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두 형제 이야기” 二人の兄弟の物語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부분은 누가복음 15장 11절~32절입니다. 여기에 보시면 3명의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먼저 아버지, 그리고
맏아들과 둘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우선 이 두 아들에 대한 기록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둘째 아들 이야기가 먼저 등장합니다. 이는 누가복음 15장 12절~24절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맏아들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그 다음 구절인 25절부터 32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이 이야기를 돌아온 탕자. 帰ってきた放蕩息子 라고 하여 주로 둘째 아들에 대해서 초점이 맞춰져 있고, 맏아들에 대한
기록은 덤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만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서 비교해본 구절의 분량, 그러니까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 이야기에 대하여 차지하고 있는 구절의 분량을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둘째 아들에 대해서는 12절~24절. 분량으로는 13절, 그리고 맏아들에 대해서는 25절~32절이니까 8절입니다. 비율로
본다면 둘째 아들에 대한 기록이 60%라고 한다면 맏아들에 대한 기록은 4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지요.
40%. 이는 덤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비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단순한 양의 비교에 의미가 있을까
하는 점부터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학자들 사이에 있어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 대략 33년 정도를 사셨다고 합니다만,
이 땅에서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보면, 공생애를 대략 30세 정도에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공생애 기간은 대략 3년 정도이고, 33세 경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후 3일 후에 부활하셔서 40일 간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사역은 3년이라는 기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이력서를 쓴다 하면 몇 년에
어디서 태어나서 어느 학교를 졸업하고 등등과 같은 내용이 있겠으나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10대 때 어디에 계셨는지,
20대 때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직업이 당시 목수였다고 하니까
아마도 요셉의 일을 도우시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은 할 수 있겠으나, 여기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고, 또한 근거가 없다 하더라도 별로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핵심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하셨던 3년 정도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3년이라는 기간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느껴지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대단히 짧은 기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처럼 무슨
인터넷이다 뭐다 해서 자신의 생각을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방법이 있었다면 모를까, 당시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년이라는 세월은 결코 여유로운 시간이라고 할
수 없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짧은 3년 동안에 이스라엘 여러 곳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시고 이적을 행하셨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는 그 짧은 시간을 쪼개서 말씀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가하게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말씀을 전하신 적이 없습니다. 1분 1초를 아끼시면서 반드시 필요한 말씀을 전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 두 형제 이야기 중에서, 돌아온 탕자, 즉 둘째 아들에 대한 비율이 60%인데 반해 맏아들에 대한
비중이 40%라고 한다는 것은, 맏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단순히 덤이 아닌,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이 두 형제 중에서 특히 맏아들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만, 이를 위해서는 당연하지만 60%에 해당하는
둘째 아들에 대한 내용을 빼놓고는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먼저 둘째 아들에 대한 부분을 간략히 살펴본 다음에, 오늘의 주인공인 맏아들에 대해서 조금 깊이 있게 생각해 봄으로
인해서, 여기에 담긴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둘째 아들 이야기입니다. 조금 길지만 성경 구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24절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24절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弟が父に、『お父さん。私に財産の分け前を下さい』と言った。それで父は、身代(しんだい)をふたりに分けてやった。
それから、幾日もたたぬうちに、弟は、何もかもまとめて遠い国に旅立った。そして、そこで放蕩して湯水のように財産を使ってしまった。
何もかも使い果たしたあとで、その国に大ききんが起こり、彼は食べるにも困り始めた。
それで、その国のある人のもとに身を寄せたところ、その人は彼を畑にやって、豚の世話をさせた。
彼は豚の食べるいなご豆で腹を満たしたいほどであったが、だれひとり彼に与えようとはしなかった。
しかし、我に返ったとき彼は、こう言った。『父のところには、パンのあり余っている雇い人が大ぜいいるではないか。それなのに、私はここで、飢え死にしそうだ。
立って、父のところに行って、こう言おう。「お父さん。私は天に対して罪を犯し、またあなたの前に罪を犯しました。
もう私は、あなたの子と呼ばれる資格はありません。雇い人のひとりにしてください。」』
こうして彼は立
ち上がって、自分の父のもとに行った。ところが、まだ家までは遠かったのに、父親は彼を見つけ、かわいそうに思い、走り寄って彼を抱き、口づけした。
息子は言った。『お父さん。私は天に対して罪を犯し、またあなたの前に罪を犯しました。もう私は、あなたの子と呼ばれる資格はありません。』
ところが父親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急いで一番良い着物を持って来て、この子に着せなさい。それから、手に指輪をはめさせ、足にくつをはかせなさい。
そして肥えた子牛を引いて来てほふりなさい。食べて祝おうではないか。
この息子は、死んでいたのが生き返り、いなくなっていたのが見つかったのだから。』そして彼らは祝宴を始めた。
보통 우리가 생각하기로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받을 때가 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유산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도 물론 어느 정도 자금을 도와달라거나 하는 말씀을 드릴 수는 있겠습니다만, 이 둘째는 단순히
돈을 어느 정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재산 중에서 자기가 받을 몫을 달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 말은 무엇이냐 하면 쉽게 말해서, 아버지가 지금은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셨을 때 내가 받을 유산을 미리 앞당겨서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상식적으로 보아 문제가 많은 짓입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여기에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그냥 나누어 줍니다. 아마도 이 아버지는 부자였나 보지요. 그 많은 돈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낭비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허더라도 펑펑 돈을 쓰면 언젠가는 없어집니다. 거기에다가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불황, 불경기가 되겠지요.
