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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팔(第八) 필경주일승(畢竟住一乘)○시인어불도(是人於佛道) 결정무유의지사(決定無有疑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필경(畢竟)이란 광선유포(廣宣流布)이니라, 주일승(住一乘)이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일법(一法)에 주(住)해야 한다는 것이고 시인(是人)이란 명자즉(名字卽)의 범부(凡夫)이며 불도(佛道)란 구경즉(究竟卽)이고 의(疑)란 근본의혹(根本疑惑)의 무명(無明)을 가리키느니라. 말법당금(末法當今)은 이 경(經)을 수지(受持)하는 일행(一行)만으로써 성불(成佛)한다고 정(定)하느니라 운운(云云).
어의구전(御義口傳) 미노부에서 57세에 술작니치렌(日蓮)이 말법(末法)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부처는 대망어(大妄語)의 사람이요·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은 대허망(大虛妄)의 증명(證明)이로다. 불멸후이천이백삼십여년간(佛滅後二千二百三十餘年間)·일염부제내(一閻浮提內)에서 부처의 말씀을 도운 사람은·단(但) 니치렌(日蓮) 한 사람이니라. 과거(過去) 현재(現在) 말법(末法)의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경천(輕賤)하는 왕신만민(王臣萬民)이 처음에는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으나 마침내는 망(亡)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니치렌(日蓮)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처음에는 증험(證驗)이 없는 것 같았으나 이제까지 이십칠년(二十七年)동안 법화경(法華經) 수호(守護)의 범석(梵釋)·일월(日月)·사천(四天) 등(等)이 그토록 수호(守護)하지 않는다면 불전(佛前)의 서언(誓言)은 헛되어서 무간대성(無間大城)에 떨어지리라고 두렵게 생각하였기에 지금은 각자(各者)가 힘써 지키리라.
성인어난사(聖人御難事)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기원을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형식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러한 잡념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창제를 할 때 여러 가지 잡념이 떠오르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진지하게 제목을 불러 가면 자연스럽게 일념(一念)을 집중해 차츰 본존님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진지하게 기념하는 힘이 있다면 모든 생활의 고뇌가 해결됩니다.
『묘이치니부인답서(妙一尼夫人答書)』에도「대저 신심(信心)이라고 함은 별(別)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男便)을 아끼듯이 남편(男便)이 아내를 위해 목숨을 버리듯이, 부모(父母)가 자식(子息)을 버리지 아니하듯이, 자식(子息)이 어머니를 떨어지지 아니하듯이 법화경(法華經) 석가(釋迦) 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보살(諸佛菩薩)·제천선신(諸天善神) 등(等)을 신봉(信奉)하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것을 신심(信心)이라고 말하는 것이오.」(신편어서 p.1467)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존님을 향한 순수한 신심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부모(父母)가 자식(子息)을 버리지 아니하듯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듯이 그러한 마음으로 본존님께 철저히 귀명(歸命)할 때 본존님의 힘이 자신의 몸에 펑펑 넘쳐흐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어렵다면, 그러한 모습 자체가 바로 자신의 생명 상태와 신심의 정도 그리고 환희와 충실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본존님께 철저히 기원할 수 없다는 것은 언젠가 타성의 포로가 되고, 때로는 거만함의 성에 머무는 어리석은 생명 상태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디까지 강하고 깊고 철저하게 신앙에 귀명할 수 있는가와 기원할 수 있는가에 승부는 달려 있습니다. 어쨌든 있는 그대로 자기답게, 자신이 가장 원하는 일을 창제에 담아 기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어린아이가 어머니에 매달리며 때를 쓰듯이 본존님께 힘찬 제목을 올리면서 자기의 소원 성취를 간절히 기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니치렌대성인께서는『니치곤니부인답서(日嚴尼夫人答書)』에서「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음은 신심(信心)에 의(依)함이니, 결코 니치렌(日蓮)의 잘못이 아니로다. 물이 맑으면 달이 비치고, 바람이 불면 나무가 흔들리는 것과 같이 모두의 마음은 물과 같고, 신(信)이 약(弱)함은 탁(濁)함과 같으며, 신심(信心)이 순수(純粹)함은 맑은 것과 같다.」(신편어서 pp.1519~1560)라고 어지남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대어본존님은 우리들의 어떠한 소원이라도 다 이루어주시는 본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자신이 자기 소원 성취를 위해서 본존님 앞에 얼마나 간절하게 기원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즉 본존님의 위대한 공덕력을 확신하고 일념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해서 기원하는 그 자세를 가르켜서 본존님께 매달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신심입니다. 신행학을 착실히 닦아나가며 대어본존님께 간절히 기원하면 어떠한 일이라도 다 성취된다고 하는 것을 확신하고 본존님께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자세로 신심을 해 나갑시다.‘나는 반드시 괴로움을 해결한다’라고 굳게 결의하고 진지하게 기원하며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면 신뢰하는 선배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의 체험담을 듣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자신과 비슷한 괴로움을 신심으로 이겨 낸 체험담을 들으면 확신이 생깁니다. 또한 교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신심에 대한 확신을 깊게 합니다.
『니치뇨부인답서日女夫人答書』에「결단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봉창(奉唱)하여 부처가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라. 신심(信心)의 후박(厚薄)에 달려 있으며, 불법(佛法)의 근본(根本)은 신(信)으로써 근원(根源)으로 하느니라.」(신편어서 p.1388)고 있습니다.
여기서 부처가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부처는 어딘가로 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인격의 완성에서 되는 것이고 인간변혁으로 되는 것입니다.
어본존에 대한 무이(無二)의 신심 이외에 인간변혁, 인격의 완성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오로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이라는 일절(一節)을 깊이깊이 생명에 새겨갔으면 합니다.
