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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7일 언양 작천정에서- 울산독립공원 설립 추진 행사
이 날 이규정 추진위원장(전 국회의원) 사무국장 정의필(울산대교수), 국회의원 ,군수, 천도교 간부 등 여러분이 참석허였으먀 행사장은 인내천 바위 아래 작천정 입구였습니다.
학술자료집에는 한양대명예교수 윤석산 님의 <인내천의 현대적 의미와 삼일독립운동의 정신>과 저가 쓴 <인내천 바위 당시 시대적 배경>이란 글이 실렸는데 저의 글을 아래에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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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 바위 100주년
당시 시대적 배경
姜 仁 秀(부경대학교명예교수)
1. 1910년 전후의 한국의 시대상
1) 대내외적 정치 상황
2) 언양의 지리적 사회적 특성
3) 천도교 사상과 저항정신
2, 울산교구의 걸립과 인내천 바위
1) 울산교구의 설립과 최해규
2) 인내천 바위 글씨와 김영걸
3. 언양 독립만세운동
1) 기미독립운동의 준비과정
2) 기미독립운동의 실천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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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0년 전후의 한국의 시대상
1) 대내외적 정치 상황
국내적으로는 조선 왕조의 말기와 조선의 멸망 시기다.
조선조 말기의 혼란으로 민란이 일어나게 된다. 곧 삼정의 문란과 세도정치에 기생한 탐관오리들의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는 서양세력과 함께 들어온 서학 곧 천주교의 포교로 조선 왕조사회를 극도의 혼란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이로 인해 철종 때인 1862년 진주농민항쟁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민중의 저항이 일어나게 된다.
경주 잔반의 출신 최제우 선생이 1860년 경신년에 민족종교인 동학을 일으켜 경상도 일대에 전파하고 그 세력은 전라도로 확장하게 된다. 1892년 최초의 민중집회인 보은집회를 통해 교주 수운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펼친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은 봄에 전라도의 고부에서 전봉준에 의해 무장봉기로 시작하여 그해 가을에는 전국의 동학도들이 봉기하게 된다. 그해 9월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갑오경장을 일으켜 조선에 군사를 주둔시켜 침략을 감행한다.
한편 일본은 명치유신에 의해 근대화의 길을 모색하여 열강의 반열에 들어서자 대동아 공영권을 꿈꾸며 먼저 한반도에 눈독을 들인다. 1900년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정권을 잡자 한반도를 공략하기 시작한다. 러시아는 동방정책으로 1902년 러시아 철도를 부설하고 남진 정책을 쓴다. 이에 1905년 5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정치를 편다. 1907년 정미칠조약을 거쳐 1910년 한일합병의 경술국치에 이른다.
울산에서는 1862년 임술년 그해 울산병영에서 민란이 일어난다. 울산지역 민란은 진주민란과 같은 병영이 있는 곳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였으나 울산에서는 관군의 무력에 의하여 농민들이 학살되면서 민란은 무력에 의해 봉쇄되었고 또한 사후에 관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뒤늦게 조사가 이루어져도 오히려 농민에게 죄를 돌려 처별한 사건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치 10년 동안에 서원철폐 등의 혁신 정책을 폈지만 병인영요 신미양요가 일어나 열강의 침입을 받았고 그 후 민씨의 세도정치로 매관매직에 정치가 혼란에 빠지게 되고 외세에 의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남에 백성들은 더욱 살기가 어려워졌다.
한편 애국자들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의병을 모아 항일 봉기를 하게 된다.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일본은 통감정치에서 총독정치로 바뀌어 극단적인 무단통치를 하게 되고 전국에 2만 여명의 헌병을 배치한다.
2) 언양의 지리적 사회적 특성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언양은 신라 때는 거지화현으로 고려 조선 때는 언양현 또는 언양군으로 존재하다가 1914년에 울산군에 합병되어 언양면으로바뀐다. 언양현(군)은 언양면과 서북의 상북면과 동북의 두서면 두동면과 남의 삼남면과 동쪽의 범서면 삼동면으로 구성되었다. 언양에는 2일과 7일에 5일장이 열리고 교통 행정의 요지로 일관해 왔다. 울산까지 50리 경주까지 80리 양산까지는 60리로 언양읍은 제법 넓은 벌판에 자리하고 있다. 서북쪽은 해발 1,000m가 넘는 영남 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언양을 중심으로 하나의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1919년 기미년 전까지 도보 중심 시대에도 교통의 중심지였다.
행정적으로, 1914년 3월 1일 대대적으로 행해진 행정조직의 개편 때 언양군은 언양면으로 격하되어 1919년 기미독립운동 때까지는 면으로 존재했지만 5일장이 서는 경제적 중심지였다.
