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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날 때 들려지는 양미자의 시 '아네스의 노래' 를 들어보자.
*
아네스의 노래
그곳은 얼마나 적막할까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좋아하는 음악 들려올까요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을까요
한 번도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을까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해야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 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이제 어둠이 오면
촛불이 켜지고 누군가 기도해줄까요
하지만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당신을 축복하리
마음 깊이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
영화는 '아네스의 노래'가 들려진 후 강물이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다가 고요함으로 끝난다. 시가 들려지는 한 순간 이후, 나는 북받치는 슬픔에 어찌할 줄 모른다. 내 감정이 북받치기 시작한 것은,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이제 어둠이 오면/촛불이 켜지고 누군가 기도해줄까요//하지만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당신을 축복하리" 이 부분에서 였다.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당신을 축복하리" 이 부분에서 표정없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그 소녀가 너무 애잔하여, 멈출 수 없는 눈물이었던 것이다. 이창동 영화와 눈물을 생각하면, 나는 또 어김없이 코드가 다른 사람들임을 확인했던 <박하사탕>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2000년이 시작되는 그때, 우린 <박하사탕>을 보러갔다. 나이차가 10살 정도 나는 사람들과 영화를 보러갔다.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5.18 민주화항쟁이 남일 같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나와 5.18를 이름으로 알고서 잘 모른채 살아온 어린 사람과 같이 영화를 보러 갔는데, 나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젊음을 인식하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었다. 같이 본 사람 중에 젊은 한 사람은 영화 언제 끝나느냐며 지루함을 호소했다. 그 사이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은 감정이 고조된 나와 지루한 다른 사람 사이에서 영화를 보았다. 내게는 무척이나 슬펐던 <박하사탕>이 다른 이에게는 무겁고 지루한 영화였다는 걸 나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나로하여금 감정의 과잉을 경험하게 한다. 그로인해 다른 사람들과 차이나는 감격을 느끼게 한다. 이번 영화도 그럴지 모르겠다.
왜 이토록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나를 울게 하는지...그건 아마도 지금 이 시대에는 찾을 수 없는 어떤 정서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통해서 상기된 때문이다. 이번 작품 <시>는 시란 무엇인지, 시가 노래되는 시대는 언제인지, 시를 노래하는 사람은 누구인지를 묻게 된다. 지금 이 시대를 말하길, 시가 죽어버린 시대라고 작중 한 인물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영화 속 표현으로 하면, '죽어도 싼 시'의 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는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를 낸 황병승시인이다. 영화 속에서는 박용탁의 후배로 등장한다. 시는 지금 이 시대 왜 이렇게 취급되는걸까. 그 이유를 이창동은 마땅히 그래야하는 당위와 도덕이 사라진 시대인 까닭으로 보고 있다. 문학의 종언이 들리는 가운데, 스스로 시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해보았었다. 내게 있어 시란 어떠해야할까를 묻는 시, 내게 있어 이 시대 시의 상징으로 생각되는 시는 T.S. 엘리어트의 <황무지>이다. 굳이 아우슈비치이후 서정시라는 언급을 떠나 물질문명 사회 속에서 인간이 노래하는 시란 황량한 들판(문명)을 찢고서 나오는 새싹이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황무지>가 현대 문명을 아프게 비판했다면, 이창동 감독의 <시>는 기계화된 인간 사회에서 인간의 삶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영화이다.
어느새 기계가 된 인간은 각기의 삶 또한 단순화된 채로 살아가고 있다. 나와 너의 삶의 아니라, 나의 삶만을 의식하면서 살고 있다. 자기의식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의 삶은 사실상 복잡해졌다. 다른 길이 없는 자기 삶은 점점 단순해지고, 다른 여백이 있는 타자와의 삶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아무리 단순하게 살려고 해도 단순하게 살 수 없는 시대가 됐다. 가치관의 혼란을 넘어, 가치관이 다양해졌다고 하는 게 적절할까. 나아가 나와 너의 입장 차이를 인정해야함도 의식하고 있다. 나의 입장과 너의 입장이 다르다는 걸 의식하면서, 입장들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입장들이 달라지며, 독보적인 무엇은 없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에 있어서도, 들어보면 이해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건 아니구나 하고, 어떤 사정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태어나 살다가 죽게 되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생사라는 이름에 걸리는 것이 단선적인 한 인간의 삶이다. 하지만 그 인간의 삶은 결코 단선적일 수 없다. 이율배반적인 인간, 모순적인 인간이 사는 이율배반의 시대이고 모순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어쩌면, (나의) 너에 대해서, 무지로 일관하는 삶들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너의 고통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너의 고통에 대해서, 너의 죽음에 대해서, 너의 아픔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로 일관한다. 모른다, 거기에서, 시는 죽었다. 네가 쓴 시일지 모르지만, 나는 알 수 없다가 되므로.
