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321 / 온유함에 복이 있나니 (마5:5)
성경은 온유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평소 ‘온유한 것’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상의 3대 힘’이란 게 있답니다. 세상에서는 돈의 힘, 권력의 힘, 숫자의 힘을 3대 힘이라고들 합니다.
그에 반해 성경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가르칩니다.
힘 대신 온유라…? 언뜻 와 닿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강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정복한 것이요”라고 했다면 좀 더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 세상 자체가 이미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예수님 때도 비슷했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나라는 로마였고, 로마의 힘은 권력 곧 군사적 힘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로마를 물리쳐 줄 강력한 능력을 지닌 정치적이고도 물리적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대인들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각종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이분이야말로 나라를 독립시키고 빼앗긴 땅을 되찾게 해 줄 메시아라 확신하곤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땅을 얻을 것이라고는 하시는데, 온유한 자가 복이 있고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하시니 당시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에선 온유함을 자칫 나약함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온유에는 파라독스 곧 역설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의 승리!’ 이것은 성경적 진리입니다.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지라. 살고자 하면 죽어라.”는 말씀이 그렇고, “온유함에 복이 있다.”처럼 역설이지만 진리입니다. 그랬기에 바울도 고백했던 것입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바울은 왜 약한 때가 강함이라고 했을까요? ‘약한 그때에’와 ‘강함이라’는 말 사이에 생략된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찾아내고 알아야 우리도 약한 때 강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가난할 그때에 부유함이라.’ ‘내가 실패했을 그때에 성공이라.’ 했을 때, 가난은 가난이고 실패면 실패지 그게 어떻게 부유함이 되고 성공이 된다는 말인지요?
과연 ‘그때에’라는 말 뒤엔 어떤 말이 생략되어 있기에 그런 걸까요?
‘하나님이 계시니’라는 말이 추가되어야 합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하나님이 계시니’ 강함이라."
그렇습니다. 바울의 선언은 하나님 덕분에 우리의 약함이 강함 되고, 우리의 가난이 부유해지고, 우리의 병듦이 강건해질 수 있다는 고백이자 확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이치가 다 그러합니다. 겨울날, 밤새 많은 눈이 내린 아침에 솔밭에 나가보면 군데군데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눈에 띕니다. 설해목이라고 하는 것들인데, 나뭇가지에 눈이 쌓일 때 부드러운 가지는 쌓일 때마다 한 번씩 휘어져서 눈을 털어내는 데 반해 단단한 가지는 버티다 버티다 그만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는 약한 것이 강함을 이깁니다. 무게감 없는 눈이 그렇고, 휘어져 버리는 가지가 그러합니다.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과 바위가 싸우면 끝내는 누가 이기던가요? 해와 바람의 옷 벗기기 싸움에서는 누가 이겼습니까?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온유란 말이 우리말 번역에는 모두 “온유”라고만 되어 있어 어감상 약한 이미지가 떠올려지지만, 원어를 보면 구약에는 히브리어로 ‘아나우’, 신약에서는 헬라어로 “프라우테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원어에는 우리말의 온유라는 단어가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는 영적으로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프라우테스로 번역된 온유한 자라 함은 ‘길들여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좋은 의미로는 순응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전에는 야생마를 길들여 교통수단으로 썼습니다. 그때 거칠고 통제 불능이었으나 길들여진 말을 프라우테스라고 불렀습니다. 상태적으로도, 사나운 맹수가 훈련을 통해 주인을 따르고 순종하게 될 때도 프라우테스 즉 온유해졌다 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최근에 개가 주인이나 이웃을 물어 뉴스가 되곤 합니다. 길든 줄 알았는데 본성을 드러내니 문제가 됩니다. 이처럼 같은 짐승일지라도 길들여진 여부에 따라 드러나는 행동이 달라집니다.
같은 이치로 사람일지라도 길들여지지 않으면 개 같은, 혹은 개만도 못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며 사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내 본성과 성질을 못 이겨 하며 살고 계십니까?
성경이 말하는 온유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뜻에 길들여진 사람, 하나님의 의도 대로 순응하며 사는 사람, 힘과 능력을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며 사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간단한 비교를 해보자면, 하나님께 길들여진 사람의 특징이 매사에 기도하는 거라면,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의 특징은 범사에 불평하는 겁니다. 전자가 감사라면, 후자는 원망입니다. 전자가 인내라면 후자는 낙심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께 길들여져 살았는지, 내 본성대로 살았는지를 스스로가 알 수 있습니다.
혹 번역상 ‘길들여진다.’고 하니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표현을 좀 순화시키자면 ‘익숙해진다’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
일전에 티브이를 보는데 주인이 간식을 들고 개에게 “앉아!”라고 명령하고 나서 개가 앉으니까 간식을 줍니다. 이런 훈련이 반복되면서 개는 주인 말에 순종하면 간식을 주더라가 익숙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개도 자기에게 주인이 있음을 알고, 그 주인의 명령에 익숙해져야 자기에게도 유익이 있음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길들여져야 한다는 말도 그런 의미입니다. 나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주인이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내게 유익인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공들이고 애썼는데 안 되고 실패한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 “왜 안됐지?”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으셨는지요?
왜 안됐을까요? 가끔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길들여 당신의 뜻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기를 원하셔서 우리가 하는 일들이 안 되게 하실 때도 있음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안 된 일 앞에서 “왜 안됐지?”를 백날 궁리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대신 안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되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왜 안됐지?” “아하! 하나님이 되게 하시려고 안 되게도 하시는구나!”
