아기"라도 같은"아기"는 아니란 겁니다.

  • 13.07.03 01:43

    아미르를 아기로 누가 발음합니까? 아미르는 관직명인데, 아기라는 보통명사로 누가 낮춰 말한답니까?
    그렇게 조선사를 희화하고 싶으면 대륙조선사연구회에 가서 김홍필 센세의 충실한 동맹자 이영준외 4인과 잘해보시지요. 날조사의 텍스트에 기록된 객관에 충실한 곳은 그곳입니다. 궐한님의 저질스런 논법과도 잘 맞고요. 그 곳에서 명예회원을 하시는 편이 훨씬 어울릴 겁니다.

  • 13.06.30 12:24

    역사란 "가정일 수 없으며, 그것은 인간사입니다." <가정한다는 것, 추리한다는 것>은 "금물"입니다.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연구는 고증학>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왜의 아기발도>를 갑자기 "이성계"와 연결시키려 하는지도 그 연유를 알 수 없습니다. 이성계가 비록 달단이나 여진 계열이라 하더라도, 또는 조선인으로 어쩔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달단이나 여진에 의탁했다가, 다시 고려조정에 귀화한 인물이었던 간에 말입니다. 그는 조선의 건국시조이며, 明이 조선인지, 제후였는지 조차 아직 불확실합니다. 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 작성자 13.06.30 15:25

    왜장 아기발도와 이성계를 갑자기 연결시키다니요...?
    이성계 몽골식이름이 아기발도인거 모르십니까...?
    그걸 왜장 아기발도와 우연히 이름이 같은 이유에 대해 설명한 겁니다.
    왜가 몽골에 먹히지 않았던게 우리가 아는 역사인데...왜장은 정작 몽골식 호칭을 쓰고...
    몽골식 호칭을 쓰는 동명이인의 이성계에게 당하는 우연이 발생했으니...당대의 사천으로 치고온 왜들의 수장은...어쩜 몽골계인물일 가능성 많다 한 겁니다.

  • 13.07.04 00:55

    이성계의 몽골식 이름이 아기발도라고요? 어느 문헌을 근거로 단언하시는 겁니까? 출전을 대 보세요?
    이성계의 몽골식 이름이 아기발도라는 소리는 궐한님에게 첨으로 듣는군요. 출전을 정확히 밝혀 보시죠.

  • 13.06.30 12:30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리한 추정이나 가정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왜를 동왜니 서왜니 하는 식의 발상 역시 같은 식입니다. 왜면 왜지 무슨 <동왜니 서왜>니.......이것은 우리 스스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왜 이렇게 조선사를 온 통 혼란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분들이 많으신지 솔직히 걱정과 우려가 됩니다. 지금 한 가닥(정통의 역사연구)으로 구심점을 잡아 나가도 될까, 말까 한 처지임에도, 온통 추리와 가정을 뒤섞어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지방이나 땅에 조선이 있었다. 남과 같은 자들의 역사를 연구해서 무엇에 쓸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 작성자 13.06.30 15:36

    역사서에 엄연히 하(夏)국도 서하(西夏) 동하(東夏)가 나오고...
    주(周)에 동이지역으로 분봉받은 동선비 기자조선(朝鮮)에 대한 기록도 엄연히 나오고...
    동쪽의 몽골인 원나라가 서역에 거대한 사한국 속지를 뒀고...
    요나라도 동쪽에서 금나라에 밀리곤...서요(西遼,카라키타이)라 분류된게 역사에 분명이 명기되고...
    분명 동서지역이 따로 분류된게 있는데...제 맘대로 뭘 나누었다시는지요,,,?
    문무님은 그럼...한국이면 한국이지(韓國) 북한(北韓) 남한(南韓)은 뭐냐...국호왜곡이라 하실건가요...?
    민족과 문명이 같아도..영토가 너무 커서 스스로 분할관리했거나 시대와 사정에따라 정권이 분열돼면 나눠불리우는게 상식아닐까요?

  • 13.06.30 22:44

    그런 말이 아닙니다. 나눈 것은 사가들이 자신들이 편하게 하려고 나눈 것이 아닙니까. 동한이니 서한이니 나눈 것이 누굽니가. 후대인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돌궐이면 돌궐이지 누가 이것을 동동궐이니 서돌궐이니 나눳습니까. 그들 스스로 나눈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후대인들이 그것을 편리해서 또는 두 개의 역사로 나누려고 분리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일이천년 전 이야기를 현대의 방식대로 나누지는 말자는 뜻입니다. 궐한님께서는 나라가 크면 별도 관리를 통해 나라이름까지 바꾸신다고 생각하시나요? 동선비 라는 말은 후대 사가들이 만들어 놓은 것일 뿐 선비들은 그저 선비일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 13.06.30 22:51

    생각이 다름으로 인한 언쟁은 항상 근원을 가져야 합니다. 흉노. 선비. 돌궐. 글란. 여진등등을 사가들이 자신들의 이익이나 소속되어 있는 곳의 이익편익을 위해 동서남북이란 글자를 차용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선비중에서 오환. 모용. 우문. 단씨. 탁발등등이 있는데, 이들은 왜 동서를 분치 않았을 까요. 요녕성으로부터 신강성너머까지 단석괴는 차지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들은 성씨를 가지고 구분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하면 역사를 자꾸 분리해 해설하다보면 더욱 혼란을 부채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왜와 서왜는 도대체 누가 만들어 놓은 단어입니까?

  • 13.06.30 22:59

    이러한 예를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물론 조선사라는 것이 워낙 방대한 것이다 보니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오고 있습니다만, 항상 제자리를 지켜야 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조선이 무슨 외계인이 와서 만들어 놓은 나라입니까? 똑같은 인간의 조선왕조였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나의 주장은 그저 나의 주장일 뿐입니다." 그것을 왜 내 주장과 틀리냐 한다면...어찌 되겠습니까? 아 이런 주장과 의견도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될 것이며, 자신의 연구에 참고할 것은 하고, 버린 것은 버리면 되는 일입니다. 또 댓글을 다는 것은 "이렇게 생각도 하는데,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보면서 참고 또는 궁금함을 풀려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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