현재는 경부철도 KTX의 울산역이 언양에 자리잡고 있다. 언양은 70리 태화강의 상류지역이다. 가지산 터널이 관통되어 밀양과도 교통이 아주 좋게 되었다.
1916년 12월말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인구 조사에 의하면,
두동면 5,732명 두서면 6,554명 언양면 8,661명 하북면 3,670명 상남면 3,865명 중남면 3,458명 삼동면 4,367명으로 언양지역의 총인구 36,307명이었다.(언양읍지, 2001년 발간, 100쪽)
울산 지역에서 기미년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언양 병영 남창이 모두 5일장이 서는 인구 집결지였다. 그러나 울산이나 방어진 장생포는 더 많은 인구의 집결지였지만 일인 거주자가 많은 지역이어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3) 천도교 사상과 저항정신
동학(천도교)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人乃天 사상을 종지로, 그 근본 사상은 유불선(儒彿仙)에다가 민간신앙과 깊은 맥이 닿아 있다. 또한 보국안민 광제창생 지상천국건설을 지표로 삼고 있다.
동학은 수운 최제우에 의해 1860년에 창도되어 그 세력은 울산 연일 영해 영덕 영천 안동 대구 등 경상도로 파급되다가 1864년 교주 최제우가 순교를 당하게 되자 그 세력은 전라 경기 강원도로 거세게 뻗어나갔다. 2세 교주 해월 최시형이 은거와 잠적을 하면서 동학의 세력 확장에 힘쓴 결과 1894년 갑오년 즈음에는 30만명을 넘는 신도를 확보하였다.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개입으로 거의 전멸하게 된다. 3세 교주 손병희에 의해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개명되고 종교에만 전념한다는 약속으로 포교의 자유를 얻는다. 기미년 당시 신도수는 300만에 육박하였다.
동학 내지 천도교의 기본사상은 1)인내천 사상 2)개벽사상 3)민족주의 4)민간신앙인데, 인내천사상은 인간지상주의와 인간평등주의이며, 개벽사상은 개혁주의와 혁명주의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바로 항일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이 3.1기미독립운동의 근본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말기 삼정의 문란과 세도정치는 탐관오리를 배출시켰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들었다. 종전의 유교 불교가 아닌 새로운 종교를 그 시대와 사회가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동학의 창도는 그 시대 민중의 구원의 길이 되기도 했다. 동학은 서학(천주교)에 대응하여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란 경전의 간행과 배포로 수많은 제자와 신도를 거느리게 되었다. 또한 제폭구민 광제창생의 지상천국건설은 요원의 불길처럼 민중 속으로 번져 갔다. 이에 관에서는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체포하여 처형함에 신도들의 수는 더욱 많아졌고, 2세 교주 최시형은 은밀한 포고활동과 동학을 조직화하여 접(接)과 포(包)를 만들어 비밀결사처럼 단단히 뭉쳐나갔다.
친일세력인 이용구 송병준의 일진회를 축출하고 일본 통감으로부터 종교적 자유를 얻기 위해 제3세교주 손병희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종하여 대혁신을 가했다. 천도교회월보와 만세보를 창간하고 교육 사업에 관계하여 보성학교와 동덕학교를 설립했다. 1914년 제일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천도구국단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을 만들고 1917년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2, 울산교구의 설립과 인내천 바위
1) 울산교구의 설립과 최해규
언양의 기미만세운동은 천도교가 그 주동역할을 했다. 천도교 울산교구가 울산에 설립되지 않고 언양지방에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언양군교구로 되었다가 1914년 행정개편으로 울산군교구로 명칭이 개정되었다. 울산군교구는 1910년 9월에 간월산 아래 거리(巨里-당시 상남면 현재 상북면) 마을에 세워졌다. 어떻게 하여 천도교 울산교구가 울산의 서북 외따로 떨어진 산골에 설립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울산 교구의 성립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중앙총부의 전도와 자극에 의한 것이다.
이현희 교수에 의하면 “울산군 상남면(현재의 울주군 상북면)에 천도교가 포교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9월 이후부터였다. 천도교 포교사 임명수(林明洙)가 당시 단군교의 신자인 최해규를 만나게 되었다. 최해규는 임명수의 감화를 받아 천도교 교인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필자가 1990년 언양만세운동의 주동자인 이무종(李武鍾)의 동생 이갑종 선생을 직접 만나 증언을 들은 바가 있다. 이현희 교수도 이갑종 선생의 말을 인용했다. 이갑종 씨는 해방 후 상북면 면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울산교구의 포교일지인 <연원록>(淵源錄)과 울산교구의 18년간 성금 등을 기록한 <비고장>(備考帳)에 잘 나타나고 있다.
위의 두 자료를 근거로 설립 즈음의 상황을 살피려 한다.
