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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174권 / 묘갈명(墓碣銘)
창랑(滄浪) 성공(成公) 묘갈명 병서(幷序)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국조(國朝)의 명족(名族)이다. 어떤 본에는 이 밑에 “세상에서 군자가 많이 났다.[世稱多君子]”라는 다섯 자가 더 있다. 그러나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을 조부로 하고 우계 성혼(牛溪, 成渾)을 아버지로 한 창랑공 만큼 자랑스러운 이는 또 없을 것이다.
공의 휘는 문준(文濬)이요, 자는 중심(仲深)이다. 공은 행실이 올바르고 문예 또한 뛰어나서 더 위대하고 더 빛이 있었을 것 같은데도 어딘가 조금 손색이 있는 것은 다른 본에는 ‘공은 행실이……’ 이하 23자가 없다. 아마도 두 선생의 후손이어서, 그 아들 그 손자 되기가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을까.[難爲子與孫歟] 공이 이미[公旣] 다른 본에는 여(歟) 자가 이(而) 자로 되어 있다.
공기(公旣)를 유공(惟公)으로 표기하였다. 조심스럽게 선법(先法)을 지키고 뜻을 돈독히 하고 실천에 노력하여 소생(所生)을 욕되지 않게 하였으니 다른 본에는 이 밑에 즉(則) 자가 있다. 두 선생이야말로 아들과 손자를 두었다고 할 수 있겠다.
청송 선생은 문정공(文正公) 조정암(趙靜菴 조광조(趙光祖))의 높은 제자였고, 우계 선생은 그의 전통을 이어받은 데다 또 율곡 이 선생과 벗이 되었으니 도학(道學)의 정통이 낙건(洛建)의 연원을 이어받았다. 공이 가정에서 배우다가 청송 선생을 모시게 되었을 때 나이 10여 세였는데 율곡이 그의 시를 보고는 문장(文章) 재질이 있다고 하였고, 우계 역시 시를 읊어 기쁨을 표시하였다.
그후 학문에 열중하다 병이 났지만 그렇다 하여 잠시도 학문을 폐한 일이 없이 마침내 백가(百家)에 정통하였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가 학식이 해박하다고 자부하여 애강남(哀江南)을 주석하였는데 공이 잘못된 부분을 정정하였고, 또 두율(杜律)을 주평(註評)하였다.
그후 국내 서적이 난리 통에 불타 없어진 것이 많아, 혹 공에게 고사(故事)를 묻는 이가 있으면 그때마다 공은 즉석에서 대답하니 당시 사람들이 공을 찾아 취결(取決)하는 것이 마치 동진(東晉) 시대의 조하(刁賀) 같았다. 어떤 본에는 ‘차오산(車五山)’에서부터 이하 54자가 없다.
27세 때 사마(司馬)에 합격하고 연은전(延恩殿)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며 또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 익위사에서는 세자(世子)가 출타할 때면 전도(前導)를 맡고 강관(講官)이 회강(會講)할 때면 뜰 아래서 시립(侍立)하였는데, 공이 있을 때 와서는 강관이 자리에 올라와 함께 회강에 참여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니 그것은 공이 경술(經術)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군소배(群小輩)들이 우계 선생을 모함하자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그후 폐조(廢朝) 16년 동안 임천(林泉)을 나서 본 일이 없었다. 다른 본에는 이 밑에 “상당한 서술을 남겨 세교(世敎)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언젠가 족성(族姓)에 대하여 기록한 글에서 ‘모든 전기(傳記)를 살펴보면 중국에서는 동성(同姓)을 가장 소중히 여겨서 혹 자기와 원(源)이 다르다 하여 서로 혼인하는 경우가 있으면 군자(君子)가 아주 잘못된 일로 친다.’ 하여 자기 족인(族人)이 그것을 범하는 일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었다.” 한 말이 있다.
공(公)이 다른 본에는 공(公) 자가 없고 또 일찍이[又嘗]의 두 글자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은사(殷師 기자(箕子)를 말함)를 숭보(崇報)하는 일이 전혀 법도가 없다 하여 대종백(大宗伯 예조 판서(禮曹判書))에게 의물(儀物)을 더 갖출 것을 청하고, 또 그의 후예인 선우씨(鮮于氏)를 뽑아 임명하여 대대로 제사 모시기를 임금을 받드는 예와 같이 하도록 하여 그 일이 실행을 보았다.
인조(仁祖)가 즉위하여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를 제수하니, 공이 순자(循資)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글월을 올려 사퇴하였다.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내 그대 이름을 들은 지 오래되었다.”하였고, 그가 죽자 상이 또 배운 것을 다 쓰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겼다.