자, 지금까지 돈을 벌 줄은 모르고 쓸 줄만 알았던 둘째 아들, 돈이 떨어졌으니 일을 하려고 합니다만 불황까지 겹치고 말았으니,
그렇잖아도 줄어든 일자리에다가, 아무런 경력도 없는 그가 제대로 된 곳에 취직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그는 먼 나라로 갔다고 하는데, 15절에 보니 돼지를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율법으로 인해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안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이 돼지를 기르는 일은 없었지요. 하지만 그 곳은 먼 나라에
다가 돼지를 치고 있었다고 하니, 분명 외국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지금 경기가 안 좋아지면 자기 나라 사람들도 일자리가 없어지는데, 어디인지 모르는 외국에서 온 사람, 그 뿐만이 아니라 경험도 없고
이제 가진 돈도 다 떨어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정말 밑바닥 일, 이스라엘에서는 해 보지도 않았던 일,
그 일을 하는 것을 본 적도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돼지 치는 일을 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지만 근로환경이 그리 좋지는 않았나 봅니다. 너무나 배가 고픈데, 넉넉하게 먹을 수가 없어요. 아마도 혹독한 종살이를 하지 않았나
합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은 돼지 사료로 쓰였던 쥐엄 열매를 먹으려고 해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인생
밑바닥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비로소 과거 생각을 합니다. 내가 큰 죄를 지었구나. 내가 육신의 아버지에게 만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 정복 당시 각 지파마다 땅을 할당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도외시하고 그는 먼 나라로 떠났던
것이었지요. 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그는 생각합니다. 내가 당연히 가지고 있는 줄 알았던 그 아들이라는 자리.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아버지 집에서의 생활. 그
때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와 같은 생활이 알고 보니 놀라울 정도로 큰 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 다시 올라갈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 집에서 가장 밑바닥 종으로 산다 하더라도 지금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래.
돌아가자.
그는 깨달았습니다. 과거에는 자신이 죄인인 줄 몰랐지만, 이제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과거에는 아버지 아들이라는
것이 대단한 줄 몰랐지만, 이제 그 자리가 얼마나 놀라운 자리인지, 얼마나 은혜로운 자리인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습니다. 아니, 딱 하나 버릴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존심이었습니다. 어쩌면 돈을 낭비하고 가진 것이 없어졌어도, 하물며 돼지를 치는 일까지 하면서도 그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이유, 그 때까지 집으로 향하려던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은 바로 다름 아닌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부잣집 아들로서 떵떵거리며 주인행세를 해왔었던 그가, 이제 가진 것 하나 없이 빈털터리로 돌아가서 종살이를 하게
된다면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결심합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버리고는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저를 그냥 품꾼으로라도
받아주십시오. 이 말은, 종으로 고용되면 그나마 다행이지요.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품꾼으로
받아달라는 것은, 종도 아닌, 종의 아르바이트로라도 받아 달라. 말하자면 비정규직 종살이 아르바이트라도 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래. 네가 그래도 과거에 내 아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서 원래는 1년짜리 계약인데 너는 특별히
3년짜리 종살이 아르바이트로 고용해주겠다고 했나요?