<연원록>에 의하면, 전도사 임명수가 언양면 송대리 거주 최해규와 그의 가족 (처 김규화 부 최석호 모 장석화 자 최학식 여 최학순)을 포교했다. 울산교구가 설립되어 교인을 포섭하면서 포교가 개시되었는데 초대교구장에 최해규(崔海圭)가 취임하였다.
그렇다면 전도사 임명수는 어떤 분이었으며 어떻게 언양지방에 와서 포교를 하게 되었는가? <천도교창건록>과 <의암 손병희선생 전기> 에 의거하여 살펴본다.
임명수의 출생지는 두만강 북안 간도의 작은 도시 두도구(豆導溝)이며 1900년에 입교하였고 도호(道號)는 설암(雪庵)이었다. 백두산 근처 장진 연길 등에서 포교활동을 하였고 부인은 김명화이다. 임명수는 접주 수접주를 역임했고 천도교 총부의 종법사, 감사원, 종리사 등 천도교의 요직에 근무했다. 임명수는 1910년 천도교중앙총부의 학무원이었고, 1911년에는 감사원장 대리, 1912년에는 감사원장, 1935년에는 고향 두도구 지방종리원장을 지냈다. 두도구는 독립투사들이 자주 드나들던 국경도시이며 만주의 유지 모임인 간민회에서 1918년 11월 “무오독립선언”을 하자 일제는 용정 백자가 두도구에 군인을 상주시키기도 했던 곳이다. 이것을 감안하면 임명수는 민족의식이 남달리 강했으리라 보아진다.
그리고 1909년 12월 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이 양산 내원사 적멸굴에서 49일간 독공할 때 동행을 한 분이기도 하다. 의암 선생의 전기에 의하면 “1909년 12월 20일부터 그 다음해까지 성지 순례를 위해 경주에서 통도사에 들러 49일 독공(篤工)을 하고 다시 양산 천성산의 적멸굴에 들러 49일 기도를 했다. (적멸굴은 수운 최제우가 독공을 한 곳으로 천도교의 성지) 그때 수행한 사람은 임명수 박명선 윤구영 최준모 김상규 등이었다. 이들은 계곡 바위에 6명의 이름을 새겨 기념하였다.”
이때 임명수도 수행했으며 그 기간은 1909년 12월 20일부터 1910년 3월 사이다. 일행은 경주를 거쳐 통도사에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중간지점인 언양을 통과했을 것이고, 당시애는 교통수단으로는 도보이거나 우마(牛馬)를 이용했을 것이다. 이때 중간 지점인 언양에 거주한 최해규가 임명수를 만나 전도를 받았다고 보아진다.
천도교 경주군교구는 현재 황오동 229번지에 있으며 1910년 1월 중앙총부의 정광조 종법사가 내려와 교구 설립을 안내하여 그해 6월에 경주교구를 설립하고 초대 교구장에 손병규 씨가 맡게 되었다. 의암 일행이 1908년부터 2년간 전국순례를 할 때 1910년 2월에 적멸굴을 탐방했고 귀로에 경주를 탐방했다. 이즈음 경주교구와 언양교구(울산교구)의 설립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아진다.
천도교 울산교구는 1910년에 설립되고 최해규가 초대교구장이 되었고,. 3년 후인 1913년에 김교경이 교구장을 물러 받아 제2대 교구장이 되었다.
김교경이 1913년 5월에 중앙총부(천도교대도주)로부터 언양군교구장으로 임명을 받았고 1914년의 행정개편에 따라 1914년 7월에 다시 울산교구장으로 유임 임명을 받았다.(천도교회월보 19호 66면과 제 36호 39면) 울산교구는 경주대교구에 소속되었다.(천도교회월보 제50호 37면) 이로부터 울산교구는 경주대교구와 왕래가 많게 되었다.
김교경이 기미년 이후 계속 서울에 머물게 되자 1920년부터 중남 신화리에 거주하던 곽해진(뒷날 중남면 면장 역임)이 울산교구장을 대리하게 되었다.
다음은 둘째의 경우 곧 경주 최씨의 영향을 살펴보기로 한다.
최해규 씨는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경주와 거리가 하루 도보의 길이어서 경주 최씨 가문의 영향도 컸으리라 추측된다. 최해규씨는 최진립 장군의 동생인 최계종의 11세손이다. 최계종은 서생포 첨사를 지냈으며 임란 때는 울산성 싸움에 형 최진립 장군과 함께 참전했다.
최해규 씨는 추수가 끝난 음력 10월에는 묘제에 참석했을 것이다. 최해규 집(언양 송대)에서 11대조 육의당 최계종 묘소까지는 80리, 사성공 최예(조선 초기 성균관 사성을 자냄)의 무덤은 50리, 정무공 최진립 무덤은 30리 상거이므로 모두 도보로 왕래가 가능한 곳이다.