본존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信)’의 마음이 있어야 소원이 이루어지고 모든 고난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존님을 믿고 부르는 제목의 공덕은 광대무변하고 그 공덕의 대소(大小)는 신심력(信心歷)이 길다든가, 짧다든가, 또 교학력이 있다든가 없다든가가 아니라 신심의 후박(厚薄)에 의하는 것입니다.
제목을 봉창함으로써 고뇌를 해결할 수 있으며, 즉신성불(卽身成佛)의 경애를 열고 절대적인 행복의 인생을 걸을 수 있음을 확신하고 실천해갑시다.진실(眞實)의 길은 세간(世間)의 사법(事法)입니다. 금광명경(金光明經)에는 「만약 깊이 세법(世法)을 알면 즉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이니라」고 설(說)해졌으며, 열반경(涅槃經)에는 「일체세간(一切世間)의 외도(外道)의 경서(經書)는 모두 이는 불설(佛說)로서 외도(外道)의 설(說)이 아니로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음을, 묘락대사(妙樂大師)는 법화경(法華經)의 제(第)六의 권(卷)의 「일체세간(一切世間)의 치생산업(治生産業)은 모두 실상(實相)과 위배(違背)하지 않느니라」고 하는 경문(經文)과 대조해서 뜻을 나타내시기를, 그들 이경(二經)은 심심(深心)한 경(經)들이지만, 그 경(經)들은 아직 심(心)이 깊지 못하여 법화경(法華經)에 미치지 못하므로 세간(世間)의 법(法)을 불법(佛法)에 빗대어서 알게 했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은 그렇지 않으며 바로 세간(世間)의 법(法)이 불법(佛法)의 전체(全體)라고 석(釋)해져 있느니라.
백미일표어서(白米一俵御書) 미노부에서 술작어본존에 대한 무이(無二)의 신심 이외에 인간변혁, 인격의 완성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오로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이라는 일절(一節)을 깊이깊이 생명에 새겨갔으면 합니다.
본존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信)’의 마음이 있어야 소원이 이루어지고 모든 고난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존님을 믿고 부르는 제목의 공덕은 광대무변하고 그 공덕의 대소(大小)는 신심력(信心歷)이 길다든가, 짧다든가, 또 교학력이 있다든가 없다든가가 아니라 신심의 후박(厚薄)에 의하는 것입니다.
제목을 봉창함으로써 고뇌를 해결할 수 있으며, 즉신성불(卽身成佛)의 경애를 열고 절대적인 행복의 인생을 걸을 수 있음을 확신하고 실천해갑시다.아무리 니치렌(日蓮)이 기원(祈願)을 한다 해도 불신(不信)한다면, 젖은 부싯깃을 대고 부시를 치는 것과 같이 될 것이니, 더욱 면려(勉勵)하여 강성(强盛)하게 신력(信力)을 다 내도록 하시라. 지난 번의 존명(存命)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고 생각하시라, 어떠한 병법(兵法)보다도 법화경(法華經)의 병법(兵法)을 쓰실지어다. 「제여원적(諸餘怨敵)·개실최멸(皆悉摧滅)」의 금언(金言)은 헛되지 않으리라. 병법(兵法) 검형(劍形)의 대사(大事)도 이 묘법(妙法)으로부터 나왔느니라, 깊이 신심(信心)을 취(取)하시라, 결코 겁이 많아서는 불가능(不可能)하니라. 공공근언(恐恐謹言).
시조깅고전답서(四條金五殿答書)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고혈압 예방과 치료를 위해 체중 감량, 저지방식, 저염식, 운동, 금연 등이 권장된다. 필요한 경우 약물 치료도 함께 해서 혈압을 낮춰야 한다. 대한뇌졸중학회 권고사항으로 뇌졸중 일차 예방을 위한 혈압 조절의 목표를 일반인은 140/90 mmHg 미만, 당뇨병과 신장 질환을 앓는 환자는 130/80 mmHg 미만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제목을 부르면 왜 힘이 난다고 하나요?
왜냐하면 제목을 부르면 자신의 생명을 변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에는 본래 부처와 동등한 존귀한 생명이 엄연히 갖춰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목을 봉창하게 되면 자기에게 숨겨진 부처의 생명을 구체적으로 자신의 생명과 생활에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 부처의 생명이 작용해 지혜와 용기가 나와 어떤 고뇌와 고난도 극복하고 어떤 일에도 무너지지 않는 행복경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창제는 다시 말해 부처의 생명이라는 태양을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게 하는 의식입니다이 어본존(御本尊)을 결코 타처(他處)에서 구(求)하지 말지어다. 다만 우리들 중생(衆生)이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흉중(胸中)의 육단(肉團)에 계시느니라. 이것을 구식심왕진여(九識心王眞如)의 도(都)라고 하느니라. 십계구족(十界具足)이라 함은 십계(十界)가 일계(一界)도 빠짐없이 일계(一界)에 있음이라, 이에 의(依)해서 만다라(曼陀羅)라고 하며 만다라(曼陀羅)라고 함은 천축(天竺)의 이름으로서 여기서는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고도 공덕취(功德聚)라고도 이름하느니라. 이 어본존(御本尊)도 다만 신심(信心)의 이자(二字)에 들어 있으니 이신득입(以信得入)이란 이것이니라.