여기 20절을 보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누가복음 15장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こうして彼は立
ち上がって、自分の父のもとに行った。ところが、まだ家までは遠かったのに、父親は彼を見つけ、かわいそうに思い、走り寄って彼を抱き、口づけした。
여기에 보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그를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냥 우연히 아버지가 잠깐 밖에
나왔을 때 아들을 보고 달려왔다는 것일까요?
가까이 있으면 의식하지 않더라도 무엇이 있는지, 누가 거기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거리가 먼 곳에 있다는 것은 의식하지
않으면 안 보일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아들이 먼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보았다는 것은, 아버지는
그 아들에 대해서 한 시도 잊지 않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침이나 낮이나 저녁이나 밤이나,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는데도 상속분을 달라고 해서 먼 나라로 가버린 둘째 아들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그 둘째 아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녀석은 남들보다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요, 제대로 일을 해서 돈을 벌 수도 없을 텐데,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나갔더라도 얼마
못 되어서 지금쯤은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을 텐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도 없으니 어떻게 되었을까. 어디서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을까. 이제 돌아올 때도 되었는데, 왜 아직 안 돌아올까 하고 내내 그 아들 걱정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돌아온 아들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22절을 봅니다.
누가복음 15장 22절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ところが父親は、しもべたちに言った。『急いで一番良い着物を持って来て、この子に着せなさい。それから、手に指輪をはめさせ、足にくつをはかせなさい。
빈털터리가 된 그가 좋은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겠지만, 이 사람의 몰골은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종들에게 명하기를 “발에 신을 신기라”라고 했습니다. 즉, 먼 나라에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신발도 신지
않고 걸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그 모습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그토록 애타게 아들을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는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십시다. 이는 과거의 모든 지위를 회복해주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큰 잔치를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잔치는 기쁨이 넘치는 잔치입니다. 과거의 모든 슬픔이 사라지고 놀라운 은혜로 충만한 잔치였을 것입니다.
자, 여기서 이 이야기는 얼마든지 해피 엔딩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충분히 완벽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 맏아들이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5장 25절~32절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ところで、兄息子は畑にいたが、帰って来て家に近づくと、音楽や踊りの音が聞こえて来た。
それで、しもべのひとりを呼んで、これはいったい何事かと尋ねると、
しもべは言った。『弟さんがお帰りになったのです。無事な姿をお迎えしたというので、お父さんが、肥えた子牛をほふらせなさったのです。』
すると、兄はおこって、家に入ろうともしなかった。それで、父が出て来て、いろいろなだめてみた。
しかし兄は父にこう言った。『ご覧なさい。長年の間、私はお父さんに仕え、戒めを破ったことは一度もありません。その私には、友だちと楽しめと言って、
子山羊一匹下さったことがありません。
それなのに、遊女におぼれてあなたの身代を食いつぶして帰って来たこのあなたの息子のためには、肥えた子牛をほふらせなさったのですか。』
父は彼に言った。『子よ。おまえはいつも私といっしょにいる。私のものは、全部おまえのものだ。
だがおまえの弟は、死んでいたのが生き返って来たのだ。いなくなっていたのが見つかったのだから、楽しんで喜ぶのは当然ではないか。』」
맏아들이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자 집에서 무슨 신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 종한테 물었더니 당신의 동생이 무사히
돌아와서 아버지가 큰 잔치를 벌였다고 하자, 이 맏아들. 오오! 그렇게 걱정했던 사랑스러운 내 동생이 돌아왔구나! 하고 반갑게
맞았대요? 아니요. 대단히 화를 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아니, 아버지. 이게 지금 어떻게 된 노릇입니까. 평생 동안 열심히 아버지를 섬겨온 나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안
해주었으면서, 아버지의 재산을 펑펑 쓰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는 이렇게 크게 잔치를 벌인다는 게 말이 됩니까. 뭐 이렇게 아버지에게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맏아들의 말로 비추어본다면 다음과 같은 추측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그는 동생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요. 분명 그 동생은 잘못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아버지가 아직 멀쩡하게 살아계신 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속분을 먼저 달라고 한 잘못.
둘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을 버리고 이방 나라로 가버린 잘못.
