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17일 이집트 유혈사태.
이집트는 1952년 자유장교단에 의해 파루크왕조가 붕괴되고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시작된다.
나기브가 권력을 잡으면서 나세르, 사다트, 무바라크, 무르시, 아들리 만수르로 이어지는
군부내각이 들어섰다.
파루크왕조를 붕괴시키고 자유투표 선거 내각을 출범시켰다는데서 인기를 얻은 군부는
국민들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는 좋아지지 않았고 점차 군부내각은 신임을 잃어가고 있었다.
군사혁명 뒤에 혁명위원회 위원장이 된 나기브는 이집트 국왕을 내쫓고,
1953년 이집트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1956년 나세르와의 갈등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있다가 1963년에 풀려난다.
1956년 이집트 대통령에 오른 나세르는 산업화를 일으키며 1970년까지 장기집권하였다.
아랍 민족주의를 일으키고 시리아와 연대를 강화하였다.
1964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창설 및 리비아, 알제리, 이라크, 예멘, 요르단 등과 함께
아랍동맹을 강화하여 범아랍 동맹주의를 확산시켜 반식민지주의를 위해 노력하였다.
한때 리비아, 요르단, 이집트 3국동맹을 이끌어 이스라엘에 대항하였으나,
중동 제3차전쟁(6일전쟁)에서 패함으로서 권좌에서 물러났고, 3국동맹은 와해되고 말았다.
1965~6년 예멘 내분사태가 격화되자,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 내전에 깊숙히 개입하여
자국의 영향력하에 두려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집트와 사우디가 경쟁적으로 예멘 내전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시리아에서는 1961년 군부 쿠테타이후 1966년 군부반란이 일어나 군사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이후1970년 알라위파(시아파분파)의 하피즈 알 아사드장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아랍이 어수선한 틈을 이용하여,
1967년 이스라엘은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공군기지와 지대공기지를 선제 공격하게 된다.
이어서 요르단, 이집트 공군기지와 지대공기지를 초토화시켰다.
이집트는 전 공군의 75%가 와해되어 버렸다.
미국은 이당시 베트남전을 치루고 있었기 때문에 아랍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북한군이 베트남 내전에 개입하자, 한국군을 대항마로 내세웠다.
박정희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한다.
미국은 이스라엘 당국의 아랍침공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전으로 비화되는 틈을 노려 선제공격을 단행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이 중동 제3차전쟁(6일전쟁)이었다.
1967년 발발한 중동 제3차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단 6일만에
팔레스타인령 구예루살렘 시가지, 시리아령 골란고원, 요르단령 요르단강 서안지구,
이집트령 시나이반도를 차지한다.
이집트의 예멘장악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집트, 리비아, 요르단 3국동맹은 와해되고 말았다.
전 공군력의 75%를 상실한 이집트는 시나이반도의 수에즈 운하를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군과 8년간을 대치하며 포격전으로 맞선다.
드넓은 시나이반도를 상실한 이집트의 나세르는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하여,
거짓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거짓방송을 내보낸다.
이집트군이 시나이반도를 넘어 이스라엘군을 패퇴시키고 진격하여
이스라엘 영토로 진군하고 있다고 연이어 방송에다가 거짓 방송을 내보냈다.
계속된 거짓방송을 사실로 받아들인 시리아 군부정권은 이스라엘 영토로 군대를 진군시켰다가
이스라엘 영토안에서 궤멸되고 말았다.
이당시는 군당국끼리 서로 정보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였다.
시리아는 소련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거짓 방송으로
이스라엘군이 침공하여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가 함락 위기 직전이라고 방송을 해댔다.
여기에 놀란 요르단군은 요르단의 수도 암만을 지키기 위하여,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국경수비를 하던 병력을 철수시켜 수도방어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령 예루살렘시, 요르단강 서안지구, 시리아 골란고원,
이집트 시나이반도를 손쉽게 손에 넣고 수에즈 운하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1970년 같은 자유장교단 출신인 안와르-사다트는 나세르 사망후 치뤄진 선거에서
이집트 공화국의 3대 대통령이 되었다.
사다트는 친서방정책으로 물꼬를 트고 이스라엘과 대화를 모색하여 시간을 벌려고 노력하였다.
외부적으로는 소련의 과학기술자들이 비협력적이라며 내쫓는 등의 친서방적인 정책을 펼쳐서,
이로부터 이집트는 소련(러시아)으로부터 장거리 미사일 등을 제공받게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시나이반도를 찾으려고 다각적인 노력을 하여 북한군의 참전을 이끌어내었다.
이로부터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있던 북한 특수교관 공군 1개대대와 지상군 특수 교관 분대병력이
군사고문단과 함께 이집트로 특파되었다.