니치뇨부인답서(日女夫人答書) 미노부에서 56세에 술작특히 콜레스테롤 수치가 같은 그룹의 사람들이라도 비만·고혈압·흡연 등의 위험 인자 중 몇 개를 가졌는지에 따라 심혈관 질환 위험도가 달라졌다. 총콜레스테롤 수치가 240㎎/dL 이상 그룹에서 위험 인자 0개일 때 심혈관 질환 위험도는 1.18배인 반면, 위험 인자가 1개 있으면 1.80배, 위험 인자가 2개일 땐 2.06배까지 높아졌다. LDL 콜레스테롤 수치가 150㎎/dL 이상인 그룹 중 위험 인자가 0개인 경우 심혈관 질환 위험도는 1.28배, 1개는 1.55배, 2개는 1.83배로 높아졌다.제목을 부르면 왜 힘이 난다고 하나요?
왜냐하면 제목을 부르면 자신의 생명을 변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에는 본래 부처와 동등한 존귀한 생명이 엄연히 갖춰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목을 봉창하게 되면 자기에게 숨겨진 부처의 생명을 구체적으로 자신의 생명과 생활에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 부처의 생명이 작용해 지혜와 용기가 나와 어떤 고뇌와 고난도 극복하고 어떤 일에도 무너지지 않는 행복경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창제는 다시 말해 부처의 생명이라는 태양을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게 하는 의식입니다.부처가 깨달으신 법을 중생이 자신 위에 체현(體現)하기 위해서 수행이 있는 것입니다.
수행을 힘써 행하는 것이 근행(勤行)이며, 특히 나날이 어본존을 향해서 독경·창제하는 수행을 근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법실상초(諸法實相抄)』에 「행학(行學)의 이도(二道)를 힘쓸지어다. 행학(行學)이 끊어지면 불법(佛法)은 없느니라. 나도 행(行)하고 남도 교화(敎化)하시라. 행학(行學)은 신심(信心)에서 일어나는 것이로다. 힘이 있는 한 일문일구(一文一句)라도 설(說)할지니라.」(신편어서 p.668)고, 일신(一信), 이행(二行), 삼학(三學)의 본종 신앙의 요체(要諦)를 교시하시고 있습니다.
근행을 기본으로 하는 수행의 중요성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근행은 강물이 흘러 끊임이 없듯이 언제나 꾸준한 리듬으로써 해야 하며 마치 불이 갑자기 타올랐다가 금세 꺼져버린 듯한, 또는 자기의 사정이나 그 때의 기분 여하로 했다가 안했다가 해서는 안됩니다.
『어의구전(御義口傳)』 에 「아침마다 부처와 함께 일어나고 저녁마다 부처와 함께 잠자다.」(신편어서 p.1749)라고 있듯이 날마다 우리 집의 어본존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또 어본존과 함께 하루를 끝내기 위해서는 매일 근행을 빠짐없이 행하는 일이 중요합니다.사자왕(師子王)은 전삼후일(前三後一)이라 하여 개미새끼를 잡으려 할 때나 또한 사나운 것을 잡으려 할 때나 힘을 내기는 매양 한 가지이니라. 니치렌(日蓮)이 수호(守護)의 어본존(御本尊)을 쓰는데 있어서도 사자왕(師子王)에 못지 않노라. 경(經)에 가로되 「사자분신지력(師子奮迅之力)」이란 이것이니라. 또 이 만다라(曼茶羅)를 정성껏 믿도록 하시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사자후(師子吼)와 같으니, 어떠한 병(病)인들 장해(障害)를 할 손가, 귀자모신(鬼子母神)·십나찰녀(十羅刹女)는 법화경(法華經)의 제목(題目)을 수지(受持)한 자를 수호(守護)하리라고 쓰였느니라. 행(幸)은 애염(愛染)과 같고 복(福)은 비사문(毘沙門)과 같이 되리라, 어떠한 곳에서 놀고 장난쳐도 탈이 없을 것이며, 유행(遊行)하여 두려움이 없음은 마치 사자왕(師子王)과 같으리라. 십나찰녀(十羅刹女) 중(中)에서도 고제녀(皐諦女)의 수호(守護)가 깊을 것이니라. 오직 신심(信心)에 달렸느니라. 검(劍)이라도 부진(不進)한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법화경(法華經)의 검(劍)은 신심(信心)이 강성한 사람만이 소용(所用)되는 것이며, 범에 날개가 돋힌 격이니라.