최해규는 장남으로서 조상(부;錫浩 조부:寅壽 증조부:世仁) 묘소가 언양면 반연리 톳골에 있고 바로 곁에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묘소가 있으므로 최씨 문중 사람들과 교유가 있었을 것이다. 최해규는 청년시절부터 천도교에 관심이 많았으며 우국충정에서 일제의 폭압에 항거하여 한때는 단군교를 믿기도 했고 을사년(1905) 경에 천도교를 믿게 되었다.
또한 산골 거리 마을에 천도교구가 왜 세워졌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거리마을은 길천리와 한 마장 정도로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산골로 은신하기 좋은 곳이다. 현재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신불산 간월산 능동산 가지산 일대는 1860년 병인년 즈음의 천주교 박해 시대에 많은 천주교 교인들이 은거하던 곳이다. 간월공소 대재공소(일명 죽림굴) 살티공소 등에는 김대건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가 몇 달간 머물기도 한 곳이다. 이러한 은신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에 능동산 아래 거리 마을에 언양교구(울산교구)가 설립된 것이다. 1910년 당시로는 천도교 역시 동학의 후신이므로 일제는 항상 감시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영남 알프스의 산골 마을에 교구를 설립했다.
면사무소 마을을 피해 윗마을인 거리로 정했고 교회 부지는 거리 마을의 착실한 천도교 교인이요 부자인 이규로 교인이 땅을 제공하고 건축비의 반을 담당하게 된 것도 한 이유이다.
최해규(崔海圭:1882-1958)는 언양면 송대리 404번지에 거주했으며 1897년 경부터 동학에 관심을 두었으며 우국충정에서 일제의 폭압에 항거하여 단군교를 믿기도 했다. 전도사 임명수로부터 정식으로 전도를 받고 1910년 9월에 천도교 언양군교구를 설립했다.
최해규는 보통 키에 눈썹이 짙고 안광에 정기가 넘쳤다. 땅땅하고 다부지게 생겨 성격이 강직하고 힘이 장사고 음성이 우렁찼다. 미남형으로 술을 자셔도 흐트러짐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여 천도교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1913년 언양공립보통학교(현 언양초등학교)를 설립할 때 언양향교 소유의 땅 82마지기를 인감 도용하여 매매하여 설립자금을 조달하자, 언양 유림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1914년 마지막 언양 군수 정철정이 좋은 일을 위해 한 일이니 용서하라고 중재에 나서 변호하기도 했다. 최해규는 이 일로 3년간 피신했으며 뒷날 위증죄(1917년 울산지청 판결 위증죄.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로 판결이 났지만 형고를 치르지는 않았다. 또한 상남면 등억리의 부자 김찬희에게 독립자금으로 쓰기 위해 논 15마지기를 양도 받은 바가 있다. 최해규는 의협적이고 선구자적인 기질을 타고 났다. 소송관계로 김교경에게 교구장 직을 물려준 것으로 추정된다(.천도교회월보 제55호(1915.2)
상경했다가 귀향한 이규장으로부터 3․1 만세 소식을 듣자 같은 마을에 사는 이무종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동생 최해선과 같이 행동할 것을 여러 차례 종용했다.
최해규는 만세운동 후 5월에 다시 거사를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만주로 피신했다. 26년간 만주의 안동지방 탄산성 오룡배에서 생활하다가 광복과 더불어 귀국했다. 만주에서 생활하던 중 고향의 처자식을 돌볼 수 없어 현지에서 새 부인을 맞이하여 생활하였다.(최해규 최해선의 기록은, 경기도 파주 교하읍에 거주하는 최해규의 아드님 최만식 님과 최해선의 손자 울산광역시 성남동 거주하는 최명훈 님의 증언을 참고로 함.)
2)인내천 바위 글씨와 김영걸
인내천 바위의 人乃天이란 동학의 종지(宗志)의 글은 1915년 6월에 상남면 길천리의 춘사 김영걸 선생(春史 金永杰-1876-1947)이 썼고 각석은 중남면 수남리의 함석헌 씨가 했다.
인내천 바위의 위치는 작천정의 동편 봉화산 줄기의 산기슭으로 도로변에서 훤히 보이는 곳이며 울산교구가 있는 상북 거리 마을과 중남 교구가 있는 삼남면 신화리는 십리 남짓 되는 거리로, 거리-길천-명촌-광대고개-작천정-수남리-신화리의 중간지점이다. 인내천 바위 주변은 경치가 좋아 그 당시 도보시대에는 이 길을 많이 이용하여 내왕했다.
선생은 병자년 (1876)생으로 당시 언양현 상남면 길천리 434번지에서 태어나 길천리에서 성장했다. 부친은 유학자 만파 김병은(晩波 金秉恩 1838 -1922)이며 어머니(1840-1923)는 진주 강씨 상황(相璜-상북면 향산리)의 딸이다. 원래는 경주 김씨인데 분파되어 청도 김씨 또는 양산 김씨로 불렸는데 증조 때 양산에서 언양으로 이거하였다.