영동 현감(永同縣監)으로 나갔다가 2년 만에 돌아왔는데 영동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옛날 그분, 옛날 그분[古之人古之人]하며 칭송하고 있다.’ 다른 본에는 “옛날의 순덕(醇德)이다.[古之醇德]”라고 되어 있다. 천계(天啓) 병인년(1626, 인조 4) 1월 29일, 68세로 졸(卒)하니 장단부(長湍府) 사당동(社堂洞)에 장사하였다.
어머니는 다른 본에는 이 아래 ‘정경부인 고령(貞敬夫人高靈)’이란 6자가 더 있다. 신씨(申氏)로 중종(中宗) 때 명신 용개(用漑)의 손녀이고 첨정(僉正) 여량(汝樑)의 딸이다. 배위는 다른 본에는 이 아래에 ‘의인(宜人)’이란 2자가 더 있다. 함안 조씨(咸安趙氏)인데, 그의 아버지 주부(主簿) 감(堪)이 우계 선생과 매우 사이가 좋았다.
다른 본에는 이 아래에 “의인(宜人)이 부덕(婦德)이 있고 사리를 잘 알아 우계 선생으로부터 현부(賢婦)라는 칭찬을 받고 모든 집안일을 많이 그와 상의하였으며 늘그막에는 언문으로 선생의 행장(行狀)을 번역하여 손자들에게 읽혀 훌륭한 점을 본받게 하였다.” 한 말이 있다.
아들 역(櫟)은 첨정(僉正)이요, 익(杙)은 별좌(別坐)요, 직(㮨)은 첨지(僉知)이며, 대사성(大司成) 신민일(申敏一)과 안후지(安厚之)ㆍ윤정득(尹正得)은 그의 사위들이다. 손자 희적(煕績)은 현령(縣令), 희주(煕胄)는 현감(縣監)이다.
그리고 희집(煕緝)ㆍ희명(煕命)이며, 딸 셋은 배유화(裵幼華)ㆍ홍이원(洪爾遠)ㆍ김용서(金龍瑞)에게 시집갔는데 이들은 모두 첨지의 소생으로, 희주는 첨정의 뒤를 이어 종사(宗祀)를 맡았다. 증손은 지선(至善)ㆍ지행(至行)ㆍ지민(至敏)ㆍ지화(至和)ㆍ지인(至仁)ㆍ지중(至重)ㆍ지원(至遠)ㆍ지건(至健)ㆍ지수(至粹)ㆍ지후(至厚)ㆍ지헌(至憲)이고, 나머지는 아직 이름이 없으며, 신 대사성(申大司成)의 아들은 상(恦), 손자는 명규(命圭)인데 다 시종관(侍從官)이고, 딸은 조익(曺瀷)의 아내로서 남다른 행실이 있었다.
다른 본에는 시종관(侍從官) 다음에 “안씨의 아들 전(峑)과 음(崟) 두 사람은 진사, 회(山+會)는 좌랑(佐郞)이고 윤씨의 아들은 영(韺)이다. 후손들이 모두 순박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였으며, 여자들은 더욱 지성(至性)을 지닌 이가 많아 대사성의 딸 같은 이는 조익(曺瀷)의 아내가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남보다 뛰어난 행실이 있었으므로 옛날의 절부(節婦) 같다고 칭하는 이가 있었고, 손녀는 김씨의 아내가 되었다.” 한 말이 더 있다.
공이 남긴 몇 권의 문집(文集)이 집에 간직되어 있고, 또 태극변(太極辨)과 홍범의(洪範義)가 있다. 공이 원래 바탕이 아름다운 데다 남다른 가정 교훈까지 겸하였으니 다른 본에는 ‘홍범의(洪範義)’ 아래에 “공이 죽은 후에 그 집안에서 공의 법도를 계승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행실을 돈독히 하는 일이야 공으로서 쉬운 일이었겠지만 거기에다 또 문예(文藝)까지 곁들였으므로 다른 본에는 “문덕의 아름다움을 겸하였다.[兼之以文德之懿]”라는 말이 더 있다. 공에 승복한 이로는 이를테면 송강 정철(鄭澈)ㆍ청풍(淸風) 김권(金權)ㆍ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ㆍ추포(秋浦) 황신(黃愼)ㆍ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같은 이들이 있었고 다른 본에는 ‘이를테면(有如)’ 이하 26자가 없고 모두 일시의 명현[皆一時名賢]이란 5자만 있다.