흔히들 집단 망상이라고까지 하는 종교를 인간은 왜 갖고 있는지에서, 역으로 인간이 종교를 찾는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듯이, 시가 죽은 이 시대, 그럼에도 왜 시를 쓰고자 하고, 왜 시의 의미를 묻고 존재를 묻고 시를 노래하는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를 의문해볼 수 있다. 도대체 왜 시를 소환하는 걸까?
시가 노래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가 노래하는 대상은 아름다운 자연, 무심한 자연, 가혹한 자연 그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다. 그리고 인간의 감정이고, 인간의 역사이고, 인간의 꿈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사람들은 시를 찾지 않게 됐을까? 시를 찾지 않는 건, 시를 얘기할 자리가 없어서이다. 시를 들려줄 자리가 없어서이다. 영화 속에서 시 낭송회가 몇번 등장하는데, 왜 그렇게 어색하고 낯선지 모르겠다.
시낭송회와 시집을 생각하다보니, 나이들어 시를 찾았던 한 사람이 순간 기억된다. 그림을 업으로 삼던 한 사람이 나이 마흔이 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기를 몇번 하다가, 지금은 다시 그림을 업으로 하게 됐지만. 그 사람이 갑자기 시의 시계로 빠져든 건, 아마도 사람 소리가 직접 들리지 않는 그림세계와 달리, 사람들 마음 속 소리가 들리는 시세계가 그리웠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사람과 일정정도의 거리를 지녔던 그 사람은 시를 통해 사람 속으로 들어갔다. 시는 사람의 소리이다. 자연을 노래해도 사람의 소리로 노래되는 자연이다.
시는 인간이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 <시> 또한 인간의 노래이다. 언제나 역사 속 인간을 그리는 이창동 감독은 이번 작품 <시>를 통해서 정신적인 앓음이 사라진 이 시대를 개탄해하는 것 같았다. '너'에 대해서 도대체 앓지 않는 이 시대의 '나'를 의식하게 한다.
<시>를 살펴보기 이전에, <밀양>의 경우를 한번 보자. 신애는 유괴된 아이가 죽은 뒤 삶을 선택하면서 그 유괴범을 용서하기 위해 전도를 받고, 용서라는 이름이 자신에게도 부여된 줄 알았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인간의 이름밖에 없다는 걸 아는, 거울앞에 선 신애였다. 그때 신애는 생각한다. 인간인 나는 무엇인가? 인간인 나는 누구인가? 나 자신조차도 모르는 내가 결국 (나의)너를 알 수는 있을까? 너를 모르지만, 네 곁에서 나는 너의 아픔을 보려고 한다. 너의 울음에 나 역시 울게 된다, 그게 시의 마음이다.
공감이 되어 너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에서 시가 태어났다. 설명하지 않는 너의 말을 나는 알 것 같아. 나에게도 울림이 있어, 그 정서에서 시는 노래된다. 절제된 언어들의 나열에도 시어를 알아듣는 것, 그건 사실은 모를지 모르지만 나는 왠지모르게 너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그 오인에서 가능하다.