어릴 때 부친의 슬하애서 한학을 배웠고 같은 마을 유학자 서만조에게서 유교의 경전과 사서(史書)를 배웠다. 자질이 총명하고 부지런하여 장성하자 인근 마을의 연안 송씨(延安 宋氏) 찬규(璨奎)의 딸과 혼인하였다. 춘사 선생은 딸 여섯에 외아들 진호(鎭湖 1902-1923)를 두었다. 외아들 진호(鎭湖 1902-1923)가 서울 중동고등부에 재학 중 22세에 지병으로 병사함에 그 슬픔이 형언할 수 없었다.
선생은 23세 때인 1898년에 언양향교의 장의(掌議)를 맡은 걸로 보아 유학에 뛰어났다. 24세 때는 대구의 윤연당(尹硏堂) 선생의 문하에서 서예와 그림을 베웠다. 그후 7,8년을 출입하였다.
춘사 선생의 유묵은 상북면 지내리 동래정씨 재실의 현판 南隱齋(남은재)와 석남사 입구 다리의 靑雲橋(청운교)와 상북면 향산리 솔정자의 孝子里(효자리)가 대표적이다.
1900년에는 청도 운문사와 밀양 영남루, 그 다음해는 부산 대구 등지를 친구들과 여행하면서 음풍영월을 했다. 그 당시로 30두락의 농사를 지었으니 그런대로 경제적 여유는 있었던 것 같다.
1900년 수남리의 작괘천에 작천정이 낙성됨에 그 현판을 썼지만 작천정은 정자와 현판이 화재로 훼손되었고 1970년에 복원되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울분의 시를 여러 편 지었다.
1910년 친구 윤효선이 만주 길림으로 이사를 가고 여동생 일가가 만주 열하로 이사를 갔고 1930년에는 친구 이춘장이 만주로 이주함에 그 슬픔과 애탐을 여러 편의 시로 남겼다. 1912년에는 친구 윤달석 박문하와 흥해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장쾌한 시를 쓰기도 했다.
<춘사선생시집>에는 한시 315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낭만을 노래했다.
시문(詩文)의 특색은 첫째 봄을 주제로 한 시가 많고 특히 이른 봄 찬바람 속에 피는 매화를 찬미했다. 그래서 그런지 스스로 지은 호(號)도 춘사(春史)다. 둘째는 시문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주고받은 시들이 많다. 셋째는 명승지를 유람한 기행시(紀行詩)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친구-이춘관 오송옥 송경택 김성팔 최만운 송익원 들과 유람하면서 자연을 읊조린 것이 대부분이며 친구들과 술을 즐긴 것으로 보아 가색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선생은 한갓 이름없는 선비로 자연을 사랑했고 시작(詩作과 서예(書藝)에 정력을 기울였다.
춘사 선생은 63세(1938년) 때 상투를 잘랐으며 2년 후인 1940년에는 일본 여행을 갔다 오기도 했다.
선생은 유학자이므로 천도교에는 입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가 친척들은 거의가 천도교 신자였고 기미년 언양독립운동의 주요 인물들이었다. 곧 매제 최해규, 큰 사위 황선운, 둘째 사위 서익조, 넷째 사위 이종만(이규천의 아들) 등 여러 분이었다.
인내천 바위에 글씨를 새김에 글씨를 쓴 김영걸 본인과 각석자 수남리의 함석헌, 당시 교구장이었던 김교경과 초대교구장 최해규, 그리고 거리 마을의 교인 이종능 이규장 이규로 등 여러분이 참여했다. (필자가 1988년 1월 이종능 씨를 방문하여 대담하였음)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에 의해 인내천 바위 글씨가 새겨졌고 이것은 언양기미독립운동의 저력이 되었다.
인내천 글자를 각석한 함석헌(咸石憲) 씨는 삼남면 수남리의 석공으로
김영길 선생으로부터 인내천(人乃天) 세 글자를 받아 구름 낀 6월 초순 각석하려고 바위에 갔더니 이슬비가 내려 다시 집으로 와서 비에 젖은 글씨를 말려 며칠 후 청명한 날에 각석을 했다.(상북면 등억리 노야농원 김영만 씨의 증언))
몇 해 후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고 그해 4월 2일 언양장터에서 천도교 울산교구의 인물들이 주동이 되어 만세운동을 일으키게 되자 일본 순사의 감시가 심했고 인내천 바위를 알게 된 일본 순사의 조사가 뒤따르자 함석헌 씨 일가는 모두 잠적해 버렸다.