몇년전에 프랑스에서 암수술을 받고 돌아가서 죽은 차명록 차수 등이 지상군 병력을
이끌었다고 이집트 역사에서는 전하고 있다.
안와르-사다트는 북한 공군에게 이집트 공군지휘를 맡겨 지휘하게 한다.
북한 특수교관 공군은 미그기 전술교육을 시킨후, 이집트 공군을 이끌고,
시나이반도를 장악한 이스라엘 공군기지와 사단기지를 야간 저공비행으로
이스라엘이 했던 방법을 역으로 감행하여 초토화시킨다.
지상군은 이스라엘 전차군단이 지원해오자 미리 가서 사막매복작전을 들어가
RPG등의 무기로 200미터거리에서 전차군단을 무력화시킨다.
그당시 이집트군은 죽음을 각오한 이런 사막매복작전을 구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북한군이 이집트군을 이끌고 사막 모래참호를 파서 전차에 타격을 가한후,
사막 모래속에 숨고, 이스라엘 전차지원부대가 포격을 가하면, 사막모래가
포탄의 위력을 모두 흡수하여 거의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스라엘과 싸워 단 한번도 승리한 적이 없었던 사다트와 이집트 국민들은
처음으로 방송을 통해 대대적으로 승전소식을 전하게 된다.
이때 사다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특히 토착 세속주의자,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들로부터는 영웅대접을 받았다.
또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로 부터도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폭격으로 중동 제4차전쟁에서 이스라엘군 대부분이 여기에서 전사하게 된다.
2천600여명 전사, 부상7천500여명의 사상자를 기록하였다.
이승전에 힘입어 사다트는 45만의 이집트 병력을 시나이반도로 출병시킨다.
이것이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전쟁)이다.
사다트는 너무 기쁜 나머지 러시아제 장거리미사일을 북한의 김일성에게 선물로 보냈고,
북한은 이것을 역분해하여 대포동 미사일을 개발하고, 무수단 미사일,
그리고 위성미사일인 광명성호 개발로 이어지게 되었다.
소련은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개발에 대한 견제구를 치기 위하여
장거리미사일을 제공하지 않고 있었다.
이문제로 러시아와 이집트는 외교적 마찰을 빚었으나, 소련은 이집트를 동맹국으로 두고,
미그기 등 러시아 전차를 팔기 위해서는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1973년 이집트군은 처음으로 자국영토였던 시나이반도의 수에즈운하 도강작전을 벌여
수에즈운하를 건너 시나이반도로 진군하였다.
시나이반도 중동부지점에서 이스라엘과 팽팽한 접전을 벌이며 전쟁은 침체상태로 접어 들어가게 된다.
시리아, 이라크 등의 동맹군이 참전하여 분전하였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이집트군은 지상군을 투입한이후, 1만5천여명 전사, 3천여명의 부상자를 기록하였고,
시리아군은 3천5백명전사 2만1천명의 부상자수를 기록하였으며,
이라크는125명전사 260명의 부상자를 기록하였다.
1974년 미소 유엔주재 하에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중재하여 강화가 성립되었다.
지속적으로 아랍동맹군을 상대로 버틸 수 없었던 이스라엘은 강화를 받아들여
시나이반도와 수에즈 운하를 돌려주고, 시리아의 골란고원 일부를 반환하게 된다.
요르단은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돌려받지 못하였다.
팔레스타인은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1978년 안와르-사다트는 이 강화 성립으로 이스라엘의 메나햄-베긴과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사다트는 소련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미국과 친교하여 미국제 전투기와 M1A1전차 등을
수입하여 소련과 경쟁을 유도하였다.
그러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눈에는 이런정책이 마치 친서방 친미주의정책으로 비춰졌다.
이슬람종교인이 90%인 이집트는 친미주의정책과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체제를 비판하였다.
서방에 대한 사다트의 인기는 올라갔으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는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1977년11월19일 이스라엘 방문 등으로 오히려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1979년3월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반대여론을 무력탄압하였고,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경제가 추락하여 인기가 떨어져 갈 즈음,
1981년10월 아랍-이스라엘전쟁 기념식장에서 사열하던 중, 이슬람 원리주의자 출신인 군인들이
반란 난동을 일으켜 암살되고 말았다.
이 암살사건의 배후에는 무바라크가 있었다.
그뒤에는 미국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1981년이후 무바라크가 장기집권하면서 친서방, 친미정책은 줄곧 유지되었고,
무바라크는 장기 독재집권을 하게 된다.
무바라크 역시 자유장교단 출신이었다.
2011년 2월 이집트의 토착세력이었던 세속주의자, 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 시민들이 궐기하여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성난 국민들의 민심을 읽은 군부는 세속주의 시민들 편에 서서 무바라크를 체포하고
병치료를 명분삼아 병원에 입원시킨 뒤, 약물로 제거해 버리려 하였다.