셋째로,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허랑방탕했다, 즉, 그 많은 돈을 바람직하지 않은 데에 다 써버리고 말았다고 하는 잘못.
뭐, 이 정도면 맏아들이 동생을 미워할만한 이유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놈이 돌아왔다고 한다면,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면서
내쫓아버려도 모자랄 판에, 아니면 그 돈을 다 갚을 때까지 평생 종살이를 시켜도 모자랄 판에, 집에 들여보내고는 큰 잔치를 베풀어요?
아버지,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일입니까?
이렇게 지금 맏아들은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시나요? 아니요. 이상하다니요.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요. 동생이 뭘 잘했다고 이렇게 환영만찬까지 베풀고 그러십니까.
이러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 31절~32절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父は彼に言った。『子よ。おまえはいつも私といっしょにいる。私のものは、全部おまえのものだ。
だがおまえの弟は、死んでいたのが生き返って来たのだ。いなくなっていたのが見つかったのだから、楽しんで喜ぶのは当然ではないか。』」
여러분, 종이 아닌 아들로서, 그것도 맏아들로서 아버지 집에 있다는 것은 아버지 소유가 곧 자신의 소유였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는
아들한테까지도 재산을 나누어주었을 정도로 인자하신데, 하물며 같은 집에 있는 아들에 대해서 재산을 아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동생은 인생의 밑바닥을 보았습니다. 나에게 돈만 있으면 아버지를 떠나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습니까. 얼마 못 가서 참으로 비참하게 되었지요. 이 동생은 이제 깨달았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아버지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큰 은혜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는 절대로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왜 집을 나갔겠습니까.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나갔을 것입니다. 이제 동생은 자신이 과거에 가졌던 불만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토록 뼈저린 경험을 동생이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잘못된 불만을 갖지는 않겠지요.
반면 맏아들은 어떻습니까. 집을 나가는 동생을 바라보는 형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저런 나쁜 놈. 아니, 누구는 불만이 없는 줄아?
누구는 안 나가고 싶어서 안 나가는 줄 알아? 뭐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던 그가 동생에 비해 의롭게 보일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어쩌면
맏아들은 동생이 집을 나가기 전의 모습, 그 때 동생이 가지고 있던 불만을, 형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만약에 동생이 먼 나라에 가고 오랫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면 어떻게 해야 마땅합니까. 돈이 많은 집이었다면 종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동생이 집을 나가고는 이렇게 몇 년째 돌아오지도 않고 소식도 없으니 몇몇 종들을 시켜서 알아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생이 무사히 돌아와서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한다면, 아버지, 동생 모습을 보십시오. 몇 년째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송아지 한 마리 가지고 어디에 붙입니까. 그러지 마시고 지금 제가 가진 송아지 두 마리를 더 잡아서
오겠습니다……이래야 사랑스러운 형의 모습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맏아들은 몰랐습니다. 무엇을 몰랐습니까. 그렇습니다. 감사를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모습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없이도, 예수님 없이도,
돈만 있으면, 세상적인 힘만 있으면 잘살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세상 속에서 절망하고 좌절하셨습니까. 모든 것을 잃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니, 과거의 자신이 저지를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믿는 일이 귀찮은 일인 줄 알았는데, 이제 주님을 믿는 일이
은혜롭게 느껴지십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여러분은 둘째 아들입니다. 그런 여러분께 말씀 드립니다. 그 동안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그러나
축하 드립니다. 진정한 주님의 사랑을 깨달으셨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깨달으셨습니다.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지 말라고 해도
돌리시겠지만, 남은 인생,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감사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한편, 내가 지금 별로 행복하지 않은 것 같습니까. 내 주위를 돌아보아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만한 게 별로 없을 것 같으십니까.
하나님이 없더라도, 돈이나 세상적인 힘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죄를 짓고 돌아온 사이나 ,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이해할 수가 없고 사랑스럽지도 않고 가엾게 느껴지지도 않습니까.
조심하십시오. 당신은 얼마든지 둘째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저지른 잘못을 똑같이, 아니 더 심하게 저지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을 해야 합니다. 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그 수많은 고생을 하고 난 다음에 둘째 아들이 깨달은 감사를 깨닫게 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귀에는 들리지 않고 손에는 잡히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해주신다는 기쁨으로 충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넘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놀라운 큰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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