함석헌 씨는 경주 이씨 문중의 부탁을 받고 1923년 작천정 위쪽 계곡 바위에 선무원종공신비(宣武原從功臣碑)를 세움에 일경의 눈을 피해 주로 밤에 각석 했다.(김영만 씨의 증언-2015년 3월27일 오전)
춘사 김영걸 선생과 함석헌 씨에 대한 조사는 울산대학교 정의필 교수의 많은 도움이 있었음을 밝혀 둔다.
3.언양 독립만세운동
1) 기미독립운동의 준비과정
1919년 1월 고종임금이 일제에 의해 독살되자 천도교 교인들은 대대적인 민족저항운동을 준비한다. 천도교 재단의 중앙학교의 송진우 교장과 현상윤 선생과 보성학교 최린 교장이 손병희 교주의 뜻을 받들어 거사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된다. 일제는 무단정치의 데라우치 총독에 이어 육군대장 출신인 하세가와 총독이 부임하여 더욱 무단정치를 강화하고 있었다. 권동진 오세창이 가세하여 평안도의 장로 이승훈 선생과 길선주 목사 그리고 서울의 감리교 함태영과 학생대표 박희도의 동조를 얻게 된다.
기미년 1월말 손병희는 “고국민대회(告國民大會)”란 포고문을 통해 명성황후와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음을 미국을 비롯한 열강과 12개 약소국에게 알렸다.
2월 8일 동경유학생 백관수 최팔용 이광수 등에 의한 독립선언이 있었음도 큰 자극제가 되었다. 고종의 인산일(3월 3일)을 즈음하여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 것을 감안하여 3월 1일(정오)을 거사의 날짜로 정했다. 보성출판사 사장 이종일이 독립선언서를 2만 1천장을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게 되었고, 민족대표 33인에는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이 서명하게 되고, 이들 민족대표들이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선언문을 낭송하고 일경에 의해 체포되자 곧 민중들은 파고다 공원에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고종황제의 인산(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상경한 울산교구장 김교경이 서울의 파고다공원의 3․1만세운동을 직접 지켜보고 울산교구의 교인들에게 독립신문과 국민회보의 기사를 편지와 함께 보내면서 곧 거사를 준비하라고 당부했다.
고종황제의 독살에 대한 글을 본 울산교구의 천도교인들은 심한 충격에 사로잡혀 즉시 교인들을 소집하여 의논한 후 희문의숙 출신인 이규장을 서울로 보내어 지시를 받아오게 하였다.
이규장(상남면 거리. 당시 28세)은 즉시 상경하여 김교경 교구장(당시 49세. 하북면 산전리)을 만나 그 간의 국내정세와 거사 준비에 대한 필요한 지시를 받아 울산교구로 돌아왔다.
최해규(언양면 송대리), 곽해진(중남면 신화리), 이규천(상남면 길천리 지화), 유철순(중남면 교동리), 이무종(상남면 길천리), 이규로(상남면 거리), 이규장 등 7명은 비밀리 회의를 개최하고 거사 준비에 들어갔다. 유림측은 이무종 이외에 이규인(李圭寅) 등이 가세했다.
이 당시 울산교구에는 80여명의 교인들이 교구 발전을 위해 성금을 납부했는데 그 기록은 <비고장>에 잘 나타나 있다. 이들 7명은 교구가 있는 거리까지의 거리가 불과 반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사람들로 가장 먼 곳이 중남 신화리의 곽해진 교인인데 그도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이무종 이규인은 비고장에 기록된 성금 명단 77명에 기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천도교 교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규인은 1회 헌금한 바 있다.)
휘문의숙 동문인 이규장 이무종 두 사람이 총참획을 맡게 되었고, 이규장은 조직과 동원 연락을 맡았고, 이무종은 선언문 등사와 태극기 제작을 담당했다. 휘문의숙 동문인 황선운(울산군 두동면 월평리)을 오게 하여 이무종과 같이 선언문과 태극기 제작에 동참하게 했다.
언양 장날인 4월 2일을 행동개시일로 잡고 길천리 이무종의 사랑방을 본부로 삼았다.
이무종이 3월 29일 자기 집에서 100미터 거리인 상남면 면사무소(길천리 825번지. 현재의 경로당 자리)에 밤중에 잠입하여 등사기를 훔쳐와 황선운과 둘이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새벽에 다시 면사무소에 갖다 놓았다. 태극기는 이규장과 황선운이 손수 한지에다 그렸고 대나무를 사용하여 손잡이를 만들었다. 이무종은 자기 가족들도 모르게 비밀히 진행했다. 한편 이규인의 빈집에서 이무종 최해선(崔海璿:일명 允鳳) 이규인 세 사람이 밤을 새워가면서 태극기 42개를 제작했다.