그런데 <시>는 종욱과 그 친구들은 과연 소녀의 마음을 알 수 있었을까. 죽은 소녀가 나였다면 어떨까를 그들이 생각해봤을까. 소녀에게 소년들이 저지른 일이란 것이 소녀에게 있어서는 생을 감당하기조차 벅찬 고통이라는 걸 그들이 의식하지 못한 것 왜일까. 나는 나이고, 너는 너여서? 벌어진 차이를 인정하자는 시대인 것이지, 차이를 지향하자는 것은 아니데, 세상은 점차로 차이의 지향으로 흐르고 있다. 사건이 터지고나서도 소년들은 왜 소녀의 입장을 생각해보지 않을까. 소년들은 왜 계속 모른다로 일관할까.
영화는 아이들이 천진하게 놀고 있는 강가에서 시작한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곳 저편에, 뭔가 눈에 걸린다. 다가오는 걸 확인해보니, 그건 교복입은 소녀의 익사체였다. 그리고는 얘기는 장소 전환되어, 병원 대기실로 간다. 양미자 씨를 부른다. 누가 부르기 전까지는 무엇도 아닌 양미자는 그렇게 불리어 환자 양미자가 된다. 어깨가 아파서 병원에 왔다고 말하면서, 양미자는 할머니 특유의 열림으로 다른 문제점도 꺼내놓는다. 순간 순간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예가 요즘 들어 생긴다고. 너무도 쉬운 단어들이 순간 생각나지 않는다고. 그 말(하소연)을 듣고서 의사는 염려의 마음을 설핏 내비치며,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한다.
그렇게 병원을 다녀오는 길, 병원 영안실 앞에서 넋나간 한 여자를 보게 된다. 저 여자가 왜 저러는가 하고서 양미자는 궁금해한다. 알고보니 여자의 딸아이가 다리에서 강물로 떨어져 자살했다고 한다. 왜 꽃다운 어린 소녀(중3)가 자살했을까가 궁금한 양미자와 달리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에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나는 너를 모른다로 일관한다. 나는 네가 왜 강물에 뛰어내려야 했는지 궁금하다, 너의 그 사정에 가슴아프다, 너의 그 처지가 이해된다로 생각이 가는 게 아니라, 나는 네가 왜 죽었는지, 나는 네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하여 나는 오늘도 나의 삶을 살련다로 일관한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내 길을 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시>에서 문제로 여기는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종욱이가 무표정하게 자기 살길을 찾는 것, 가해자인 남학생 부모님이 사태수습에만 신경을 모으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살길만 찾는, 마땅이 그래야하는 도덕이 없는 시대를 대변하는 것 아니면 무엇이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에서 시를 찾고자 하는 양미자는 양심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소리를 듣고, 인간의 소리를 전하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미자[美子,美者]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사람이 아름다운 건 공통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엄마는 이상한 말도 잘하고, 꽃도 좋아하니까 시랑 어울린다는 딸의 말을 통해서 그걸 밑천으로 양미자는 시를 쓰고 싶어한다. 왜? 시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노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시를 쓰고자 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의 삶이었으까. 시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양미자는 시상을 자연속에서 찾으려고 한다. 여름낮 평상에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는 바람 소리를 듣는다. 바람 소리는 자체로서 바람 소리라면, 그 바람 소리는 또 누구의 호흡인가. 나뭇잎 살랑이는 소리를 듣고서 가슴이 살랑이는 건 누구인가. 그 살랑이라는 가슴으로 쓴 시를 듣고 읽고서 살랑이는 건 또 인간 아닌가. 시상을 찾아서 자연 속으로도 들어간다. 그렇게 찾아간 길 위에서, 죽은 소녀를 만나기도 한다. 다리 위에 서서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바람에 미자의 모자가 강물 속으로 떨어진다. 떨어진 하얀 모자를 보면서, 하얀 교복을 입고서 떠내려간 소녀를 생각하는 건, 미자일지, 관객일지 모르겠지만, 미자가 찾아가는 대상을 통해 미자도 관객도 사람 사이와 무관한 자연만의 시란 죽은 시라는 걸 알게 된다.