교오전답서(經王殿答書) 사도에서 52세에 술작어의구전(御義口傳)』 에 「아침마다 부처와 함께 일어나고 저녁마다 부처와 함께 잠자다.」(신편어서 p.1749)라고 있듯이 날마다 우리 집의 어본존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또 어본존과 함께 하루를 끝내기 위해서는 매일 근행을 빠짐없이 행하는 일이 중요합니다.⚫초좌, 제천공양(아침) (초좌에는 종을 치지 않음)
먼저 본존님을 향하여 제목삼창한 다음 동천(東天)을 향하여 제목삼창, 방편품과 여래수량품의 자아게를 독송한 후 인제목, 제목삼창을 한 후,
「생신묘각자행의 이익·대범천왕·제석천왕·대일천왕·대월천왕·대명성천왕 등 총합하여 법화수호의 제천선신·제천주야 상위법고 이위호지의 이익, 법미배증을 위하여」라고 관념하고 제목삼창 함
⚫이좌, 본존공양(아침, 저녁)
본존님을 향하여 종을 치고(이하 ‘종’이라고 함), 방편품을 마치고, ‘종’, 수량품의 장행, 자아게, 인제목을 마치고 ‘종’, 제목삼창 한 후,
「나무 본문수량품의 간심·문저비침의 대법·본지난사·경지명합·구원원초·자수용보신·여래의 당체·십계본유상주·사의 일념삼천·인법일개 독일본문계단의 대어본존, 위광배증이익광대 보은사덕을 위하여」라고 관념하고 제목삼창 함
⚫삼좌, 삼사공양(아침, 저녁)
‘종’, 방편품을 마치고 ‘종’, 자아게, 인제목을 마치고 ‘종’, 제목삼창한 후
「나무 본인묘의 교주·일신즉삼신·삼신즉일신·삼세상항의 이익·주사친삼덕 대자대비 종조 니찌렌대성인, 위광배증 이익광대 보은사덕을 위하여」라고 관념하고 제목삼창. 이어서
「나무 법수사병·유아여아·본문홍통의 대도사·제이조 뱌구렝아사리 닛고상인·위광배증 이익광대 보은사덕을 위하여」라고 관념하고 제목삼창, 이어서
「나무 일염부제의 좌주 제삼조 니이다교아사리 니찌모꾸상인, 위광배증 이익광대 보은사덕을 위하여 남묘호렌게교 남묘호렌게교 남묘호렌게교」라고 관념하고, 또 이어서
「나무 니찌도상인·니찌교상인 등 역대의 정사, 위광배증 이익광대 보은사덕을 위하여」라고 관념하고 제목삼창 함
⚫사좌, 광선유포기념(아침)
‘종’, 방편품을 마치고 ‘종’, 자아게, 인제목을 마치고 ‘종’, 제목삼창 한 후
「기념하옵니다. 일천사해 본인묘 광선유포의 대원성취를 위하여」라고 기원하고 제목삼창, 이어서
「모(이름) 과거 원원겁 현재만만의 방법 죄장소멸, 현당이세 대원성취를 위하여」라고 기원하고 제목삼창 함
(거듭 타(他)의 기원이 있을 경우에는 여기서 행함)
⚫오좌, 회향(回向) (아침, 저녁)
‘종’ 방편품을 마치고, ‘종’, 자아게, ‘종’ 창제에 들어감
‘종’, 창제를 마치고 제목삼창, 다음에 회향(회향 중 ‘종’을 침)
「모(이름) 선조대대 당종신앙의 면면·내득신앙의 면면, 각선조 대대제정령 추선공양 증대보리를 위하여, 남묘호렌게교」라고 회향을 마치고 제목삼창 함
(거듭 타(他)의 회향이 있을 경우에는 여기서 행함)
「내지 법계평등이익 자타구안 동귀적광」이라고 관념하고, ‘종’, 제목삼창으로 끝냄법화경(法華經) 제팔(第八)·다라니품(陀羅尼品)에 가로되 「그대들 단지 능(能)히 법화(法華)의 이름을 수지(受持)하는 자(者)를 옹호(擁護)하는 복(福)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이 문(文)의 의(意)는 부처가 귀자모신(鬼子母神)·십나찰녀(十羅刹女)가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수호(守護)하겠다고 맹세함을 칭찬하여 그대들이 법화(法華)의 수제(首題)를 갖는 사람을 수호(守護)하겠다고 맹세하는 그 공덕(功德)은 삼세요달(三世了達)의 부처의 지혜(智慧)도 역시 미치기 어렵다고 설(說)하셨느니라. 불지(佛智)가 미치지 않는 일이 무엇이 있으리요마는 법화(法華)의 제명(題名)을 수지(受持)하는 공덕(功德)만은 이를 모른다고 말했느니라. 법화일부(法華一部)의 공덕(功德)은 오직 묘법(妙法) 등(等)의 오자(五字)속에 들어 있느니라. 일부팔권(一部八卷)·문문(文文)마다 이십팔품(二十八品)이 생기(生起)는 다를지라도 수제(首題)의 오자(五字)는 동등(同等)하니라.
성우문답초(聖愚問答抄) 가마쿠라에서 44세에 술작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사람이면 보탑(寶塔)에 들어가느니라, 운운(云云). 또 가로되, 개불지견(開佛知見)의 불(佛)이란 구계소구(九界所具)의 불계(佛界)이고, 지견(知見)이란 묘법(妙法)의 이자(二字) 지관(止觀)의 이자(二字) 적조(寂照)의 이덕(二德) 생사(生死)의 이법(二法)이며 색심(色心) 인과(因果)니라. 결국(結局) 지견(知見)이란 묘법(妙法)이며, 구계소구(九界所具)의 불심(佛心)을 법화경(法華經)의 지견(知見)으로써 여는 것이니라. 이것으로써 이를 생각하니 (佛)이란 구계(九界)의 중생(衆生)을 말함이니라. 이 개각(開覺)이 나타나서 금신(今身)으로부터 불신(佛身)에 이르기까지 수지(受持)하느뇨, 않느뇨라고 나타내는 바가 묘법(妙法)을 나타내는 시불지견(示佛知見)이라 하느니라, 사제감응(師弟感應)해서 수취(受取)할 때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라고 깨달음을 오불지견(悟佛知見)이라 하느니라, 깨닫고 보면 법계삼천(法界三千)의 각각의 당체(當體)가 법화경(法華經)이니라
어의구전(御義口傳) 미노부에서 57세에 술작대음(大音)에 넣어서 봉창(奉唱)하므로 일대삼천계(一大三千界)에 도달(到達)하지 않는 곳이 없다."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는 몸 즉 체(體)와 같고 소리와 같아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제목을 봉창하는 소리는 전우주에 닿지 않는 곳이 없음.방편품의 ‘소위제법, 여시상, 여시성… 여시본말구경등’이라고 세 번 반복해 읽는 부분을 십여시(十如是)라고 합니다.
여시(如是)란 간단히 말하면 ‘진실하게 있는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사물의 진실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 움직임을 열 가지 종류로 구분하여 설하고 있는 것이 십여시입니다.
