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과학의 식민지가 된 우리 삶의 세계 지금 우리는 세계화 시대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는 석학들이 자 기 집 드나들 듯이 한국을 찾아 강연도 하고 인터뷰도 갖고 하기에 이제는 그들의 출연 자 체는 큰 화제가 되지 못한다. 신문에서도 한 달이 멀다하게 유명 외국 학자들과 칼럼니스트 의 글이 게재되고 있다. 이제는 웬만큼 유명한 학자가 와서 강연을 해서는 좀처럼 많은 청 중이 몰려들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의 지식 수준이 높아져서 이제 더이상 그들의 가르침이 필요 없게 되어서일까? 아니면 그런 전시형 행사에 싫증이 나서일까? 아니면 정작 그들이 우리의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 주지 못해서일까?1996년에 위르겐 하버마스와 리처드 로티가, 1998년에 카를 오토 아펠과 앤서니 기든스가 왔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강연장은 청중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여러 학회와 학술단체에서는 거금을 주고 그들을 서로 모셔가려고 온갖 로비를 다 하였다. 한국에서 이 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교수들은 앞다투어 그들의 눈도장을 받으려 했고, 그들과 기념사진 을 찍어 친분을 과시하려 했다. 그리고 한국의 학자들은 세계적인 석학인 그들에게 한국의 현실에 대해, 한국 인권운동의 미래와 전망에 대해 질문하며 조언을 구했고, 한국의 노동운 동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물음을 던지며 자문을 구했다. 이들 세계 석학은 "겸손하게" 그 와 같은 한국의 문제들은 당사자인 한국인들이 더 잘 알 것이라고 말하며 직접적인 대답은 피했다.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 놀란 하버마스는 이제 한국인들도 서양철학에 대해서는 대단 한 수준에 올랐으니 불교와 유교와 같은 한국의 전통사상에 눈을 돌려보라고 점잖게 충고 를 하고 갔다.20세기의 대표적인 살아 있는 석학이라 칭송받는 하버마스는 현대의 생활세계가 과학에 의 해 식민지화되었다고 걱정한 철학자다. 그에 따르면 생활세계는 본디 과학이 발원해 나온 자궁이며 태반이다. 그런데 과학은 자신의 유래를 망각하고 생활세계를 자신의 잣대인 합리 성과 계량성을 갖고 획일화하며 질식시키고 있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과학의 횡포로부터 생 활세계를 해방시킬 것을 외치며 과학의 합리성이 아닌 생활세계의 이성을 복원시켜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그렇다면 이 땅 한국, 우리의 생활세계는 어떠한가? 우리의 생활세계도 예외가 아니다. 우 리의 생활세계 역시 과학에 의해 식민지화된 지 아주 오래다. 그런데 우리에게 문제는 그 과학이 우리의 생활세계에서 발원해 나온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더욱이 문제의 심각성 은 이른바 학자들이 이러한 과학(학문)과 생활세계의 연관관계를 전혀 고려에 넣지 않고, 과학이니까 학문이니까 그것이 당연히 보편성을 띠고 있다고 믿어 버리는 그런 정신 태도 의 식민성에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한국에서도 한국인의 정신치료에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이른바 배 운 사람치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용어가 보편적인 진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삶의 맥락 에서 만들어져 나온 이론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서양의 길고 긴 역사와 문화, 그리 고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서양인의 생활 속에서 서서히 형성되어 온 그들의 심리와 뗄 수 없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론이며 용어이다. 그런 이론과 용어를 서양에서 잘 나가는 과학이라고 직수입해서 우리의 생활세계에 적용시켜 이 땅의 어린아이들을 몽땅 오 이디푸스 콤플렉스 환자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식민행위인가를 우리는 깨달아야 한 다.이것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우리는 모든 학문[과학]분야에서 이런 예들을 얼마든지 찾아 낼 수 있다. 하버마스의 이론을 앵무새처럼 뒤따라 되뇌지 말고 정말로 스스로 "철학"하여 하버마스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럴 경우 우리가 무엇보다 도 먼저 해야 할 일은 서양과학[학문]의 식민지가 된 우리의 생활세계를 해방시키는 것이 고, 우리 자신을 서양이론의 중독에서 구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런 사실을 정작 학문하는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2. 우리의 생활세계에 바탕한 이론[학문] 세우기 앎은 삶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삶이 펼쳐지는 우리의 생활세계가 삶의 바탕이며 앎의 태반이 다. 생활세계는 앎(지식, 이론, 학문)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며, 앎의 보고이고 본보기이 며 원천이다.배움을 찾는 모든 이들은 삶에서 부딪히는 어려움과 문제를 잘 풀고 해결하여 더 나은 삶,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앎의 차원에 서 묻고 생각하고, 나아가 삭이고 되삭여서 삶에 되먹임시켜 삶을 의미 있게 만들려고 애쓴 다. 앎은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한 인간의 욕망에 바탕하고 있다.그런데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의 생활세계가 거의 모든 면에서 균형을 잃어가고 있다. 자연 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문명과 사람 "사이"가 극도로 파괴되는 혼돈의 시대 를 살고 있다. 거기에 덧붙여 한국인은 앎에서도 삶에 필요한 정보와 방향을 얻지 못하는 삶과 앎 "사이"의 괴리 속에 삶을 살고 있다.우리는 "삶 따로 앎 따로", 일상과 학문, 실천과 이론이 따로따로 분리되어 아무런 연결 없 이 갈라져 버린 극도의 "궁핍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이론이 현실에서 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이론소외, 이론척박, 이론부재"의 삶을 살고 있다. 그 까닭은 그 이론이 우리의 생활에서 만들어진 자생적 이론이 아니라, 수입된 이론, 때 지난 낡은 이 론, 삶에서 이끌려 나오지 않은 이론이기 때문이다.우리 앎(이론)의 세계, 학문세계는 외국이론의 대리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우리 생활세계 는 외국이론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외국의 이론을 반성 없이 수용 해 무책임하게 퍼뜨린 지식인의 책임이 가장 크다. 