미자는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된 계기는 뭐였을까? 영화 속에서 찾아보면, 혹시 이것 아니었을까? 제가 좀 멋쟁이죠, 젊었을 때 제가 웃으면 모든 사람이 깜빡 넘어왔어요, 라고 말하는 양미자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바로, 자신이 아름다운 사람이는 걸 알아봐준 언니와 같이 있던 그 순간이었다. 햇볕이 비치는 곳에 커튼이 쳐져있고, 그때 자신을 돌봐준 언니가 "미자야, 미자야"라고 미자를 부렀는데, 그 목소리에는 미자가 아름다움 그 자체라는 걸 의식하게 하는 목소리였다고 말한다. 그 소리에는 언니가 자신을 참 예뻐하는구나를 느낄 수 있는 목소리였다. 거기에서 양미자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기원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자체로 아름다운 사람.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영화 속에서 시선생 김용탁(김용택)은 말한다. 시를 쓰고 싶으면 대상을 바라보라고(아마도 언니는 양미자라는 대상과 교감했던가보다). 지금 내 손에는 사과가 들려있다. 여러분은 사과를 몇번이나 봤느냐고 묻는다. 그리고는 대답을 한다. 여러분이 사과를 봤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사과와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사과에 빛이 비칠 때의 모습, 사과의 붉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사과의 모양새를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사과의 고통과 기쁨을 느끼면서 사과를 바라볼 수 있었을 때, 그때야말로 하나의 사과를 봤다고 말할 수 있다는 시선생의 말은 당신이 세상을 봤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라는 말로 들렸다. 어떤 하나의 시선에 걸려들어온 정보만으로 세상을 볼 게 아니라, 직접 세상을 보라는 소리로.
<시>를 이내 곧 볼 사람도, 이미 본 사람도, 언제 보게 될 사람도 있을테다. 관심없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용을 부분 얘기한다고 해서, 스포일러 있고 없음을 말하지 않으련다. 내용을 안다고 해서, 감동이 달라지는 영화는 아니니까. 영화 스토리는 나이 60이 넘었지만, 정부로부터 생활비 보조를 받으면서 간병인 일을 하는 양미자를 따라다닌다. 이혼한 딸이 남기고 간 손자를 홀로 키우는 양미자에게 감당하기 힘든 문제가 닥친다. 아픔이 찾아온 것이다. 그녀가 살고 싶은, 시를 쓰는 삶에 문제가 닥쳤다. 이창동은 그 문제에 대해서 어른으로서 일말의 책임을 지도록 한다.
한 여학생이 자살했다. 그 여학생의 일기장을 살펴보니, 지난 6개월동안 같은 학교 남학생들에게 집단성폭행당했고, 그 때문에 살고 싶지 않다는 내용의 일기가 적혀있었다. 그렇게 한 여학생의 죽음의 이면에는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간 남학생들이 있었다. 그 남학생들 중에 양미자의 손주가 있었다. 양미자에게는 밥만 들어가도 행복감이 느껴지는 손자인데, 그 손자로 인해서 한 여학생이 고통스러워 했다. 그리고는 어느날 생을 끊었다. 그렇게 사건이 발생된 후, 양미자는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후 어떤 일을 하는지가 이 영화의 스토리이다.
양미자는 처음에는 손주의 그 행위를 부인한다. 그 다음으로는 정말로 그랬을지 모른다면 그 증거가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그 증거를 찾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리고는 손주에게 묻는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하면서 절규한다. 그리고는 양심을 가책을 느끼도록 장례미사에서 훔친 소녀의 사진을 손주의 식탁위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자신이 봤을 때 손주는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다. 양미자 자신은 소녀의 죽음에 힘든 데 반해. 그녀의 고통이 느껴지는 데 반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 영화 속에서는 시를 그렇게 정의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시라고. 그런데 세상은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없는 세상이 돼버렸다고. 왜? 세상이 아름답지 않아서? 아니다.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멀어서. 아름다움을 찾지 않아서. 아니 어쩌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의문하는 시대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때 시인은 어떻게 해야하느냐. 존재할 것이냐 존재하지 않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라는 햄릿이 있다면, 양미자는 또한 여기 이 자리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책임지고서 서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시를 쓸 수 있냐고 묻던 고운 노부인이 울게 된다. 육십이 넘어서도 시인이 되고 싶다는 자신과 달리, 세상 속 무엇일 수 없어 강물에 떠내려간 소녀를 잊을 수 없어서.
