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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롬 !!
23.6.7(수) 경항공기 지역 신우회 예배말씀
우리가 전문적으로 신학을 공부한 적은 없지만, 원죄라는 말은 항상 들어왔습니다.
(Original sin) 이 원죄에는 항상 두 가지가 속한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죄과 와 부정함입니다. 또는 부패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정함과 부정함에서 부정함, 즉 부패함을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봅니다. 우리는 후기 근대주의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살이를 우리의 이성으로 구분하고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어두어지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한가요. 우리는 그분의 지으심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의 이성이나 하나님 말고 다른 신에게 나 자신을 맡기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며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본문말씀 : 레위기 12장 1-8절 (새번역성경)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면, 그 여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다, 마치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하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아이의 포피를 잘라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 그 다음에도 산모는 피로 더럽게 된 몸이 깨끗하게 될 때까지, 산모는 삼십삼 일 동안, 집안에 줄곧 머물러 있어야 한다. 몸이 정결하게 되는 기간이 끝날 때까지, 산모는 거룩한 물건을 하나라도 만지거나 성소에 드나들거나 해서는 안 된다.
딸을 낳으면, 그 야자는 두 주일 동안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하다. 피로 더럽게 된 몸이 깨끗하게 될 때까지, 산모는 육십육일 동안을 집안에 줄곧 머물러 있어야 한다. 아들을 낳았든지 딸을 낳았든지, 몸이 정결하여지는 기간이 끝나면, 산모는 번제로 바칠 일 년 된 어린 양 한 마리와, 속죄제로 바칠 집비들기 새끼 한 마리나 산비들기 한 마리를, 회막 어귀로 가져가서 제사장에게 바쳐야 한다. 제사자은 그것을 받아 주 앞에 바쳐 그 여자를 속죄하여 주어서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 그러면 그 여자는 피로 더럽게 된 몸이 깨끗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들을 낳았든지 딸을 낳았든지, 산모가 아이를 낳은 다음에 지켜야 할 규례이다. 그 여자가 양 한 마리를 바칠 형편이 못되면, 산비들기 두 마리나 집 비들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번제물로,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바쳐도 된다. 그리하여 제사장이 그 산모의 죄를 속하여 주면, 그 여자는 정결하게 될 것이다.
말씀선포 : 정한 것과 부정한 것 (clean and unclean )
웨슬리로부터 시작된 복음주의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성결함은 바로 그 부패함을 정결케 하여 가는 과정이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의 이름으로 정결해진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처벌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과가 사라졌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다고 얘기하는 것이 바로 죄과가 해결되었다고 얘기합니다.
부패함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죄인이라 하나님 앞에서 처벌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 생각하면서 성결해져야 해 부패성이 해결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면 이미 거기서부터는 이신칭의는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신칭의라고 얘기하는 성결해지는 부패성을 해결한다는 것을 온전하게 조합하기 위해서는 부패함을 해결해가는 우리를 무어라고 얘기해야 하느냐 한다면, 아직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흠집들, 결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죄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고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들을 우리는 레위기 말씀으로 적용하여 들어가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산모의 부정함, 여성이 한달에 한번 겪게 되는 월경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정말로 죄과이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다 용서받을 수 없는 상태다 라고 얘기해서 이 말씀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고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구원을 베프셨기 때문에 또한 시내산에서 그 모두에게 하나님에 백성이다고 하는 그래서 너는 나에 제사장이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는 그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일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산모는 특별히 우리가 레위기 12장만 가지고 얘기하지만 이후에 13-14장으로 가면 피부병등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처벌 받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성경은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이 하나님이 여성에게 주신 복이다고 분명하고 명확하게 얘기하는데 도대체 아이를 출산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또 아들을 출산하는 것보다 딸을 출산하면 더 오랜 기간을 결점이 있고 흠이 있는 상황입니다고 얘기하면서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얘기하고 싶으셔서 이와 같은 말씀을 주신 것입니까
아 이것은 옛날의 이야기이니까 오늘날 이시대에는 통용되지 않지요 별문제 없어요 그렇게 간단하게 치부하고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좋으신 분이다 그런 것이 어디에 있느냐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참 차별하는 하나님이 아니냐고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은 어찌해도 물고 늘어지지요 우리가 가볍게 차치하고 그냥 믿음을 가지고 살수도 있지만 질문해 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언젠가 나에게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누가 압니까, 이 같은, 다른 부정적인 얘기를 계속해서 듣다보면 주의 하여야합니다
부정하다는 것 즉 흠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죄가 되지는 않지만, 그것을 계속해서 우리 안에 머물러 있다면 결국에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셨는가, 무엇 때문에 이것이 부정하다고 표현하셨는가. 핵심은 피와 관련된 것입니다. 피로 더럽게 된 몸이 깨끗하게 된다. 피는 흘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월경이라는 것이 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인데, 피가 나오면 문제가 되는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노아 홍수시대 이후에 보통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나누어졌다고 얘기합니다. 동물이 동물을 잡아먹는, 피를 탐하는 일이 생겼다. 결국에는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잡아먹고 또는 바다에서 육식을 하는 바다생물들이 다른 생물들을 잡아먹으려고 쫓아가는데, 어디에, 냄새를 통해서 알고 쫓아갑니다. 그 냄새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습니다.
