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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307 / 그가 만드신 바라 (엡2:1-10)
어떤 분이 처음으로 교회를 다니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면 사랑이 넘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친한 사람들끼리만 똘똘 뭉쳐 다닙니다. 교회 봉사도 좀 해보고 싶었는데 오래 다녔다는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용서가 있으리라 믿었는데 오히려 세상 못지않게 비난과 책망이 난무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 딴 교회를 찾아갔는데 그곳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믿기로 했는지라 교회를 안 다닐 수는 없어서 그 어떤 분은 지금까지도 사랑이 있는 교회, 용서가 있는 교회, 은혜와 감동이 있는 교회를 찾아 헤매는 중이랍니다.
모든 교회가 다 이렇지는 않지만, 많은 교회가 이러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사람 탓입니다. 목사도 교인도 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람이 모인 곳이 교회이기에 교회를 사람 만나는 재미로 오면 계모임과 다를 게 없습니다. 좋아하는 일만 하러 나온다면 동호회와 뭐가 다릅니까?
교회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는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단 교회 나오셨으면 원하는 것들을 사람에게서 찾지 말고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교회의 불편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무조건 참고만 지내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내 신앙과 내가 받을 은혜를 위해서라도 우선은 그런 것들을 비난이나 불만이 아닌 나 자신의 신앙을 단련시킬 기회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연단 후엔 소망이 옵니다.
교회를 다니고 안 다니고를 떠나 사람들은 누구든 교회를 향해서는 “교회가 이래야 한다. 교회는 저래야 한다.”는 자기 나름의 교회론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교회가 자기 생각과 맞지 않으면 못마땅해하고 비난을 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특히 그러하기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더더욱 신앙적인 행동거지를 잘해야 합니다. 일례로 음주와 관련해서도 죄다 아니다를 떠나 신앙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세상이 꼬투리 잡을 일은 안 하려고 하는 것도 믿음의 한 부분입니다.
교인인 경우에도 교회나 교인이 맘에 들지 않아 언짢을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이 나를 향한 시험인 것 또한 분명합니다.
교회는 강합니다.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교인은 약합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만족을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아기들을 보세요. 어린 아기들에게도 나름의 인생 고난과 시험이 있습니다. “엄마, 아빠” 발음하기도 힘든데 고모할머니가 오시더니 “고모할머니 해 봐!” 할 때면 기가 막힐 겁니다.
기는 것도 힘든데 달랑 과자 하나를 미끼로 “일어서 봐. 걸어 봐”라고 할 땐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기도 할 겁니다.
뭐든 기대하는 만큼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기다려 주는 믿음과 나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서도 기다리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론 교회조차도 이 땅에선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당시의 에베소교회도 그런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바울이 했던 권면을 보세요. 거짓을 버리고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고 많은 말 중에 바울은 왜 그런 말들을 했을까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부모가 자녀에게 “밤에 일찍 좀 다녀라.” 그런다면 평소 귀가 시간이 늦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은 싸우지 말고 들어와라.” 그런다면 이 아이는 싸움쟁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식의 해석을 본문에 적용해 보면 바울 당시의 에베소 교회에는 거짓, 다툼, 불신, 불화 등등이 가득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런 에베소교회의 모습이 오늘날의 현대 교회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이나 이런 일을 만나도 불쾌해하거나 화내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그런 것들을 보며 우리의 교회에 관한 생각과 개념을 바꿔야 합니다.
교회는 천국이 아니라 인생을 치유하는 ‘인생 병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교인은 다 나름의 문제를 가진 영적 환자라고 보면 틀리지 않습니다.
이는 교회를 폄하하거나 교인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를 위해서와 교인 간에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병원에 오는 이유는 병을 고치기 위함이기에 병원에 올 때는 시설이나 조건이나 다른 환자들을 보고 오지는 않습니다. 오직 내 병을 고쳐줄 의사가 있느냐를 따져보고, 있다면 그 의사를 만나러 올 뿐입니다.