이창동 감독이 줄기차게 의문하는 것은 공권력/법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 발휘될 수 없는 상황에서 기인된 인간적인 죄의식의 문제이다. <박하사탕>에서 영호의 원죄는 계엄군인인 상황에서 (본의 아니게) 여고생을 쏜 것이었다. 영호는 국가의 부름을 받고 출동해서, 사회를 혼란시키는 사람들에게 총을 쐈는데, 알고 보니 그 대상은 여고생이었다. 여고생이 사회를 혼란시키는 빨갱이/반란군이라는 데, 영호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분명 죄를 지었는데 국가라는 이름으로 죄가 없어져버렸다. 그에 반해 <오아시스>에서는 장애우 겁탈이 아닌 장애우와의 사랑의 문제에서 사랑해서 한 행위였기에 어떤 죄의식도 없는 사람에게 죄의식을 강요하는 이상한(정형화된) 사회를 다뤘다. 죄가 없는데 죄를 지은 게 되었다. <밀양>에서는 신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했다고해서 사라지지 않아야하는 인간으로서의 죄의식을 다뤘다. 신애가 이제는 자신이 용서해주겠다면서 찾아간 교도소에서 너무도 편안하게 미소짓는 유괴범의 얼굴을 상기해보라. <시>는 직접적으로 죽게 한 것은 아니지만,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추측되는 상황을 다뤘다. 그 정황은 한 사람을 죽게 한 것 아닌가 하는 죄의식의 문제를 다뤘다. 죄의식을 가져야할 것 같은 상황인데도, 아무렇지 않는 사람을 볼 때,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해야할 것인가.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시>를 통해서 들려진다.
<시>를 통해서 시와 현실의 괴리감이 크게 다가오는데, 그 하나는 살구가 떨어진 자연에 취한 양미자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시낭송회였다. 양미자는 피해자인 여학생 어머니와 합의하기 위해서 어머니가 일하는 밭을 찾아서 시골길을 걷는다. 그때 하필이면 그때, 시골길에는 노란 살구가 떨어져있다. 살구를 맛보면서 느낀 시심과 그 시심을 표출 한 뒤, 자신이 그렇게 시심을 드러낸 사람이 바로 여학생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의식한 뒤, 자기 행동을 바라본 자의 의식이 되었을 때의 그 간격, 그것이 바로 현실 속 인간이 빠진 시문학의 모습이다. 인간의 내면은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복잡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이라면 마땅히 이래야한다는 그 강요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소설에서 인간내면의 복잡함을 그리는 작가 중 한명으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생각하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보면, 이상하게도 미궁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건 바로 당위의 거부가 보이면서도 어느순간 또 자리를 찾아가는 당위의 존재감이다. 인간이라면 마땅이 이러저러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상황에서, 금기시 되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러면서도 또, 권선징악과도 같은 구시대적 유물이 엄연히 지배하는 그 모순과 이율배반이 공존한다. 그 거북한 조합이 나로 하여금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호오를 판단중지하게 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의 소설에서 어떤 재미, 진정성을 감지하기에, 나는 지금도 그의 책을 계속 읽고 있다. 그가 말했듯, 가짜 세계에서 발견한 사실(진실), 설명하긴 어렵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실제성을 발견할수 있어서일까.
