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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힘든 문(마태복음 7장 13~14)
한 때 한국 교회에 구도자 예배가 유행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복음에 관심은 있지만 선뜻 교회에 나오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좋은 인상, 멋진 분위기, 편안한 형식으로 교회 건물이나 예배의 형식을 꾸미는 것입니다. 콘서트 같은 예배, 콘서트홀 같은 예배당, 모던한 분위기의 의자로 꾸미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서 구도자들이 교회에 쉽게 올 수 있도록 더 매력적이고 멋지게 만들자는 취지였습니다. 신도시가 들어서면 가장 먼저 자리를 잡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입니다. 신도시를 형성하면서 아파트나 주택단지 외에도 종교 부지를 따로 둡니다. 종교 부지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도 만만치 않습니다. 종교 부지를 차지한 교회는 열이면 열 모두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현대풍의 건물을 짓습니다. 제가 사는 신도시만 해도 여러 교회들이 들어섰는데, 그 로비에 하나같이 카페를 꾸며놓습니다. 아무나 쉽고 편안하게 교회에 들어오라는 것이지요. 교회가 도덕적으로나 지역사회의 기여도에 있어서 좋은 인상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이 많이 오게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교회만의 문제는 아니었나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도 수십 년 전 자신의 설교에서 비슷한 영국교회의 세태를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세상 지혜와 육적 동기가 복음 전도 안에 들어올 때, ‘좁은 문’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비기독교인 됨과 별로 다를 것이 없으며, 기독교를 협착한 생활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가장 매력적이요, 신기하고도 자극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해야 하며, 군중 속으로 우리를 들어가게 한다는 인상을 준다.” 사람들로 하여금 별 고민 없이 쉽고 편안하게 복음에 접근하게 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복음전도 방식에서는 당연시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에는 가급적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으며 만사형통에 하는 일마다 잘 된다는 식의 접근을 권장합니다. 조금이라도 복음을 믿는 것이 거부감이나 힘들고 어렵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처음에 교회에 오는 이들에게는 좋은 이야기, 인생의 성공을 보장하는 비결, 복 받는 길 등등이 효과적이라고 말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많은 교회들이 따르는 접근방식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요즘 사람들의 성향을 파악하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말씀 같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또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좋은지 가장 잘 아는 분입니다. 지난주까지 살펴보았던 황금률이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하나님 나라의 법의 결론이었다면, 오늘 살펴볼 13절과 14절은 산상설교 전체를 마무리 짓는 일종의 매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산상설교의 가르침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지, 그 제시된 삶은 어떤 유형의 삶이어야 하는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떤 미사여구도, 사람들에게 매력적이고 좋게 보이려는 꾸밈도 없이 주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 말의 의미를 못 알아들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문이 좁고, 길이 좁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의 왕래가 적다는 것을 말합니다. 문은 드나들기에 편하도록 설계되어야 합니다. 길도 마찬가지지요. 문과 길, 둘의 공통점은 이동이 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나든, 자동차가 지나든, 물건을 들고 지나든. 그래서 문은 크고 넓어야 합니다. 지위가 높고 부자들일수록 문은 크고 넓습니다. 중요한 도시, 큰 도시일수록 큰 길이 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문, 넓은 길을 좋아합니다. 반면에 좁은 문, 좁은 길은 사람들이 찾지도 않습니다. 일부러 찾아야 찾을 만큼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좁은 문과 좁은 길보다는 널찍하고 시원하게 뚫린 넓은 길과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큰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님도 그리로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 길이 훨씬 넓고 다니기 편하도록 잘 닦여졌으며, 문도 들어가기 쉽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넓은 길과 큰 문을 놔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주님은 당장 눈앞에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영원한 관점에서 어떻게 보이느냐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느냐를 주님은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진실한 안내자의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당장 보기에는 넓은 길과 큰 문이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리로 들어갑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찾기도 힘들뿐더러 일부러 힘들여 좁은 문을 찾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넓은 길, 큰 문은 “큰문으로 들어가라”고 안내하는 안내자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서 들어갈 만큼 쉽고 편안하고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좁은 문은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찾는 이가 없기에 주님은 친히 안내하십니다.