배변 아니면 호르몬에서 나는 냄새, 초식동물 자체에서 나는 냄새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냥하는 동물이 먹이 감을 쉽게 알고 잡아먹는 것은 피에 냄새를 맡았을 때입니다. 보통 초식동물의 경우에 제일 위험한 경우는 바로 생명을 출산하고 얼마 안 지났을 때입니다. 왜요~, 태반이 나오고 피가 나오니까, 초식동물은 도망가야하고 육식동물은 잡아먹으려 쫓아다니는 것, 안 그러면 굶어 죽으니까, 거기에 평화가 있느냐할 때 평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한다면, 거기에서도 수없이 피비린내가 난다는 것입니다. 칼로 창으로 화살로 이제는 총과 미사일로 요즈음은 레이저로 사람을 피냄새가 나게 만듭니다.
생명이 더 생명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고 죽게 만드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평화 샬롬이 벌어지지 않는다. 이미 그렇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여성이 월경한다, 피가 흐르게 된다는 것이 여성 자체에 죄가 있기 때문이다가 아니라, 여성이 아담을 꼬득여 이 모든 사단이 일어난 것이 아니냐는 그런식의 접근이 아닙니다.
결국에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출산하는 것에는 어느정도 피를 흘리는 일이 있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폭력이라고 하는 평화가 깨져버린 상황이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상이 피흘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성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운데서 월경을 한다든지 생명을 출산할 때, 필연적으로 피를 흘리게 되는 것조차도 결국에는 결점일 수밖에 없다 흠집일 수밖에 없다.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이 피를 흘리는 것 차체가 이미 모든 것들이 통칭적으로 평화인 하나님의 샬롬이 깨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연관되어 생각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딸을 낳았을 때보다 아들은 왜 더 기간이 짧으냐,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하지요. 하나님의 평화가 깨져버린 세상,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지금 70년 정도 전쟁이 안 일어났지만, 70년전에는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육이오전쟁도 있었고, 무슨 폭동을 진압해야 한다고 하면서 양민을 학살하는 폭력이 또한 나의 삶을 개선하여 달라고 하는 집회를 난폭하게 진압하는 일들에 주로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었나요. 여성들이였나요, 남성들이였습니다. 폭력의 세상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의 권리를 지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하는데 누가 더 필요한가요. 남성이 필요합니다. 그 세상에서는 여성보다는 남성이 더 대접받아야 합니다.
왜요, 우리의 권력, 주장을 지키는데 있어서 가장 힘이 되는 자원이 남성이기 때문에 아들이기 때문에 딸이 아닌 이것은 야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얘기하는 것만이 아닌 그 당시 고대 근동지방에 있었던 고대 이집트, 가나안족속, 모두가 다 그와같이 여성을 더 오래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습들이 있었다는 것을 고고학자들이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 민족만의 일이 아니고, 다 그랬군아, 반대로 인류역사학자 가운데, 여성이 남성보다 더 높아서 어느부족에는 여성이 더 힘이 있어요.
거의 대다수가 남성이고 소수의 어느 인류학자에게만 여성이 더 대접받는 곳이 있었는데, 어째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폭력인 세상에서 나에게 자원이 되는 사람만이 대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이유는 모르지만 어째든 기간의 차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남성이 더 대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우리로 하여금 부정적인 얘기이긴 한데, 여성을 차별하는 말씀이 아닌가요. 예, 맞아요, 그런데 부정적으로 작용되었던 말씀이 결국 우리에게 깨닫기 원하는 것은, 너희에게 평화의 세상이 깨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모두 쓸어버리는 심대한 죄질이 아니라 너희에게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아느냐 그것이 부패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정함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인가 잘못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샬롬이 넘쳐야하는 세상이 아닌 폭력과 피와 죽음이 얼룩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 주님 이일을 어찌해야 합니까. 남성에겐 33일 여성에겐 66일 격리하는 시간을 가져라 그런데 그 격리를 집밖으로 내보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완전히 쫓아내지 않았어요. 그 안 사회에서 격리하라 하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어느 누구라도 아니 이스라엘 전체가 뭔가 문제가 있군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인가, 그게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깨닫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지금도 우리에게 변함없이 적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2장에서 하시는 말씀은 부정하다고 하기 때문에 감춰야 한다 숨겨야 한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부정할 수밖에 없게끔 하나님이 만드셨는가. 오늘 우리시대에도 레위기 12장을 그대로 적용하기 보다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좀 더 감춰야 하는 것이야 숨겨야 해, 아이~, 그것 부정한 것이야, 그것은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이잖아, 이상한 것이잖아 그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왜 그런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셨는가. 그럼 왜 그런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샬롬이 깨어져 버린 세상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살롬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끊임없이 생각해 보고 상상하고 소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청지기적 사명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에 부정적으로 말씀하셧으니까, 감춰야 돼가 아니라, 왜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선하고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부정하다고 바라봅니까. 오 주님,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하며, 폭력이 있어서 입니까. 그러면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초대 때부터 출산과 관련해서 피를 흘리는 것이 부정하다는 것을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이 주후 1세기 때부터 교회는 이미 그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어느 시대 어느 누구보다도 고아나 출산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서 그것에 대해서 조산사 역할을 한다거나 아니면 고아를 보육원에서 돌보는 일을 한다든지 여러 가지 일들을 감당했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것이 초대교회가 가졌던 놀라운 일입니다. 피가 부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초대교회가 거리낌없이 그 일에 뛰어 들었던 것은 더 이상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피는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은 구약에서 엄밀하게 따지면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부정한 것이 아니다 고 교회가 얘기하기 시작한 것은, 왜요, 거기에는 속죄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 모두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셔서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더 이상 결함이 아니다 고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이 피를 흘린다. 우리를 정결케 하신다. 더 이상 피흘림이 부정한 것이다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결케 하신 것을 어떻게 사람이 부정하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까.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아이를 출산할 때 나오는 피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고 확신하며 달려갔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