그렇다면 <시>를 통해 들려지는 시란 무엇인가? <시>를 통해 들려지는 시에 대한 소리는 괴리감이 아니다. 시란 교감이고 느낌이고 울림이다. 시는 복잡한 것만은 아니다. 들으면 느낌이 전달되고, 읽으면 감응이 전달되는 것이 시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 시상을 쫓아다니지만, 시를 쫓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찾아오는 게 시라고 시선생은 박용탁은 말하고 있다. <시>에서 말해지는 시는 복잡함이 아니다. <시>에서 시를 쓰고 싶어하는 양미자를 보자. 그녀가 선택하는 길은 사회 속 인간으로서의 길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영화 속에서 스피드있게 보여주는 것처럼 신고가 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공동체가 없어진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길이 법에 호소라는 걸 모르지만 않지만. 호송되는 남학생을 보면서,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예언자>(2009)가 연상됐다. <예언자>를 보면서, 과연 죄를 지은 청년을 격리된 감옥으로 보내는 법이 최선일까를 의문하게 됐으니까. 감옥이 인간이 범죄로부터 격리시킬 수 있고, 계도시킬 수 있을까? 소소한 도둑질로 감옥에 들어온 소년범이, 어느새 자라 이젠 소년원에 있지 못하고 감옥에 이송된다. 격리와 선도(계도)를 위해 감금된 소년이 아이러니하게도 점차로 암흑세계로 깊이깊이 빠지게 된다. 암흑가 보스가 될 가능성이 커보이는 상황에서 <예언자>는 끝난다. 그러한 내용의 영화 <예언자>와 예언자라는 제목에서 뭔가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어서, 아직도 생각중인 영화가 바로 <예언자>인데, 공공의 제도가 만든 목적과 결과가 차이가 클 수도 있다. 죄를 지었을 때 그 죄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할까에 대해서 내가 그 일을 해야만 했을까, 하지 않아서는 안되는 이유가 없었을까 하는 자기반성(참회)이 있다면, 구금이란 도덕을 강제하는 인류사에 타당한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가 이미 말했듯 악의 평범성과 그에 대한 무지, 그것도 또한 인류사의 여정이었다. 사람은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모를 수 있다. 무지에서 비롯된 범죄가 분명 인류사에는 있다. 물론 그걸 바꿔보고 싶어하는 인류사이기도 하다. 그렇게 죄라고 의식되면, 그 죄를 의식할 수 있도록 구금하는 것이 인류사이다. <시>의 길도 그렇게 흐른다. 그 길이 꼭 양미자가 선택한 길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관객은 그렇게 생각한다. 직접적인 살인은 아니지만, 자살하도록 원인 제공한 그들에게 죄에 대한 응분의 댓가를 치러야하지 않겠는가를 내포하는 내용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 방법은 제도를 믿는 사회 속 인간의 도덕적인 길이다.
이창동감독의 <시>를 얘기하면서, 나의 울음에서 시작했다. 날 울게 하는 감독이라고. 왜?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보노라면,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 아득함, 괴리감, 돌아갈 수 없음, 이해의 어려움이 아니라 이해불가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 차이는 1980년 5월 18일 부터 2010년 5월 18일인 지금인 30년 만큼이나 크다. 화요논평을 올리는 날이 5월 18일이라는 데서, 나는 1980년과 지금을 한 공간에 놓으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크게 변한 건 뭘까? 절대빈곤을 사라지고, 상대적 빈곤감이 커졌다는 것. 그 사이 민주주의도 꽃을 피우는구나 하고 생각했다는 것. 자본주의 종말에 대한 의견이 보다 신빙성 있어졌다는 것. 도시화와 핵가족화로인해 (제사/경조사 등 ) 여러 문화가 달라졌다는 것. 무거움 보다는 가벼움을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즐거움(놀이)의 추종자들이 됐다는 것, 웰빙 이나 해피나 안티에이징이라는 말이 너무도 친숙하다는 것 등등이다. 그리고 지금 시대와 그 때의 차이라면 무엇보다도, 무의미의 의미, 무의미의 극대화가 아닐까. 그 무의미 가운데 시는 들리지 않는다는 걸 이창동은 말하는 듯하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시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시Poetry>는 지금 여기 없는 잃어버린 무엇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보는 영화였다. 누군가의 죄를 벌하고 사한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로 있도록 가능한 대상이라는 존재들이란 생각이 들면서. 나의 대상, 나의 너는 무엇인가를 묻게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가 파고 있는 것이 시라면,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파고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 아름다운 미자가 등장하는 <시>는 시란 삶 속에서 발굴해야하는 아름다움이어야하지 않겠는가 묻고 있다. 세상 자체의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된다. 인간 사회에서 발견된 아름다움은 자연 속 눈에 보이는 현란한 아름다움만은 아니다. 사람 사이의 아름다움은 사실은 대상을 보고나서 알게 되면서 앓는 '앓음'다움이다. 양미자가 손주 욱이와 연관된 사건을 알고나서 앓은 후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를 썼듯이, 아름다움은 앓음(고통이 된 앎)과 같이 간다. 누구에게도 "발 밑에 흐르는 강"이 있음을 아는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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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화 '시'의 무게에 걸맞는 영화평 잘 읽었습니다. '시의 종언 시대'에 이 영화가 우리를 시에로 이끌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같이 영화를 본 사람이 <시>를 보고나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시>는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자기의 말(생각)을 하게(쓰게) 하는 영화라고 생각되더군요.