주님만이 아시는 것이지요. 넓은 길을 지나 큰문으로 들어가면 무엇이 있는지, 좁은 길을 힘들게 지나서 도착한, 몸이 끼여 한 사람 겨우 들어갈 만큼 불편하고 좁디좁은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하게 아시는 것입니다. 큰문 뒤에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멸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좁은 문 뒤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기까지는 못 봅니다. 당장 눈 앞에 좋아 보이는지 불편해 보이는지만 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영원합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영원한 멸망과 영원한 생명 그것이 어떤 문을 선택하느냐의 결과입니다.
선택에 관한 중요한 말씀이 구약의 신명기에 나옵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 30:15) 예레미야 21:8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우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길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넓은 길과 큰 문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 문은 우리를 사망과 저주로 이끄는 문입니다. 반면에 좁은 문과 협소한 길은 불편해서 사람들이 찾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문은 우리를 생명과 축복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도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매력적이고 보기 좋고 편안하고 성공적인 것을 복이라 여깁니다. 불편하고 뭔가 가로막고 장애물이 있어서 덜 매력적이면 실패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좁고 불편한 그 문이 우리를 참된 복으로 이끌어줍니다. 겉보기에 크고 넓어서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문은 실상은 저주로 우리를 이끕니다. 일반적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물론이요, 많은 교회와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생각에 지배를 받습니다. 쉽고 편하고 안락하고 매력적인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무조건 “다 잘 될 거야.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거야”라며 입에 발린 좋은 말을 해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이런 식으로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말한다면 아마도 대부분 싫어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실상을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권하시는 것은 쉬운 멍에와 가벼운 짐입니다. 그러나 그 실제의 모습은 바로 좁은 문과 좁은 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관점에서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이 바로 쉬운 멍에요 가벼운 짐입니다. 멀리보고 하시는 말씀이지요. 영원의 견지에서 보라고 하십니다. 초대 교회 교부인 요한 크리소스톰은 “그리스도의 힘들고 좁은 길은 또한 그분의 ‘쉬운’ 멍에와 ‘가벼운 짐’으로 환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환영하고 열렬히 찾아들어가야 할 문은 바로 좁은 문이요 좁은 길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좁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여기서는 ‘스테노스’라는 형용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장애물이 있어서 ‘좁고 답답한’ 어떤 것을 가리킵니다. 좁은 문은 한 사람이 들어가도 몸이 꽉 끼는 매우 불편한 문을 말합니다. 이 말은 ‘가난한’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과 맥이 통하겠지요.
이 말의 명사형(스테노코리아)은 보다 더 강력한 것을 요구합니다. 직접적으로는 ‘좁은 장소나 어떤 장소의 매우 협소함, 답답함’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끔찍한 재앙이나 극심한 곤란과 고통’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4절입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스테노코리아)과” 여기서 ‘고난’에 ‘좁은’의 명사형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좁은’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견뎌야 하는 고난과 궁핍과 환난”을 의미합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스테노코리아)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요. 여기서는 ‘곤고’라는 단어가 ‘좁은’의 명사형이 사용되었습니다. 즉 ‘좁은’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기쁨으로 당하는 곤고함이나 능욕, 박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곤고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강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좁은’의 동사형 단어(스테노코레오)는 우리를 더 답답하고 제한하는 어떤 곳으로 몰고 갑니다. 동사형으로 쓰일 때에 “제한하다, 조이다, 가두다”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스테노코레오)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여기서 ‘싸이지’에서 ‘좁은’의 동사형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앞의 문맥과 연결해보면 여기서는 ‘좁은’은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담은 질그릇과 같은 신자들이 겪는 고통”(고난, 곤란, 지침, distress)을 의미합니다.