또 다른 본에는 ‘이(而)’ 자 아래에 지어(至於) 2자가 더 있다.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계곡(谿谷) 장유(張維) 같은 이는 또 그의 문(文)을 근세에 드문 글이라고 하였다. 대개 사람들이 공을 추중하는 까닭이 청송과 우계 때문에 더한 점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두 선생 때문에 공에게 기대하는 바도 더욱 구체적인 것이었으니 만약 공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계(沙溪) 김 선생은 공이 음양(陰陽)이 소장(消長)하는 마당에 있어 처신을 매우 불분명하게 한다 하여 준엄하게 꾸짖고, 또 남에게 공을 잘 보살펴 주도록 간곡한 부탁까지 하였으니, 선현(先賢)의 풍의(風誼)가 정답고도 두터웠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또 공으로서도 그것을 감당 못할 처지는 아니었으나 언젠가 서신으로 제공(諸公)들에게 정중한 태도로 양보했던 것으로 보아 자기 자신을 굽히기에 인색하지 않았으니, 그 역시 법문(法門)에서 물려받은 법도요 교훈이리라.
이성보(李誠父)ㆍ오백풍(吳伯豐)이 일찍이 주자(朱子)의 문하에서 의심을 받은 일이 있었지만 끝내는 명인(名人)이 되었으니 한때 잘잘못을 가지고 이 세상 선비들을 규정지을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다른 본에는 ‘대개 사람들이[盖人]’ 이하 136자가 없다.
삼가 《우계집(牛溪集)》을 보면 그 속에 선생이 처음에는 공이 일에 있어 잘 모르는 것을 병통으로 여기다가 얼마 뒤에는 다른 본에는 ‘공 이하 …… 병통으로[公病]’ 11자가 없다. 이르기를, “순후하고 욕심이 적으며 또 의리(義理)를 알고 있어, 그렇게 아름다운 기질(氣質)은 얻기가 어렵다고 하겠다.”하였고, 또 송강(松江) 다른 본에는 ‘정(鄭)’ 자가 더 있다.
....에게 말하기를, “그의 효성과 우애는 나도 따를 수가 없다.”하였으니 아, 우계 선생이야말로 《대학(大學)》의 도(道)에 많은 공력을 쏟은 이로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여 치우치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아마도 공을 제일 잘 아는 이는 선생이었을 것이다.
다른 본에는 ‘아[嗚呼]’ 다음서부터 우계(牛溪) 이하 29자가 없고 “공은 부자간이면서 서로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公可謂父子間知己者耶]” 한 10자가 더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창랑공이 아버지[父] 다른 본에는 고(古) 자로 되어 있다. 글을 읽고 / 滄浪公讀父書
효우에 힘 쓰고 충신을 주장하면서 / 惇孝友忠信居
시와 문은 여사로 여겼다 / 詩與文以其餘
아버지 말씀, 아들이 일[事]에는 다른 본에는 세(世) 자로 되어 있다. 어두워도 / 父曰子於事疎
그 행실은 나도 못따른다 하였네 / 乃其行吾不如
그 아버지는 누군가 파옹 아니던가 / 其父誰坡翁歟
정자 주자 배우고 자사 증자 추모했으니 / 學程朱溯思輿
법도 있는 그의 말 나를 속일 이치 있겠나 다른 본에는 이 한 대문이 없다. / 言有物豈欺余
공을 알고 싶거든 이 말을 보면 되리 / 欲知公此可於
<끝>
[각주]
[주01] 낙건(洛建) : 낙양(洛陽)과 건녕(建寧)이다. 즉 낙민(洛閩)과 같은 뜻으로 낙양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와 민중(閩中)의 주희
(朱熹)를 말한다.
[주02] 애강남(哀江南) : 《초사(楚辭)》 초혼편(招魂篇)의 맨 끝 구절이다. 여기서는 초혼편 전체를 말한 것이다.
[주03] 조하(刁賀) : 진(晉)의 조협(刁協)과 하순(賀循)이다. 원제(元帝)가 남도(南渡)한 후 조정이 초창기가 되어 모든 제도가 제대로 정
비되지 않았을 때 두 사람 모두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기억력으로 조정의 모든 자문에 응하여, 당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주04] 연은전(延恩殿) : 덕종(德宗)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이다. 성종(成宗)은 자기 아버지를 덕종(德宗)이라 추존하고 따로 경복궁(景
福宮) 안에다 연은전을 지어 그의 위패를 모셨다.