<시>도 보았고<예언자>도 보았는데 영화끝나는 내내 뭔가 말할 수 없는 불편함이, 이 글을 읽는 동안 구체화되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영화 감상 동무로군요?...^^
양미자가 시를 배우는 과정과 집단 성폭행을 당한 여학생의 자살을 연계시켜 팽팽한 긴장감을 지속시키는 이창동 감독의 연출이 놀랍습니다. 마지막 아네스의 노래는, 이렇게 폭주기관차 님의 문자를 통해 보니 절절하게 다가오지만, 영화에서는 벙어리가 갑자기 말문이 트인 듯했고 낭송이 길어서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모처럼 본 영화, 이창동의 작품이라 일부러 본 영화였는데, 보기를 정말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영화를 본 사람들 대부분이 영화를 보기전에는 다소 진지한 영화라는 데서 주저하다가 보고나서는 보길 잘했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영화는 여러 부분에서 관객 각자의 자기 삶을 건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김용탁에서 양미자로 그리고 그 이후 소녀로 목소리가 옮겨가는 시를 들을 때, 소녀의 부재(사실은 그 소녀를 떠나 다른 누군가의 부재)에 참았던 감정의 봇물이 터지는 것 같았어요. 만약 그 시 낭송이 없었다면, 양미자가 손주에게 "왜 그랬어 왜 그랬어" 하면서 말도 하지 못하는 그 상태였지 않을까 생각했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서 제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시어 중의 하나는 "협박하나"였습니다. 영화 곳곳에 홍상수식 유머가 작렬해서 좋았고 나아가서 그만의 시대의식이 잘 드러나 있어 더욱 돋보였습니다. 영화속 간병인과 피간병인 간의 교감 내지는 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안하셨군요. 어떤 의도라도? 말씀하신 것처럼 누군가는 영화 전체를 악의 진부성이라는 시각으로 읽어도 좋지 싶습니다. 특히 개인이 아닌 집단이 함께 저지르는 범행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소년시절 고백에서 그런 얘기를 하지요. 지 혼자 있으면 자기는 너무나 착한 소년이었노라고. 그런데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게 되면 다들 순간 팽 돌아버린다구요.
미자씨의 손자 친구놈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검사프린스들(과 그 일당)도 예외가 아니려나요?
의도라구요? 의식한 의도는 없었고요...영화를 보고나서 제게 떠오른 것들을 적어본 글이었을 뿐입니다. 만약 다시 생각해서 글을 쓴다면, 그때는 또 달라질지 모르지요. ^^/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걸 아는데도, 그럼에도 또 어김없이 무심하게 사는 한 사람의 삶 같아요. '무심하지 않길 바라는 이창동 감독은 아닐까'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해요. 남들은 다 잊고 사는데, 다 잊었다 세뇌하면서 즐겁게 사는데, 그 와중 잊지 못하는 자의 삶이란. 결국 돌아가버리는 어떤 지점일테지요?...
잘 읽었습니다.^^
우물 속에 살면서 늘 강렬히 여기가 우물이다, 하고 의식하는 일, 쉽지 않지요. 이창동은 다시 한번 여긴 우물이야, 잊지 마, 하고 말합니다.
영화를 보지 않고서도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시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며 읽었네요...한국영화 잘 보지 않는데...보고 다시 읽어봐야겠군요...긴 글 잘 읽었슴니다
볼까 말까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던 영화인데, 폭주기관차님의 글을 보니 또 보고 싶어지는군요..^^ 예전에 '타인의 삶' 영화도 그랬었죠. 정말 인상깊게 본 영화 중 하나입니다. <시>도 조만간 꼭 봐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