그런데, 십여시를 세 번 반복해 읽는 이유를 니치렌대성인님은 『일념삼천법문(一念三千法門)』에서「세 번 읽으면 공덕(功德)이 더하니라.」(신편어서 p.106)고 말씀하셨으며, 다음의 세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본존님을 향하는 자기 자신이 그대로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당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본존님을 향하는 자기 자신이 그대로 부처의 지혜를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본존님을 향하는 자기 자신이 그대로 현실 속 부처의 행위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측면을 기리기 위해 십여시를 세 번 읽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본존님의 훌륭한 공덕이 더해지고 자기 자신의 내면에 맑고 힘찬 부처의 생명을 용출시켜 행복으로 가득 찬 인생으로 열어 갈 수 있습니다.이들 법문(法門)을 깊이 깊이 밝히고 일부팔권(一部八卷)·이십팔품(二十八品)을 머리에 받들어 게으름없이 행(行)하시라. 또 내가 그리워질 때에는 나날이 해를 배례(拜禮)하시라. 나는 하루에 한번 천(天)의 해에 그림자를 비추는 자(者)로다. 이 승(僧)에게 읽게 하시어 청문(聽聞)하시라. 이 승(僧)을 해오(解悟)의 지식(智識)이라고 믿으시고 항상 법문(法門)을 묻도록 하시라. 듣지 않고서 어찌 미암(迷闇)의 구름을 없이 할 것이며 발이 없이 어찌 천리(千里)의 길을 가겠는가. 되풀이 되풀이 해서 이 서(書)를 항상 읽게 하여 청문(聽聞)하십시오
니이케어서(新池御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생각하실지어다, 법화경(法華經)을 아는 승(僧)을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뜻으로 한번이라도 공양(供養)한다면 악도(惡道)에 가지 않느니라. 어찌 하물며 열번·이십(二十)번 내지(乃至) 오년(五年)·십년(十年)·일기생(一期生)동안 공양(供養)하는 공덕(功德)은 부처의 지혜(智慧)로써도 알기 어렵도다. 이 경(經)의 행자(行者)를 한번 공양(供養)하는 공덕(功德)은 석가불(釋迦佛)을 직접 팔십억겁(八十億劫)동안·무량(無量)한 보(寶)를 다하여 공양(供養)한 공덕(功德)보다 백천만억(百千萬億) 뛰어났다고 부처는 설(說)하셨느니라. 이 경(經)을 만났으므로 기쁨은 몸에 넘치고 좌우(左右)의 눈에 눈물이 고여 석존(釋尊)의 은혜는 다 보답(報答)하기 어렵다. 이와 같이 이 산(山)까지 여러번의 공양(供養)은 법화경(法華經)과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은혜를 보답(報答)하게 되나이다. 더욱더 면려(勉勵)하시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느니라. 모든 사람이 이 경(經)을 믿기 시작할 때는 신심(信心)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중간쯤에는 신심(信心)도 약(弱)하고 승(僧)도 공경(恭敬)하지 않고 공양(供養)도 하지 않으며, 자만(自慢)하여 악견(惡見)을 하니 이는 두려워할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처음부터 끝까지 더욱더 신심(信心)을 해 나가시라. 그렇지 않으면 후회(後悔)하게 되리라. 비유(譬喩)컨대 가마쿠라(鎌倉)에서 교토(京都)까지는 십이일(十二日)의 도정(道程)이니라, 그런데 십일일(十一日)남짓 걸어가서 이제 일일(一日)을 남겨두고 걸음을 멈춘다면 어떻게 수도(首都)의 달을 바라볼 수 있겠느뇨. 어떻게 하든 이 경(經)의 뜻을 아는 승(僧)에게 가까이 하여 더욱더 법(法)의 도리(道理)를 청문(聽聞)해서 신심(信心)의 걸음을 옮길지어다.
니이케어서(新池御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어서문서 본문 중 807~808쪽 참조
"대저 법화경(法華經)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성불도(皆成佛道)의 요법(要法)이니라. 그러므로 대각세존(大覺世尊)은 설시(說時) 미지고(未至故)라고 설(說)하시어 설(說)해야 할 시절(時節)을 기다리시었다. 예(例)컨대 두견새가 봄을 그냥 보내고 닭이 새벽을 기다렸다가 우는 것과 같으니라. 이는 즉(卽) 시(時)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반경(涅槃經)에 가로되, 이지시고(以知時故) 명대법사(名大法師)라고 설(說)하셨느니라, 지금 말법(末法)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칠자(七字)를 홍통(弘通)하여 이생득익(利生得益)이 있는 시(時)이니라. 그러므로 이 제목(題目)에는 여사(餘事)를 섞으면 벽사(僻事)가 된다. 이 묘법(妙法)의 대만다라(大曼茶羅)를 몸에 가지고 마음에 염(念)하며 입으로 봉창(奉唱)해야 할 때이니라. 이에 따라서 일부(一部) 이십팔품(二十八品)의 정상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서품(序品) 제일(第一)이라고 제호(題號)를 붙였느니라.아침 초좌근행은 동쪽을 향해서 하게 됩니다. 아침근행을 할 때 초좌에서 동쪽을 향하는 것에 대해 일본을 숭상하는 동방요배 의식이 아닌가하는 잘못된 인식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근행시 초좌에서 동쪽을 향하는 것은 결코 일본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비롯한 제천선신(諸天善神)을 상징하는 ‘동천(東天)’에게 인사를 하며, 제목의 법미(法味)를 바치는 것입니다.
태양이 있는 방향을 향한다고 해서 태양 그 자체를 받드는 것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상징되는 제천선신에 대한 것입니다.
제천선신이란 특정한 중생이나 어떠한 물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는 사람을 수호한다고 하는 작용이며, 생명의 역용(力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역용은 대우주에 편만(遍滿)되어 있는 동시에 우리들의 생명 속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좌 의식은 대우주의 제천선신과 우리 생명 속의 제천선신이 서로 마주 보고 생명의 주체인 우리들이 제천선신의 위광세력(威光勢力)을 증대하도록 하기 위해 제목을 봉창한다고 하는 참으로 장엄한 의식인 것입니다.
