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153769044BFA280808)
마이클 무어의 최신 다큐멘터리 <자본주의 : 러브 스토리(Capitalism: A Love Story)>를 보며 나는 하나의 단순한 공식을 얻을 수 있었다. ‘자본주의 + 민주주의 = 금권주의’라는 공식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외국 프랜차이즈 식품 회사의 협력 업체로써 납품을 하고 있는데, 나는 이 외국 회사에 납품을 하려면 두 가지 심사를 통과해야만 납품업체로써의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QMS(Quality Management Control)라는 제도인데, 이것은 일종의 품질관리 시스템이다. 다른 하나는 SA(Social Accountability)라는 제도인데,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규약으로써 근로자의 제반적인 노동여건은 물론, 이주 노동자, 미성년자, 게이 또는 레즈비언 등등에 대한 차별 금지가 포함된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QMS와 SA. 이 두 제도가 결코 이율배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90년대 이후 나이키는 자사의 로고(혜성모양의 심벌)을 광고와 직원들의 명함에서 제외하기로 하고, 제품에 새겨 넣는 대문자 NIKE라는 회사이름도 소문자 nike를 사용하여 ‘겸손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개발도상국에서 자행되는 노동착취 사례가 소비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아 판매실적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결국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할 노동력에 대한 책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즉 여기서 난데없이 등장한 ‘사회’는 15세 이하의 유소년/소녀들이 저임금 노동에 도대체 왜 투입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없는 사회이자, 그들이 책임질 ‘사회’는 오로지 기업의 이미지로 곧장 환원되는 단순한 외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책임에 대한 부수 효과로써 다음과 같은 것이 열거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1. 정부, 대중 및 소비자 단체 등 NGO 등과의 신뢰 관계 확보.
2. 노동시장에서의 우위 확보 : 사회적, 도덕적 책임 준수에 대한 확고한 회사의 의지는 숙련된 전문 기술 인력을 경쟁사보다 쉽게 확보할 수 있습니다.
3. 생산성 향상 : 근로자의 복지를 보장해주는 회사에 대한 근로자의 성실한 결의는 생산성을 증대시키고 대외고객관계를 증진시킵니다.
4. 기업이미지 향상 및 홍보 효과 : 공신력 있는 인증기관에 의한 인증은 내부적으로는 시스템의 지속적인 개선으로 근로자의 만족을 주며, 외부적으로는 구매자들에게 회사제품, 서비스 및 회사 이미지에 신뢰를 형성합니다.
5. 투자자 및 관련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신뢰 확보 : 최근에는 회사의 기술력은 물론 회사의 사회적, 도덕적인 측면을 고려하고 평가하는 금융기관 등 자본 투자자들이 점증하고 있습니다.
6. 유럽 및 북미시장에서의 기회 선점 : 유럽 및 북미의 최종소비자나 구매자들은 점점 더 ‘사회적 책임을 성실히 준수하는’ 공급자로부터 상품을 구매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자본주의 + 민주주의 = 금권주의’라는 공식과 더불어 ‘QMS + SA = 기업이윤’이라는 공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의 더러운 이면을 민주주의가 감싸 안듯, 품질관리라는―하루에 점검·기록해야하는 서류가 50개가 넘는, 그러니까 형식적으로 동그라미를 긋는―거의 유지 불가능한 제도의 잔여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곧장 따라 붙는다. ‘4대강 사업’이 있다면 ‘친환경 무상급식’이 우리에게 주어진단다. ‘저개발의 기억’이 있다면 ‘친환경 아파트’가, ‘농사꾼의 빼앗긴 들녘’이 있다면 ‘친환경 골프장’에 ‘그들’만을 위한 필드가 조성된다. 이러한 ‘사회의 알레고리 또는 알레르기’는 폴 드 만『독서의 알레고리』에서의 다음과 같은 문장과 교차대구(chiasmus)가 가능한 것일까?
춤꾼 없이 춤이 있을 수가 없고, 지시대상 없이 기호가 있을 수 없다. 다른 한편 문법의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의미의 권위는 전적으로 형상의 모호성에 의해 방해받는데, 이 형상의 모호성은 그 자체가 방해하고 있는 구분을 요구하는 것이다.
손쉬운 오류는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내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될 때, 사실 자본주의 역시 민주주의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면, 즉 하나의 위협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각각의 위협에 조응할 때만 지각 가능한 어떤 것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춤꾼(자본주의) 없이 춤(민주주의)의 식별이 불가능한 어떤 사회를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면? 적어도 이러한 난공불락의 선택지에서 나는 코카콜라의 침략에 맞서 자기 고유의 음료 브랜드를 지키고자 자폭하는 조지 맥도웰 할아버지의 숭고한 ‘행동’을 간신히 형상화한 마카베예프(Dusan Makavejev)의 졸작 <코카콜라 키드(1985)>의 정신을 단지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 대가의 영화 앞에서 도저한 엉성함과 진부함에 실소를 머금고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는지 이제야 조금씩 이해가 가기 때문이다.