또한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 삶의 자 세, 생각의 방식, 행위의 양태 등이 완전히 서양화되어 버렸다. 그러면서 이것을 아주 당연 스럽게 세계화 또는 지구화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 땅의 청소년은 그들 삶을 위한 교양을 서양의 생활세계, 그들의 신화, 그들의 역 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으로 채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모름지기 앎을 책임지고 있다는 지 식인이 삶과 앎 "사이"에 있는 문지도리(돌쩌귀)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이다. 우리의 지식인들은 우리 생활세계의 기획과 운영마저도 서양인들의 관점과 판단에 내맡기고 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마저도 그들의 시각으로 고찰하면서, 그것이 객관성과 보편타당성을 주 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그리하여 우리는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 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며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데에서도 오로지 서양학자들의 자문과 결정에 의존하고 있는 식민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침내 서구의 규준이 우리 "삶과 앎"의 모든 이해와 해석의 틀이 되어 버렸다. 학문은 그 들의 논의를 따르려는 노력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을 알면서 그동안 지식인들과 학자 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이미 오래전에 지식인의 잘못된 학문 자세를 연암 박지원은《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이 렇게 염려하였다. "다만 남의 말이나 자기가 들은 것에만 의지하는 사람은 더불어 학문을 말할 것이 못 된 다. 하물며 평생토록 마음의 작용과 자연의 현상에 생각이 미치치 못한 사람이랴."3. 세계화 시대에 우리 학문의 중심잡기 노력 이제는 서양이 중심이 되어 획책하는 합리성 일변도의, 존재 일변도의, 기술과학 일변도의 생활태도와 사유방식의 강요는 종말을 고해야 한다. 이제는 모든 민족, 모든 나라의 문화 가 저마다 독특한 향기와 빛깔을 지닌 꽃들을 활짝 피워 하나뿐인 지구를 아름답게 수놓는 문화다양성의 시대가 열려야 한다. 이 문화의 세기에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잃어버린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 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삶과 역사에서 시작되는 학문을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삶의 현장, 삶의 역사, 우리 삶의 무늬가 새겨진 문화를, 우리의 문제해 결 모색이 담긴 학문, 우리의 아픔과 희망으로 그려낸 예술을 우리의 눈으로 해석하여, 그 안에 흐르고 있는 삶의 주체적인 태도와 방식을 읽어내고 찾아내야 한다.우리는 달라진 세계에서 우리와 세계에 대해 "묻고 배우는"[학문하는] 방식을 새롭게 터득 해야 한다. 서구문명의 수용과 근대화라는 급물결 속에서 우리는 한번도 제대로 우리 자신 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해 물음을 던지지 못했다. 그저 서양 흉내내며 앞으로 달 려가기에만 급급했다. 그렇게 정신 없이 달려온 백년, 우리는 이제라도 지난 시간을 반성하 여 우리 것으로 만들어 정체성을 확고하게 해야 한다.우리는 현대화라는,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서양을 추종하는 식민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탈근대와 탈서양을 외치는 시대사적인 분위기를 제대로 읽고 다중심의 다극화 시대에 흔들 리지 말고, 이 땅,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뿌리를 내려 중심을 굳건하게 잡아야 한다. 그럼 으로써 스스로 주체적으로 우리의 문제, 세계의 문제를 풀어 나가는 "세계 속의 한국인"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우리 스스로 중심을 잡고 굳건하게 설 수 있으려면 먼저 흔들리지 않고 서 있을 만한 "터 전"이 있어야 한다(공간성, 영토성).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우리 스스로 뿌리를 내 리고 있어야 한다. 우리 삶의 현장인 여기 이곳의 생활세계를 망각하고 선진국만을 바라보 고 있는 한, 우리는 중심을 잡을 수 없다.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공동체 의식, 정신적 "일체감"이 형성되 어야 한다(정체성, 동질성). 사람은 땅만으로 중심을 잡아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는 없기 때문이다. 이 일체감은 역사와 문화에 의한 삶의 양식과 사유태도의 동질성이 확보 해 줄 것이다. 그것을 민족 정체성, 역사 정체성 또는 민족적 자아, 문화적 주체라 이름하 기도 한다.주체적 중심잡기를 위한 세 번째 요소는 바로 이러한 "주체성"이다. 스스로 우리의 생활세 계와 문화, 역사에 대해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스스로 사유하여 우리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나가려는 결연한 주체의식이 있어야 한다. 여 기에서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인 말이다. 우리의 세계, 문화, 역사, 삶의 핵 은 우리의 말이다.마지막으로 이러한 중심잡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자리한 "세계 상황"이다(세계 성, 보편성). 지금은 다양한 중심들이 존재하는 다중심의 시대이다. 문화다양성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만을 유일한 중심으로 고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지구 위에서 다른 민족들 과 더불어 다른 문화와 역사 배경을 가지고 서로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서 서로의 다름 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에 어느 때보다도 더불어 사는 지혜와 논리가 필요하다. "이 땅에서 철학하기"는 이러한 세계에서 추구해 나가야 할 과제, 그리고 인류 의 문제를 함께 풀어갈 세계시민으로서의 사명 안에 자리한다. 따라서 우리는 주체적 중심 잡기가 하나뿐인 세계 속에서 실행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럴 때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는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서 세계와 더불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주)지식산업사), 서양철학의 수용과 한국철학의 모색 , 이기상, 2002/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