초좌는 제천선신이 우리들을 항상 수호해 주는데 대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제목의 법미(法味)를 바치는 것입니다.일련정종 총본산 대석사의 대어본존님과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께 직결해서 사제불이의 불의불칙인 남묘호렌게쿄 제목을 올바르게 제대로 부른다는 것은 보통의 인연이나 복운으로는 만나기 너무나 어려운 대행운이라 봐야 할 것입니다.
과거 십만억의 부처를 공양한 공덕으로 이 위대한 비법을 불가사이하게 만나게된 우리들입니다.
어서말씀에 '일안의 거북'이나 삼천년만에 한번 피는 '우람바라화' 등으로 비유해주신대로 만나기 어려운 이 위대한 묘법을 천재일우로 만난 우리들 자신의 진면목을 미뤄 짐작하시면서 환희 중의 대환희의 불계의 생명으로 삶을 아름답게 장식해가면 될 것입니다.
최고로 행복해지는 남묘호렌게쿄 비법을 제대로 올바르게 실천해서 그 위력을 스스로 증명하고 그 증명된 체험과 실증들을 타인에게도 알려서 함께 다같이 빛나는 인간공화의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속에 지구촌의 평화낙토도 일체중생의 행복도 담보할 수 있게되고 세계광선유포도 실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선 중에 극선의 선순환의 흐름을 제대로 타고 또 그 흐름을 선도해갈 때 자연히 환희 중의 대환희의 경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일념(一念)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면 본래(本來)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느니라, 소위(所謂)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정진행(精進行)이니라."
어의구전(御義口傳) 790쪽 미노부에서 57세에 술작제일 중요한 것은 외도에 대비되는 내도 측면에서 일체의 일념을 올바르게 확실히 정하고 제대로 기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주체자 주관자 책임자가 자기자신이 되느냐가 제일 중요합니다.
신이나 부처 등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자신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곳곳에 남묘호렌게쿄 제목을 보내서 정화시키고 마음 구석 구석에도 남묘호렌게쿄 제목을 보내서 마음도 환희 중의 대환희의 자유자재의 생명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자연히 몸은 최고로 건강한 상태가 되어 비록 불치의 암에 걸렸다하더라도 반드시 낫게 되고 "또 三十三의 액(厄)은 전환(轉換)되어 三十三의 행(幸)으로 되시리라, 칠난즉멸(七難卽滅)·칠복즉생(七福卽生)이란 이것이니라, 나이는 젊어지고 복(福)은 쌓일 것이외다." 어서 1135쪽 말씀 처럼 더욱 활기넘치게 되고 복도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히 몸과 마음이 활력이 넘치고 희망에 넘쳐서 매순간 소원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되는 것이 우리들의 신심이자 이 비법을 실천해가는 이유인 것입니다.
외부의 어떤 존재에게 부탁하는 기원.기도가 아니라 색심불이(몸과 마음은 각각 따로 존재하고 있지만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생명원리에 의해 색심(몸과 마음)에 걸쳐서 스스로 최극의 불계의 생명을 용출시키고 열면서 동시에 주변환경의 일체도 불계를 용현시키면 의정불이(환경과 주체는 각각 따로 존재하고 있지만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생명원리에 의해 자기자신과 소원하는 바의 일체도 동시에 환희 중의 대환희의 최극의 불계의 생명으로 되야 모든게 가장 원만하고 소원하는 바대로 되는 것이 생명의 열림현상의 원리이자 올바른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또 중생(衆生)의 마음이 더러워지면 토(土)도 더러워지고 마음이 깨끗하면 토(土)도 청정(淸淨)하다고 해서 정토(淨土)라 하고 예토(穢土)라 함도 토(土)에 둘의 차이(差異)가 없으며, 오직 우리들의 마음의 선악(善惡)에 의(依)한다고 쓰여 있다. 중생(衆生)이라 함도 부처라 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 미혹(迷惑)할 때는 중생(衆生)이라 이름하고 깨달을 때는 부처라 이름했느니라. 비유컨대 암경(闇鏡)도 닦으면 옥(玉)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只今)도 일념무명(一念無明)의 미심(迷心)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명경(明鏡)이 되느니라. 깊이 신심(信心)을 일으켜 일야조모(日夜朝暮)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 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일생성불초(一生成佛抄) 384쪽 가마쿠라에서 34세에 술작
다이아몬드 원석은 대부분이 화려하거나 확 시선을 끌지 못하고 평범한 돌맹이로 보입니다.
세계적으로 우명한 다이아몬드는 원석을 가공하는데만 1년 이상이 걸려서 드디어 완벽한 귀품으로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됩니다.
우리들 생명도 닦지않은 거울 처럼 무명의 별 볼일 없는 하찮은 존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무명의 부분을 가공하듯 청소해내면 아름답게 빛나는 최고 모습으로 우뜩 자리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연마술 즉 생명연마의 구체적인 비결 즉 비법이 우리들의 신심인 것입니다.
이미 최고 원석은 누구나 생명에 갖추고 있습니다.
그것을 최고로 빛내는 제대로된 방법을 몰라서 일생을 허비할 뿐입니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마가 틈타서 일체를 파괴하게 되고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마성은 호시탐탐 생명을 파괴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부터 더욱 일념을 가다듬고 남묘호렌게쿄 제목을 올바르게 제대로 충분히 부르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모든게 기원하는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기에 대확신을 갖고 용맹하게 정진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크고 사명이 클 수록 매순간 더욱 더라는 일념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방심하거나 의심하는 순간 마가 틈을 타서 생명에 치명상을 입히거나 방해하게 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병마와 사마(죽음으로 몰고가는 마성)를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평소 올바른 일념을 갖고 남묘호렌게쿄 제목을 올바르게 제대로 충분히 불러서 스스로 환희 중의 대환희의 금강불괴의 불계의 생명상태를 유지해가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들이 그렇게 염원해왔든 그 때가 도래하여 바로 목전입니다.