병든 가축의 ‘살처분 소각 기계’의 개발을 추진하는 이 ‘사회’에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책임’질 수 있다는 건지……
첫댓글 마르크스의 이런 말이 떠오르네요. '노동자들은 각 생산단계의 연관성과 분리된 체 노동을 수행하게 된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굽는 친구가 그 소고기가 어떤 위생상태 또는 질병의 위험에서 사육된지 모르고 일하는 것처럼요.(심지어 인간에게 전염될 우려가 있는 질병을 가지고 있는 소고기라 할지라도)
대게의 지식인들이 원하는 것은 보편타당한 경제정의를 원하지만 자본가내지 기업가들은 그 정의를 각 노동단계의 노동자에게 차등적으로(혹은 자신의 이익에 맞도록 ) 적용함으로써 이익을 취할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근래에는 양심적인 기업가가 매스컴에 가끔 등장하여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도덕성에 의존하여 기존사회를 미화하려는 낡은 도구의 산물로 비춰집니다. 몇몇의 도덕성에 의존하여 사회를 개선하려는 시도는 역사에서 이미 실패의 족적을 남긴지 꽤 오래됐으니까요. 근본적 시스템이겠지요. 그런 것의 개선에는 아주 인색하지요. 규제니 성장에 대한 장애니 해가면서요. 아마 경제학을 전공한 친구들(대게 유럽쪽)의 시선으로 보면 한국은 여전히 촌스러운 나라로 비춰지고 있을겁니다.
재밌는 발견이네요. "이 형상(키아즈무스)의 모호성은 그 자체가 방해하고 있는 구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폴 드 만의 말은 매우 정확한 것 같습니다. 이제 현실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구분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자본주의의 구분을 요청하고 있으니까요. 이 두가지는 그것들을 정의할 다른 무엇이 나타나기 전까지 교차된 현실로 보이겠지만 더 이상 같은 것은 아닐 겁니다.
최근에 읽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라는 책에서 바디우는 “민주주의자들의 ‘세계’가 ‘모든 이’의 세계가 전혀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이미 민주주의는 보수적인 과두정을 집결시킨다는 사실이 따라 나온다.”고 말합니다. 제 깜냥으론 데모스의 지배라는 본연의 ‘민주주의’를 실행하려면 자본주의를 그 뿌리 끝부터 절개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필요가 온전히 실행되었을 때, 민주주의는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닌 공산주의의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듭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공산국가의 체제가 개방정책으로 전환되엇다고 하더라도 저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념자체가 폐기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드러난, 즉 지성인으로 하여금 연구되어지고 개념화된 정치이론들은 강제적으로 사회에서 퇴출시킬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그것이야말로 반지성주의 이니까요. 마르크스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극한의 상황에서는 극약(살려내는)처방을 할수 밖에 없다는. 물론 그 시대상황으로 모든 사회의 모순을 설명할 수 없겠습니다만 하나의 이론을 당장의 현상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좀 더 신중하고 시간의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지않나 싶습니다. 개인적으론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적 사회운동으로 개혁내지 혁명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론 중국사회를 지켜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로선 개혁과 혁명에 앞서 ‘죽음 앞의 공포’에 관한 개인적인 단련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클라스트르가 보여준 것처럼 몇 가지 제도(자기가 사냥한 먹을거리는 자신이 먹을 수 없다 등등의)를 고안하고 실행해도 이 사회는 많이 개혁될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개혁은 현재의 상황에서 볼 때, 개혁이 아닌 혁명에 가까운 것이 되겠지만 말입니다.
개혁과 혁명에 앞서 '죽음앞의 공포'에 관한 개인적인 단련은 종교가 가진 몰지성적 도그마가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죽음에 대한 초월적 개인은 개혁과 혁명의 당위성을 스스로가 이해하고 동감하며 행동으로 실천하려는 의지가 있을때 가질수 있는 강직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우리사회의 개혁은 현재로서 큰 대의적 이론까지도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혹은 진실)과 상식으로서의 정의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제때에 치유하지 않으면 더 큰 댓가를 치러야 할테니까요. 물론 지불하는 측은 대다수의 서민들이겠죠.
처음 들어와서 그런지 글이 어렵네요...역시 독서의 부족함이 절실...폴 드 만의 독서의 알레고리를 읽어봐야겠네요ㅠㅠㅠ
책속에님의 의견에 동의했다가 k님의 생각에 동감이 되다가 ..솔직히 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