[주05] 순자(循資) : 관리 승진(昇進)의 한 표준이다. 관리를 승진시킬 때는 반드시 그가 그 직책에 얼마나 있었는가를 표준으로 하여 일정
한 자격을 갖춘 데 따라 승진시키는 제도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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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滄浪成公墓碣銘 幷序
昌寧成氏。爲國朝名族。一本。此下有世稱多君子五字。 然以聽松爲祖。以牛溪爲父。又未若滄浪公之盛也。公諱文濬。字仲深。公行義文藝。亦出等夷。宜若益大以光。而顧有所遜焉者。豈 一本。無公行以下廿三字。 二先生脚下。難爲子與孫歟。公旣 一本。歟作而。公旣作惟公。 謹守先法。篤志力行。不忝所生。一本。此下有則字。 二先生眞可謂有子有孫矣。蓋聽松先生。靜庵趙文正公高弟。牛溪先生得其傳。而又與栗谷李先生爲友。道學之正。最得洛建淵源。公學於家庭。及事聽松先生。年十餘。栗谷見其詩。以爲有文章才。牛溪亦作詩以志喜。後以劬書致疾。然亦未嘗暫廢。遂淹貫百家。車五山天輅自負該洽。註哀江南。公訂其訛誤。又有杜律註評。後國中書籍遭亂焚失。有以故事問者。公應口對。時人取決。如東晉之力賀也。一本。無車五山以下五十四字。 二十七。中司馬。拜延恩殿參奉。又爲世子翊衛司洗馬。翊衛司。世子出則前導。講官會講則侍立階下。至是講官請令陞座備講。蓋爲公有經術也。俄而群小誣牛溪。公遂謝歸。仍廢朝十六年。不出林泉。一本。此下云頗有敍述。裨補世敎者多矣。嘗記族姓書曰。歷考傳記。中國最重同姓。有以源異而通婚者。則君子非之。深以其族人之犯此爲恥焉。 公 一本。無公字。有又嘗二字。 以我東崇報殷師。全然鹵莽。請於大宗伯增修儀物。且差其裔鮮于氏。世奉其祀。如奉聖侯例。其事遂行。仁祖卽位。拜司圃署司圃。公以非循資上章辭。上不許曰。予聞名久矣。及公歿。上又惜其未究於用。出爲永同縣監。二年歸。永之人至今稱之曰。古之人古之人。一本云古之醇德也。天啓丙寅。年六十八。正月二十六日卒。葬于長湍府社堂洞。妣 一本。此下有貞敬夫人高靈六字。 申氏。中廟朝名臣用漑之孫。僉正汝樑之女。配 一本。此下有宜人二字。 咸安趙氏。其父堪主簿。牛溪先生甚相友。一本。此下云宜人有婦德通事理。牛溪嘗曰賢婦也。凡家事多與詢議焉。及老。以諺翻釋先世行狀。時命孫兒輩通讀。以誨飭之。 男櫟僉正。𣏾別坐。㮨僉知。大司成申敏一,安厚之,尹正得其壻也。孫煕績縣令。煕胄縣監。煕緝,煕命。女三人適裵幼華,洪爾遠,金龍瑞。皆僉知出也。煕胄繼僉正主宗祀。曾孫至善,至行,至敏,至和,至仁,至重,至遠,至健,至粹,至厚,至憲。餘未名。而申大成男恦。孫命圭。皆爲侍從官。女爲曹瀷妻。有絶異之行。一本。侍從官下
云安氏子曰峑,崟俱進士。(山+會)佐郞。尹氏子曰韺。後承皆淳謹好善。女子尤多至性。而大成女爲曹瀷妻。最有絶異行。其以古節婦稱者。孫女金氏婦也。 公有文集若干卷藏于家。又有太極辨,洪範義。公旣有美質。又擩染家庭。則 一本。洪範義下云公旣世其家。承其餘矩則。 實行之篤。固其茶飯。而又濟之以文藝。一本云。兼之以文德之懿。 故服其行者。有如鄭松江澈,金淸風權,吳楸灘允謙,黃秋浦愼,安牛山邦俊諸公。一本。無有如以下廿六字。而有皆一時名賢五字。 而 一本。此下有至於二字。 李月沙廷龜,張谿谷維。則又稱其文以爲近世所未有。蓋人之推公。固以聽松,牛溪而益重。然亦以二先生之故。其責望愈詳。在他人則不然也。沙溪金先生嘗疑公於陰陽消長之際。處之不甚分明。責之甚嚴。又託人規之甚切。先賢風誼篤厚可見。而公亦不爲不堪。嘗以書遜謝於諸公。其不難於自屈。蓋亦法門之餘矩也。李誠父,吳伯豐亦嘗見疑於朱門。而不失爲名人。一時之得失。誠不可以定天下士也。一本。無蓋人以下一百卅六字。 謹按牛溪集中。先生嘗病。公於事不甚曉解。旣而則 一本。無病公以下十一字。 曰。淳厚寡欲。又識義理氣質之美。可謂難得。又謂 一本。此下有鄭字。 松江曰。孝友之行。吾所不及。嗚呼。牛溪先生眞用功於大學之道者。不敢以僻焉疑先生。則其於知公庶幾焉。一本嗚呼下無牛溪以下廿九字。有公可謂父子間知己者歟十字。 銘曰。
滄浪公讀父 一本作古 書。惇孝友忠信居。詩與文以其餘。父曰子於事 一本作世 疏。乃其行吾不如。其父誰坡翁歟。學程朱溯思輿。言有物豈欺余。一本。無言有以下六字。 欲知公此可於。<끝>
宋子大全卷一百七十四 / 墓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