같은 이치로 교회에 올 때면 우린 환자로 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꼭 만나야 하는 인생의 환자가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너 나 없이 다른 교인들도 다 환자로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환경이나 조건을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교인들마다 가지고 있는 그들의 병 때문에도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
병원에 왔으면 의사를 만나야 하듯이 교회에 왔으면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 하게 함이라.”고 했던 이유입니다.
특히 10절에 보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만드신 바라’는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다는 말에는 만드신 하나님이 평생을 두고 우리를 책임져 주시겠다는 약속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같은 제품일지라도 사람들이 이름 있는 회사 제품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가격을 떠나 AS 즉 사후 관리와 책임이 잘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혹 사용 중에 고장이라도 나면 만든 회사에 전화를 걸어 “당신네 회사에서 만든 제품이니 당신네 회사에서 해결해 주시오.” 그러면 그들은 그 제품이 자기네 회사에서 ‘만든 바’이기에 자기네가 책임져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임을 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바라”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세상은 무상 AS에 기간을 두지만, 하나님의 AS는 영원히 무상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바라.” 이 말을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내가 너를 만들었잖느냐! 그러니 내가 책임져 주겠다.” 시는 약속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마가복음 4:35-41절에 보면 예수님 일행이 갈리리 바다를 건너는 중에 폭풍이 불어왔습니다. 파도가 넘실대며 금방이라도 배가 침몰할 듯합니다. 순간 제자들은 두려워 떨며 예수님을 향해 죽겠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때 그런 제자들을 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고.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이는 비단 제자들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네 이야기입니다. 우리 가정에 시련과 문제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로 인해 불행이 오고 가난해지고 무너질 질 것만 같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난관에 부닥치고 기업에도 실패의 위기가 불어 닥칩니다.
그럴 때면 평소엔 늘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말은 했었지마는 현실에선 속상해하고 두려워하며 삽니다. 항상 예수님을 믿노라고 고백했으면서도 근심하고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들이기에, 그런 우리를 보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두려워하고 근심하느냐?”고.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시지요? ……
당시 제자들도 믿었기에 생업과 가정까지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향해, 또한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도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걸까요?
이제부턴 분명하게 아시기를 바랍니다. 당시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다’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
이에 대해서는 이사야 43:1절 말씀을 보면 좀 더 분명해집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너는 내 것’이기에 바다와 바람이 죽일 듯이 몰아치고 그래서 불안해하며 근심하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소중하게 만들었는데 이까짓 광풍 따위로 너희를 잃을까 보냐?”
믿어지십니까? 당시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나를 향한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근심이 한 보따리십니까?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지금까지도 걱정하게 하고 화나게 합니까?
이 시간 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를 소중하게 만들었는데 그깟 실패와 고난과 문제나 원수 따위로 너희를 잃을까 보냐?”
이 말씀을 믿으신다면 이젠 문제의 세상과 사람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세요. “나는 주님이 만드신 존재이니 주님이 이 광풍에서도 내가 잘못되거나 다치지 않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라고.
책망이 아니었습니다. “어찌 믿음이 없느냐” 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서 이런 믿음이 있기를 기대하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움입니다. 우리를 향해 이런 믿음으로 예수님을 향해 도와주시라고, 살려달라고 기도하라는 훈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오늘 우리 가정에 예수님이 가장으로 동거하고 계심을 믿으세요. 우리의 사업장과 일터에서 예수님이 사장 되셔서 경영하시고 결재해 주실 것을 믿으세요. 필요하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주치의가 되시어 나를 치유하시고 강건하게 해 주실 줄도 믿으시고, 언제든 예수님이 내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고 원수와 세상에 대해 승리로 역사해 주실 것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세요, 하나님 앞에 나온 우리는 모두 영적인 환자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생이고 삶이고 몸이지만, 살다 보니 여기저기 깨지고 상처받고 고장이 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에겐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몸이 아프면 의사를 찾듯이 인생이 아프시면 하나님을 찾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관점을 바꿔 생각해 보세요. 우린 하나님이 만드신 바라 했습니다. 그런데도 맘에 상처가 있고 육체에 병이 듭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정인데 문제로 인해 어질러집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생인데도 고난과 환란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실수하신 거나, 하나님이 창조 중에 불량을 내신 거란 말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제까지 우린 하나님은 전능하시다고 배웠고 믿었는데, 어느 게 맞는 걸까요? 하나님은 전능하신가요? 아니면 만드신 인생에 불량도 종종 있게 하시는 분인가요?