그 문에 이르는 길은 ‘협착하다’고 합니다. ‘협착’이라는 말도 좁다는 의미와 비슷합니다. 이 말은 ‘에워싼다, 강하게 누른다, 제한 한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찾아본 고린도후서 4:8의 “우겨쌈”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사방이 뭔가 둘러싸여 답답하고 꽉 막힌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좁은 문과 좁은 길’은 힘들고 어려운 삶을 말합니다. 바로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요, 고난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 땅에서의 성공적이고 안락한 삶으로 이끄시지 않습니다. 아무런 제한이나 규율도 없는 그저 자기 맘대로 사는 인생으로 이끄시지도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께서 그러한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맘대로, 아무런 조건이나 제약도 없는 그저 본능에 따라 좋은 게 좋은 식으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법, 하나님 나라의 규칙, 그분만의 방식을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고 하셨을 때, 그것은 방종이나 무규칙, 무조건의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자유요(요 8:32),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자유입니다(갈 5:13).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르며, 이 세상에서 살되,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나라의 방식을 따르기 위한 자유입니다.
크고 넓은 문은 아무런 제약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리로 몰리는 것이지요. 거기에는 차단기도 없고, 검문소도 없습니다. 경비병도 없고 그들을 가로막는 까다로운 조건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고, 자유자재로 편하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멸망으로 이어지는 문이요 길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의 교회를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회들이 더 커지고 많아지고 화려해지는 것은 어쩌면 교회도 세상처럼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지도 모릅니다. 전도라는 명분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모으기 위해 시도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예수님의 좁은 문 가르침을 얼마나 잘 받들고 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적인 존중과 진실한 사랑이 아니고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훈련된 친절, 전략적인 섬김, 프로그램화된 따뜻한 소그룹의 분위기가 예수님의 좁은 문 가르침을 얼마나 받들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교회가 사람들이 오기 어려운 곳이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불친절하고 사랑이 없다는 면에서가 아니라, 교인이 되면 정말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가 어렵다면, 그리스도인이 되면 손해보고 박해를 당하고 궁핍을 겪고, 곤고함과 곤란을 당한다면 사람들이 쉽게 몰려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참된 신앙의 힘이 있는 것 아닐까요. 그토록 심한 고난과 곤고함과 궁핍함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면서도 기쁨과 감사를 잃지 않는 모습에서 세상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는 것 아닐까요. 저의 아버지가 입원하여 수술을 받으시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제가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저의 어머니의 믿음이 목사인 저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수술비며, 암 치료의 긴 과정에 대한 걱정이 태산 같은데, 어머니는 내내 “모든 게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첫날 응급실에 실려 가면서도 감사, 암일 것이라는 의사의 말에도 감사, 수술이 시작되면서도 감사, 병원비가 수백만 원이 될 거라 말해도 감사, 강화 집에 당뇨약을 놓아두고 와서 부랴부랴 가지러 가는 차 안에서도 감사, 연신 감사합니다만 연발합니다.
우리 행전교회는 비교적 조건과 규율이 엄하지 않은 교회입니다. 운영하는 프로그램도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주중 모임도 거의 없습니다. 오직 일주일 중 주일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고작입니다. 교인 수가 적고, 예배당을 따로 갖추지 않았다는 것 말고는 편하다면 매우 편한 교회입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부담주지 않는 그러한 편안함 때문에 우리 교회를 선택하셨다면 행전교회의 취지를 잘못 이해하신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거의 대부분 자율에 맡깁니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시켜서 하는 신앙생활보다는 자율적으로 알아서 하고 자율적으로 책임지는 형태입니다. 그런데 이때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은 자율적이라는 말이 무규율, 무조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마음대로’라는 것도 아닙니다. 자율적이라는 말은 사실 두 가지를 경계합니다. 하나는 자율의 반대인 타율을 경계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행동, 누군가 일일이 지시하고 감독하고 관리해야 움직이는 형태의 신앙생활을 경계합니다. 또 하나는 ‘자기 마음대로’로서의 자율을 경계합니다. 이것은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규율, 무조건을 의미하는 자율입니다. 일종의 방종이지요. 방종은 아무런 제약이나 조건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내가 좋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는 방종의 자유나, 내 맘대로의 자유가 아닙니다. 옳은 것을 선택해야 하는 자유인 것이지요.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겠다는 자유, 남을 지배하고 남이야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 방종이 아닌 사랑으로 형제와 자매의 종노릇하겠다는 자유입니다.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자기 맘대로 하는 무제한적이고 무규율적인 것이 아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진리 안에서의 자유, 그 진리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자유입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율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지도와 지시와 짜여 진 프로그램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자율적인 신앙형태를 제안하면 그것을 크게 오해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타율적 신앙생활에서 자율로 바로 넘어가기 보다는 자기마음대로 식의 자율이라는 시행착오를 거칩니다. 타율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나름 잘 합니다. 잘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까, 그리고 남의 눈치가 보여서라도 잘 합니다.