우리 함께 지구촌의 평화낙토와 전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비법인 남묘호렌게쿄를 올바르게 제대로 실천해가는 인류의 구원자들 답게 지용보살의 본지를 밝히며 어본불 니치렌대성인님의 어유명대로 말법만년진미래제에 걸친 세계광선유포 실현을 위해 용맹정진해나가십시다.
감사합니다.니치렌(日蓮)이 먼저 대략 홍통(弘通)하느니라. 기필(期必)코 기필(期必)코 강성(强盛)한 대신력(大信力)을 다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임종정념(臨終正念)이라고 기념(祈念)하시라.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혈맥(血脈)은 이 외(外)에 절대(絶對)로 구(求)하지 말지니라,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란 이것이로다. 신심(信心)의 혈맥(血脈)이 없이는 법화경(法華經)을 가질지라도 무익(無益)하니라
생사일대사혈맥초(生死一大事血脈抄) 사도에서 51세에 술작법화경(法華經)에서는 범천, 제석, 일천, 월천 등의 천계의 신들이 법화경의 실천자를 지킬 것을 맹세하고 있으며, 우리가 매일 예배하는 어본존에도 그러한 제천선신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물론 이 제천선신은 스스로 의지를 갖고 존재하는 실체의 신(神)이 아니라 현상계에서 각종 사상의 작용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즉 우리 일념이 사회와 환경 등의 의보(依報) 상에서 반영되고 그것이 여러 가지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을 제천선신이라 하고, 그 반대적인 것을 악귀(惡鬼), 마신(魔神)으로 말한 것입니다.
우리 생명에 갖추어진 근본적 깨달음의 생명이 제천선신의 작용을 불러일으키고 반대로 근본적 미혹의 생명이 제육천의 마왕으로 작용합니다.
또 말할 것도 없이 제천선신 자체가 예배 대상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제천선신의 작용은 신심의 강약으로 결정됩니다.
본존님에 대한 신심이 강성하면 할수록 정보(正報)인 자신의 생명이 연마되고 그로 인해 의보(依報)인 환경에 강한 제천의 작용이 나타납니다. 열심히 신심하는 사람이 주위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는 것도 제천선신의 작용입니다.여러분은 제천선신(諸天善神)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일반적으로 어디서 뜻밖에 나타나 어려운 처지를 도와주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신(神)은 절대자로서 천지를 창조한 신(神)을 말하거나, 혹은 영웅적인 과거 인물이나 선조(先祖)를 신(神)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을 초월한 존재인 신(神)에 구제를 원하는 것은 이를테면 신비적인 절대자에게 몸을 맡기는 삶의 자세입니다.
이에 대해 부처는 본래 궁극적 진리를 깨달은 인간 각자(覺者)입니다. 불교는 모든 사람에게 부처의 생명이 있다고 설하고 자신 속에 있는 불성(佛性)을 계발해서 성불(成佛)을 지향할 것을 설합니다.
그러면 불교에서 설하는 제천선신(諸天善神)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제천선신은 범천, 제석, 일천, 월천, 명성천, 천조태신, 팔번대보살 등을 말하며, 정법을 수지하는 사람과 그 국토를 수호하고 복(福)을 주는 작용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제천선신이란 정법(正法)을 신수(信受)하고 광선유포를 위해 행동하는 사람을 수호하는 신(神)을 말합니다.
법화경(法華經)에서는 범천, 제석, 일천, 월천 등의 천계의 신들이 법화경의 실천자를 지킬 것을 맹세하고 있으며, 우리가 매일 예배하는 어본존에도 그러한 제천선신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물론 이 제천선신은 스스로 의지를 갖고 존재하는 실체의 신(神)이 아니라 현상계에서 각종 사상의 작용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즉 우리 일념이 사회와 환경 등의 의보(依報) 상에서 반영되고 그것이 여러 가지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을 제천선신이라 하고, 그 반대적인 것을 악귀(惡鬼), 마신(魔神)으로 말한 것입니다.
우리 생명에 갖추어진 근본적 깨달음의 생명이 제천선신의 작용을 불러일으키고 반대로 근본적 미혹의 생명이 제육천의 마왕으로 작용합니다.
또 말할 것도 없이 제천선신 자체가 예배 대상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제천선신의 작용은 신심의 강약으로 결정됩니다.
본존님에 대한 신심이 강성하면 할수록 정보(正報)인 자신의 생명이 연마되고 그로 인해 의보(依報)인 환경에 강한 제천의 작용이 나타납니다. 열심히 신심하는 사람이 주위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는 것도 제천선신의 작용입니다.
우리 순수한 신도의 존재가 우리에게 이미 제천선신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강성한 신심으로 생명력을 넘쳐흐르게 하여 제천선신의 힘을 발휘시켜 행복한 인생을 노래합시다.우리 순수한 신도의 존재가 우리에게 이미 제천선신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강성한 신심으로 생명력을 넘쳐흐르게 하여 제천선신의 힘을 발휘시켜 행복한 인생을 노래합시다.이 주(珠)를 방편품(方便品)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설(說)했고 비유품(譬喩品)에서는 대백우거(大白牛車)·삼초이목(三草二木)·오백유순(五百由旬)의 보탑(寶塔), 함께 모두가 일주(一珠)인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보주(寶珠)이니라. 이 경문(經文)은 색심(色心)의 실상환희(實相歡喜)를 설(說)하였다·견차주(見此珠)의 견(見)은 색법(色法)이요 기심대(其心大)라고 함은 심법(心法)이니라, 색심(色心)이 함께 환희(歡喜)이므로 대환희(大歡喜)라고 하느니라.