하나님은 전능하심이 맞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저와 여러분을 향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이 만드신 바라. 그러니 만드신 이가 또한 고치시고 해결하시고, 문제없게 해 주실 줄로 믿으라.”고.
그러니 이제부터는 ‘나를 만드신 하나님 앞에 나가 고장 나고 상처 난 내 인생을 AS 받자’는 이런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하고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믿고 기도하면 이와 같은 일이 내게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고치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만드신 분이시니 나를 새롭게 하실 수도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단, 오해하지 마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분께는 ‘하나님이 AS 해 주신다니 나쁘진 않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애초에 AS가 필요하게 인생을 만드셨느냐?’는 의구심이 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과연 나를, 사람을, 그렇게 허술하게 만드셨을까요?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 AS가 필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사탄 때문입니다.
애초에 에덴동산에서부터 사람은 사탄에 의해 망가졌습니다. 그런 사탄으로 인해 이 땅을 사는 내내 우린 인생이 계속 망가질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사탄은 하와에게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가지고 시험에 들게 했습니다.
혹 생각해 보셨나요? 왜 사탄의 시험 재료가 선악과였는지를?
그때나 지금이나 사탄은 사람에게서 가장 약한 것, 가장 집착하는 것을 재료 삼아 시험이 있게 합니다. 하와의 경우 에덴동산의 모든 것이 허용되었는데 뭔 집착이 있었겠느냐 마는 딱 한 가지 금지된 선악과에 미련이 꽂혀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사탄은 그런 선악과를 재료 삼아 하와를 시험에 들게 한 것입니다.
누군가 돈과 이성에 유독 약함이 있고 욕정을 버리지 못한다면 사탄은 그가 목사일지라도 돈이나 이성으로 시험에 들게 합니다.
유독 명예에 약한 사람이 있고, 자존심에 약한 사람이 있으며, 배우자나 자녀에게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는 돈에 욕심이 많거나, 성공에 집착하거나, 세인의 칭송과 인정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에게 있는 약함이나 욕심이 무엇이든 사탄은 그것들로 그 사람을 시험할 재료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인생이 망가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는 이유가 이러하기에 오늘 에베소서의 말씀은 우리 믿음이 단지 하나님의 AS나 받는 차원의 믿음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의 처음 의도하신 그대로의 인생을 잃지 않기 위해 또는 되찾기 위한 믿음의 싸움과 신앙의 노력을 다하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이는 이제부터 여러분이 하셔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복음서에도 보면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을 돌로 쳐 죽이겠다는 무리들을 다 쫓아 보낸 후에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라.”
이때 “너를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하나님의 AS에 해당하는 부분이라면, 후자 곧 “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라.”는 말씀은 새롭게 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권면이고 훈계입니다. 따라서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여인으로 하여금 “가서 다시는 인생에서 실패하지 마라. 가서 다시는 인생이 불행해지지 말라.”시는 격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격려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살면서 죄짓지 않으려는 것이 소극적인 믿음이라면 적극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기를 소망하고 애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해야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만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음과 또한 하나님은 만드신 나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고 다시 살게 해 주실 줄로 믿는다는 믿음이 여러분의 믿음이 될 때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반드시 저와 여러분의 남은 날들도 책임져 주시고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온전히 하나님만을 믿어 이전의 인생들에 대해서는 AS 받으시고, 이후의 삶에서는 도우시며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충만한 삶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