전국적인 독립운동 때문에 일제경찰은 사전예방 차원에서 요시찰 인물을 잡아들이는 예비검속령에 따라 몇몇 독립 인사를 예비 검거했다. 일제 경찰은 요시찰 인물인 최해규 최해선 형제와 중남면의 곽해진 유철순 들을 언양주재소로 구인해 갔으나 너무나 태연한 자세에 일경은 아무런 일이 없을 것으로 간주하여 모두를 돌려보냈다. 이에 더욱 의기가 충천한 이무종 이규장 이규인 이성영(상남면 양등리) 강경찬(상남면 길천리) 최해선 등은 4월 1일 밤 밤을 지새우며 시위 때의 구체적인 행동에 대해 의논하였다.
3월 28일에 양산에서 2천여명의 농민 학생들이 헌병분견소와 군청 앞에서 만세를 불렀으며 4월 1일은 양산 통도사 스님들 100여명이 부근 촌락민들과 합세하여 만세를 불렀다는 소식이 전해져 이들은 더욱 고무되었다.(이상의 기록은, <울주군지>상권. <상북면지>, <삼일운동사>-이병헌 편저, 시사시보사, 1969. <형사재판서원본제10책>-행정자치부 정부기록문보관소, 부산지소 . <3․1운동실록>-이용락 1994, 도서출판 금정. <울산울주향토사>-울산문화원, 1978. 등을 참조함.)
이춘걸(전 울산광복회장 1931년생)의 <正史 울산 3․1운동>에도, 3월 29일 저녁 이무종의 사랑에 모인 이규인 이성영 강경찬 최해선(崔海璿) 이규경 등은 장날에 거사날짜를 정하고, 이규인 소유의 빈집에서 밤을 새워가며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언양현의 신라시대 현청은 거지화현으로 길천리(기미독립 당시 상남면의 면 소재지)에 있었기 때문에 상남면 면민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또한 유학생 휘문의숙의 이규장(李圭章)과 이무종의 한양 왕래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2) 기미독립운동의 실천
근대화의 바람이 불어 1896년부터 장날은 양력으로 시행하게 됨에 한일합병 이후 전국의 5일장은 양력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언양 장날은 2일과 7일에 열렸다.
4월 2일 언양 장날은 상쾌한 봄바람이 부는 청명한 날씨였다. 이른 아침부터 거사 주동인물 이무종, 이규인, 이성영, 강경찬, 최해선(상남면 길천리), 이규경(상남면 길천리), 이종능(상남면 거리) 등 7명은 언양면 남부리의 장터로 향했다. 본부를 장터 입구의 언양면 서부리 석남집(주막)에 정하고 태극기의 일부는 남부리의 문화상회에 맡겨두었다. 요원들은 11시에 만세운동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장터로 다니면서 알렸다. 울산군의 상남 하북 언양 두동 두서 중남 삼동면 그리고 양산군 하북면 등에서 모여든 장꾼은 11시에 접어들자 2천여 명이 모였다.(1972년 <독립운동사>하권 기록에는 1,000여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군경의 기록에는 7,8백으로 되어 있음). 제일 먼저 김만출(일명 김제호. 중남면 교동리)이 위장하여 가지고 온 태극기를 장터의 청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규인 이성영 강경찬 등 교인들이 장판을 돌아다니며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태극기는 대개 장꾼들이 물건을 넣기 위해 가지고 다니는 망태기에 넣어 짚으로 덮었다. 기미를 알아챈 순사가 장터를 누비다가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고 있던 수남 마을의 정병한을 체포하여 주재소로 연행해 갔다. 이를 본 김성진(중남면 교동리 62세) 노인이 사태의 긴박함을 느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품속에 숨겨둔 태극기를 꺼낸 청년들이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장꾼들은 태극기를 들고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갑자기 장판은 만세소리와 군중들의 태극기를 흔들며 지르는 함성으로 가득했다. 서태식(상남면 길천리), 신동목(삼동면 금곡리), 김정원(상남면 명촌리), 강기형(상남면 길천리), 김한준(상남면 거리), 김낙수(상남면 등억리) 등은 장꾼들을 향하여 “조선인이면 누구든 만세를 부르라.”고 고함치며 시위를 유도하였다.
장터는 곧장 감격과 흥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급거 상황을 파악한 일본 주재소(언양파출소) 순사와 울산본서(경찰서) 순사 수십 명은 주동자 몇 명을 주재소로 연행했다. 이에 노한 군중은 주재소로 몰려갔다. 석방을 요구하며 돌을 마구 던졌다. 시위 군중들에 비해 수적으로 부족한 왜경은 급기야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주재소는 지금의 언양초등학교 정문 근처에 있었으며 언양성벽 서편에 위치했다. 언양성은 1,500년 연산군 6년에 현감 이담룡이 삼국시대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였으며 둘레 3,064척 높이 13척이었다. 임란 때 흐무러진 것을 광해군 9년(1647)에 개수했다.(세종실록지리지와 문종실록에 언급되어 있음) 성벽 위에 올라간 왜경은 급기야 총을 발사했다. 만세를 부르던 군중에게 발포를 가하자 몇 명이 중상을 입게 되었다. 손입분(孫粒粉. 복득이 엄마, 언양면 남부리 거주)이란 여자가 가슴에 총상을 입어 비명을 질렀다. 김길천(金吉千. 곽해진의 모친. 중남면 신화리 거주)이 다리에 총을 맞고 비명을 질렀다. 김종환(金鍾煥)은 총알이 손을 지나가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되었다. 또한 정달조(鄭達祚)도 다리에 총을 맞았다. 그 외 경상까지 포함하여 1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자 언양주재소 앞은 아비규환의 도가니로 변했다. 그러나 만세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장판에서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 만세소리가 들렸다.