결국(結局) 차주(此珠)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 중생(衆生)의 심법(心法)이요, 따라서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보주(寶珠)이고 소위(所謂)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이제 말대(末代)에 들어와서 이 주(珠)를 나타내는 것은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이며, 소위(所謂) 미증유(未曾有)의 대만다라(大曼茶羅)야말로 진정(眞正)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보주(寶珠)이니라. 견(見)의 자(字)는 일본국(日本國)의 일체중생(一切衆生), 널리는 일염부제(一閻浮提)의 중생(衆生)이니라, 그러나 기심대환희(其心大歡喜)라고 할 때는 니치렌(日蓮)의 제자단나(弟子檀那) 등(等)의 신자(信者)를 가리키느니라, 결국(結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체달(體達)함이 기심대환희(其心大歡喜)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들 중생(衆生)·오백진점(五百塵點)의 하종(下種)의 주(珠)를 잃고, 오도(五道)·육도(六道)에 윤회(輪廻)하여 빈인(貧人)이 되었고 가까이는 삼천진점(三千塵點)의 하종(下種)을 버리고 비륜제도(備輪諸道)하였으니 이에 의(依)해서 빈인(貧人)이 되었다, 이제 석존(釋尊)을 만나 이 주(珠)를 찾아 낼 수가 있어서 본디와 같이 취득(取得)했으니 이런 고(故)로 심대환희(心大歡喜)했느니라. 말법(末法) 당금(當今)에 있어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보주(寶珠)를 수지(受持)해 받들고서 기심(己心)을 보건대 십계호구(十界互具)·백계천여(百界千如)·일념삼천(一念三千)의 보주(寶珠)를 분명(分明)히 구족(具足)하였느니라.
이는 오로지 말법(末法)의 요법(要法)인 제목(題目)이니라, 운운(云云).
어강문서(御講聞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빈인견차주(貧人見此珠) 기심대환희지사(其心大歡喜之事) 말씀에 가로되, 차주(此珠)란 일승무가(一乘無價)의 보주(寶珠)이며, 빈인(貧人)이란 하근(下根)의 성문(聲聞)이니라, 통틀어 일체중생(一切衆生)이니라. 결국(結局)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차주(此珠)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고 빈인(貧人)이란 일본국(日本國)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이니라. 이 제목(題目)을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심대환희(心大歡喜)했느니라. 그러므로 견보탑(見寶塔)이라고 하는 견(見)과 차주(此珠)와는 같은 것이며, 결국(結局) 차주(此珠)란 우리들 중생(衆生)의 일심(一心)이요, 일념삼천(一念三千)이니 이 경(經)을 만났을 때,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고 여는 것을 주(珠)를 본다고 하느니라. 이 주(珠)는 널리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심법(心法)이고 이 주(珠)는 체중(體中)에 있는 재용(財用)이니라, 일심(一心)에 삼천구족(三千具足)의 재(財)를 구족(具足)하였다. 이 주(珠)를 방편품(方便品)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설(說)했고 비유품(譬喩品)에서는 대백우거(大白牛車)·삼초이목(三草二木)·오백유순(五百由旬)의 보탑(寶塔), 함께 모두가 일주(一珠)인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보주(寶珠)이니라. 이 경문(經文)은 색심(色心)의 실상환희(實相歡喜)를 설(說)하였다·견차주(見此珠)의 견(見)은 색법(色法)이요 기심대(其心大)라고 함은 심법(心法)이니라, 색심(色心)이 함께 환희(歡喜)이므로 대환희(大歡喜)라고 하느니라.
결국(結局) 차주(此珠)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 중생(衆生)의 심법(心法)이요, 따라서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보주(寶珠)이고 소위(所謂)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이제 말대(末代)에 들어와서 이 주(珠)를 나타내는 것은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이며, 소위(所謂) 미증유(未曾有)의 대만다라(大曼茶羅)야말로 진정(眞正)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보주(寶珠)이니라. 견(見)의 자(字)는 일본국(日本國)의 일체중생(一切衆生), 널리는 일염부제(一閻浮提)의 중생(衆生)이니라, 그러나 기심대환희(其心大歡喜)라고 할 때는 니치렌(日蓮)의 제자단나(弟子檀那) 등(等)의 신자(信者)를 가리키느니라, 결국(結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체달(體達)함이 기심대환희(其心大歡喜)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들 중생(衆生)·오백진점(五百塵點)의 하종(下種)의 주(珠)를 잃고, 오도(五道)·육도(六道)에 윤회(輪廻)하여 빈인(貧人)이 되었고 가까이는 삼천진점(三千塵點)의 하종(下種)을 버리고 비륜제도(備輪諸道)하였으니 이에 의(依)해서 빈인(貧人)이 되었다, 이제 석존(釋尊)을 만나 이 주(珠)를 찾아 낼 수가 있어서 본디와 같이 취득(取得)했으니 이런 고(故)로 심대환희(心大歡喜)했느니라. 말법(末法) 당금(當今)에 있어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보주(寶珠)를 수지(受持)해 받들고서 기심(己心)을 보건대 십계호구(十界互具)·백계천여(百界千如)·일념삼천(一念三千)의 보주(寶珠)를 분명(分明)히 구족(具足)하였느니라.
이는 오로지 말법(末法)의 요법(要法)인 제목(題目)이니라, 운운(云云).
어강문서(御講聞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