그후 이집트 군부는 무르시를 내세워 선거를 치뤄 대통령으로 세웠으나,
무르시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로 이슬람 원리주의 정책을 시행하려 하였다.
무르시는 이슬람형제단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이 전 아랍지역에서 세력을 확산하며,
지원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권한을 모두 대통령 직속으로 두려하였다가,
토착 세속주의 연합 시민들이 신파라오 정책이라며 궐기하여 시민저항에 돌입하였다.
이집트 군부는 다시 무르시를 체포하여 죽이려다가,
무르시 지지자들인 이슬람 형제단에서 지지세력을 끌어들여 시민저항에 돌입하였다.
이들에게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내쫓는 것은 불법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집트 군부는 세속주의 시민들의 편에 서서 무르시를 카이로 외곽의 군영에 가둬 놓고
헌법재판소장인 아들리-만수르를 내세워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하였다.
여기에는 IAEA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 출신의 무함마드-엘바라데이가 부통령이 되어 참여하고 있다.
무르시 지지자들인 이슬람 형제단과 지지 시민들이 강경 저항하며 해산하지 않자,
무력진압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이에 부통령 엘바라데이는 이집트를 탈출하여 비엔나로 피신하였다.
이슬람 형제단의 무르시 정권은 반미정권이다.
사다트 정권은 미소를 탄력적으로 이용하는 전략적 정권이었다.
무바라크는 친미정권이었다.
헌재소장이었던 아들리-만수르는 이집트 군부의 뜻대로 움직이는 정권이다.
현재의 이집트 군부는 친미와 반미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다.
미국은 그동안 군부 주요 인사들에게 미국 주요대학과 군사대학에 유학시켜
친미파를 키워내고 있다.
친미파와 반미파와의 대립 양상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이 친 이스라엘 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며,
이스라엘만을 편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친 이스라엘 정책만을 펼치고 있는 한 아랍은 반미주의 성향이 강할 수밖에 없는
정치, 경제, 군사구조가 지속되는 이유이다.
무바라크의 친미정책으로 미국은 수억달러를 해마다 지원해주었고,
이집트는 미국제 전투기, 전차 등을 수입해갔다.
그러나 군부정권의 속성상 부패 문제는 심각하여 서민경제는 좋아지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이슬람 강경정책을 들고 나온 무르시는 세속주의 국민세력으로부터
철저한 외면을 받아 이집트 사태는 갈수록 확산일로에 있었던 것이다.
2013년 7월8일 이슬람형제단(무르시)을 지지하는 세력에게
무력을 행사하여 5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있다. (사망51여명)
원래 이슬람형제단의 무르시 또한 군부에의해 내세워졌으나,
국민들이 궐기하자 국방장관 앨시시는 그를 축출하고 만수르를 다시 내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2013년 8월17일 군부의 헬기 난사로 무르시를 지지하는 이슬람 형제단 지지세력은
1,0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있다.
유혈사태 와중에 카이로 외곽의 군영에 갇혀 있었던 무함마드-무르시 전 대통령은 모스크바로 피신하였으며,
이집트 군 당국은 이슬람형제단의 해체작전 수순에 돌입하였다.
또한 시위대 해산작전을 벌여 완료 싯점에 다다랐다.
알카에다의 테러조직 수장인 아이만 알자와히리의 형제인 무함마드 알자와히리가
가자지역에서 이집트로 들어가다 체포되었다며 엮는 것은 전형적인 정치공작이다.
테러조직과 연루시켜서 유혈진압한 사건을 무마시키려는
역공작이므로 신뢰할 수 없는 언론공작이다.
알카에다 조직 인와르-알자와히리와 엮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알자와히리 조직은 빈라덴의 후계 조직]
유혈진압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알카에다를 연루시켜
알카에다 조직원들을 잡아죽였다며 포장하려고 하는 것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원래 알카에다는 미국, 이스라엘이 세운 테러 조직이다.
나중에 속은 것을 알고 이탈하여 이라크, 레바논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반미파 알카에다가
알자와히리 알카에다 조직이다.
이와 반대로
여수 제14연대 항명사건이 발생하자,
김구가 사주했다면서 10개월 후에 안두희를 시켜 김구를 암살하고
여수 14연대장 오동기가 주범이라고 매도하였다.
그리고 김구를 극우테러주의자라고 매도하여 하지중장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제주 4.3사건이 발생하자 무력진압을 거부하며 발생한 사건이 여수 제14연대 항명사건이다.
그런 그것을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으로 발생한 사건이라 주장하여,
미국은 그말을 곧이 곧대로 듣고 무자비하게 토벌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주동자 김지회 중위 등은 북한에서 친일파 숙청을 피해 남으로 탈출하여 내려온 일제 만군 출신 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