진정한 자율은 건강하고 바람직한 기준과 조건과 규율을 스스로 자발적으로 지킨다는 의미의 자율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의 방향으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엄격하게 관리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신약의 가르침을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책임집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태도를 갖습니다.
이제까지 행전교회는 매우 자유롭고 자율적으로 왔습니다. 이제 5년째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 자율이 어떤 자율이었는지. 행전교회의 1기가 1년 남았습니다. 우리행전교회의 1기에 주신 은혜가 바로 이러한 자율 아닐까요? 타율에 매여 신앙생활 하던 우리에게 자유를 맛보게 하시고, 자발적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말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하신 자유가 그러한 자유였는지 스스로 판단해보십시오. 혹시라도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가는 자율적 신앙보다는 자기마음대로의 자율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제 산상설교가 끝나가는 시점에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주어진 자유를 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야 할 때가 왔습니다. 주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자율을 선택하십시오.
2기의 기회를 주신다면, 그때에도 행전교회는 타율이 아닌 자율적인 교회로 갈 것입니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자발적으로 책임 있는 신앙인이 되며, 여러분 스스로의 선택으로 성숙해지는, 그리고 서로서로에게 책임을 지고 종노릇하는 그런 성숙한 모습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편리하고 편안한 교회가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의 자발적 헌신이 필요합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앞으로도 굳이 알리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에 오기가 그리 쉽지 않지만, 앞으로는 더 쉽지 않은 교회가 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주일 예배 한 번 드리는 것이 편하고 쉬워 보이지만, 그것이 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6일간의 여러분의 일상에서 여러분 스스로가 자신의 신앙을 책임지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7일 중 하루 주일, 말 그대로 주의 날은 주님의 날로, 주님의 시간임을 기억하시고 귀하게 여기십시오. 이 시간만큼은 교회에 그냥 한 번 가주지 하는 생각을 버리시고, 주님의 시간으로 이 시간만큼은 여러분이 헌신해주십시오. 여러분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말입니다. 주일 예배는 이 날이 주님의 날이요, 이 시간의 주님의 시간임을 고백하는 고백입니다. 정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예배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조차 지켜지지 않는다면 일상에서의 좁은 문,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불과할 것입니다. 주일 예배는 좁은 문을 명령하신 예수님께 대한 최소한의 헌신이요, 예의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꺼이 견디는 고난과 고생, 예수의 제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겪는 곤고함이나 어려움을 기뻐하십시오. 보배로우신 예수님이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정말로 그분을 모셨다면 당연히 겪게 될 고난이 있습니다.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기로 결정할 때에,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고자 할 때, 비판하지 않고자 할 때, 겪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이 바로 좁은 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몰려드는 매력적인 모습도 아닙니다. 그것은 어렵고 힘들고 곤고한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요, 생명으로 참된 복으로 이끄는 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길(요 14:6)이요, 양의 문(요 10:7)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좁은 문과 좁은 길이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세상은 단지 이방인이나 비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맘대로 하려는 우리의 이기적인 본능이 바로 세상입니다. 그것을 거부하고 주님이 산상설교에서 가르치신 길을 따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산상설교를 마무리 짓는 매듭과 같다고 했습니다. 산상설교를 듣고 ‘아! 대단한 가르침이다. 정말 좋은 메시지다.’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 주님은 결단을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산상설교를 들었으면 그대로 살라고, 그대로 실천하라고. 그것이 좁은 문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다른 선택도 없습니다.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들어가기 어렵고 힘든 문입니다. 겉보기에는 그래 보이지만 사실 그것이 쉬운 멍에요, 가벼운 짐입니다. 그 문은 좁은 문이요, 예수님의 문이요, 십자가 지고 고난당하신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