이날 26명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모두 울산경찰서로 끌려가 부산지법 울산지청이나 대구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형고를 치르게 되었다. 1년 6개월로부터 6개월의 감옥형이 18명, 태형이 13명, 집행유예가 2명으로 모두 32명이었다.
주동인물인 이규장 최해규 이규인 이규로 이규천 강경찬 곽해진 유철순 황선운 등은 다행히 몸을 피하여 검거되지 않았다. 언양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한 사람은 42명이었다. 장판에 나온 장꾼인 농민들이 적극 가담한데 반해 언양지역의 많은 천주교 신자는 거의가 가담마지 않았다. 그 당시 언양지역에는 직동과 살티와 순정에 천주교 공소가 있었다. 천주교 신자는 서울의 3․1운동에도 관계하지 않았고 33인 민족대표에 한 사람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는 천주교 자체가 박해시대의 수난 때문에 정치와 손을 떼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일 것이다.
3.결론
산자수명한 간월산 동편 아래 예나 지금이나 작괘천이 맑게 흐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유월 중순 뻐꾸기 우는 초여름에 작괘천이 내려다보이는 봉화산 기슭에 인내천 바위 글씨는 몇몇 선열 여러 분들에 의해 새겨졌다.
人乃天 글씨의 각석은 4년 후 기미년 언양만세운동의 저력이 되었다. 인내천 바위의 글씨는 당시 시인이요 명필이었던 상남면 길천리의 춘사 김영걸 선생이 썼고 바위에 각인한 분은 당시 유명한 석공 수남사람 함석헌 씨이다.
인내천 바위의 글씨를 쓰도록 기획한 이는 당시 천도교 울산교구장 김교경 선생과 초대 교구장 최해규 선생이다.
민족주의자요 애국자인 이들은 기미년의 언양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뒷날 천도교 울산교구가 있던 거리 마을에 교육기관인 양정학원을 세웠다.
우리 후손들은 인내천 바위 글씨 새김 100 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고장의 자랑이요 자긍심의 원천인 人乃天 바위를 잘 보전하여 나라사랑과 인간지상주의를 더욱 발전시켜 민족 통일과 번영을 위해 새로운 다짐을 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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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자료
1.蔚山의 獨立運動史: 울산정책연구소 독립운동사 재조명위원회, 2008년 11월
2.春史先生詩集: 이영춘 역, 봄의 노래. 2002
3.蔚山遺事: 김석보, 1979.12
4.동학혁명과 민중: 이현희, 대광서림, 1985
5.備考帳(비고장): 1915년 교구장 김교경 필사-천도교울산교구의 성금 내역 기타
6.淵源錄(연원록):: 천도교 울산교구의 포교활동에 대한 기록
7.천도교회월보: 천도교중앙총부 발간, 1914∼1921
8.동학 성립과 이야기: 조동일, 1981,홍성사
9.의암 손병희선생 전기: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 1957, 천도교중앙총부
10.한국현대사: 3권 p22-135, 신구문화사, 1969
11.울주군지(蔚州郡誌): 2002, 대일인쇄
12.天道敎創建錄(천도교창건록): 이돈화, 천도교중앙종리원 발행, 소화9년(1934) 12월 5일.
13,天道敎百年略史: 1981. 천도교중앙총부
14.동학사상과 시대적 배경: 1985, 신복룡, 평민사
15,한국문학과 동학사상: 강인수, 1989, 지평
16.형사재판서원본제10책: 행정자치부 정부기록문보관소, 부산지소
17.일제시기 언양 천도교계 지역엘리트의 사회운동: 정계향, 2010. 울산대학교 대학원 석사 논문
첫댓글 이 글 쓴다고 한 달이 걸렸는데 원고료 286,000원을 받았음.
언양 독립운동이 1919년 4월 2일 언양 장날에 일어났는데, 그 앞서 1915년에 작천정 봉화산에 천도교인들이 인내천이란 글을 명각하여 이것이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음. 이 글은 누가? 언제? 왜? 바위에 천도교의 종지 세자 인내천을 새겼는지를 고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