이렇게 믿고 사는 사람, 아니 최소한 그렇게 살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있다면 그런 여러분이 바로 온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복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 프라우테스란 어떤 환자의 몸에 열이 올라 온몸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는데 이 열이 진정돼서 ‘정상적인 상태가 되었을 때’를 일컬어 온유해졌다고 합니다.
사람의 정상 체온은 36.5도라야 당연한 겁니다. 이처럼 몸의 열이 정상 체온이 되었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몸이 ‘당연한 상태’가 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인생이 당연한 상태로 되어지는 것. 이게 본문이 말하는 온유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정상적이면서도 당연한 형편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사람이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 혹은 당연히 누려야 할 삶을 사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처음 사람을 만드셨을 때의 하나님의 의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의 형편이 끼니를 거를 만큼, 또는 꼭 필요한 돈이 없을 만큼 가난한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온유케 하심이 그에게 정상적인 공급과 채움이 있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병들어 아프고 몸이 불편한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슬프고 힘들고 한숨짓는 것이 정상적인지는 못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온유케 하심은 그것들을 정상적으로 회복시켜 주시며 당연한 상태를 누리게 해 주십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온유함은 단지 기질적인 온순함의 차원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복입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온유해질 수 있을까요?”라고.
그러나 이는 잘못된 질문입니다. 성경은 우리더러 “온유하게 돼라”거나 “온유해지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사람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온유를 성령의 열매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유의 뿌리는 성령입니다. 그렇기에 누구든 성령을 받아야만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십니까?
평소 본문을 읽으실 때면 ‘온유한 자’, ‘복이 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라는 말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복이 있다’가 가장 중요합니다. 흔히들 온유함에 초점이 있다고 생각해서 본문을 온유한 자가 되기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온유 즉 ‘프라우테스’는 어떤 상태라고 했습니까?
온유함이란 ‘길들여지는 것’이고 동시에 ‘성령이 주시는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길들이시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또한 우리로 열매 맺게 하시는 성령님이 아니고는 누구도 온유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 또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럼 어쩌라고?”
복에 대한 해석을 달리해야 합니다. 제자훈련 때 배운 거지만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복이 있다’는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복을 말할 때면 무언가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생각합니다. 돈이 많아진다던가, 병이 나아 건강해진다던가. 하는 일들이 술술 잘 풀린다든가 하는 것들을 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을 좋아들 합니다.
그런데 그 좋은 복이 하필 나에게만 없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건지요?
나는 왜 이리 복이 없나? 탄식만 하실 건가요? 복을 받기 위해 무작정 아무 하늘에나 대고 빌기만 하나요?
그런 행동들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런다고 없던 복이 생길 리도 없고 그렇게 복을 받을 수 있다면 세상에 복 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성경이 약속하는 복은 그런 게 아닙니다. 성경이 유대적인 사고에서 기록된 책이기에 오늘날 우리의 성경 해석도 유대적인 사고로 해야만 합니다.
복을 받았을 때는 복이 있다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복이 없을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복이 없을 경우, 탄식하고 한탄하거나 복 받겠다고 이것저것 하려 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이런 식의 질문을 합니다.
“복이 없다면 과연 복을 어디서 받을 것인가?”
그들이 얻은 답이 무엇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복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게 유대인들의 답입니다.
유대인들은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 복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원하는 복을 하나님에게서만 찾는 것. 이것이 유대인의 복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이라고 할 때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에 있는 ‘복 있는 사람’ 또는 ‘복이 있나니’ 등의 표현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시나니”라는 말로 바꿔도 의미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해석법으로 본다면 오늘 본문에서의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란 말은 이렇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나님이 계셔 주시니 땅도, 복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여러분이 복 받길 위해 기도했다면 이젠 여러분이 ‘원하셨던 그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복’이 내게도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 자리에 계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나와 계시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그 믿음이 이 자리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서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변치 마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자가 온유한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여러분이 복 받는 자가 될 것입니다.
셋째, 구약의 개념으로 온유는 아나우인데, 나의 자유의지를 양보하고 ‘상대방에게 자유의지를 주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그 선택을 결정하는 것이 자유의지입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라는 말은 ‘선택’이란 말로 바꾸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약적인 온유의 의미가 뭐라고 했지요? 나의 자유의지를 상대방에게 양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유란 내 선택보다 하나님의 의지 곧 하나님의 선택을 우선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겟세마세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원하는 바를 간절히 기도하시고는 결론으로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온유해져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맡기는 것. 우리에겐 이 부분의 믿음이 부족합니다.
출애굽기 32:10에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간 사이에 백성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자유의지 곧 하나님의 선택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시는 것이었는데 정작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 책망받을 선택만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가나안 땅의 축복을 받았습니다만. 그러나 40년이나 연기된 후에야 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받을 복도 나의 자유의지로 인해 지연되고 있지는 않을는지요?
정녕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내 선택이 아니라, 내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양보하는 믿음이 있으시기를 권면 드립니다.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께나 사람을 향해 나의 자유의지를 양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믿어야만 그게 가능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는 물론이고 사람에 대해서도 나의 자유의지를 양보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온유함이고, 그럴 때 우린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복을 받는다고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이, 온유한 자가 기업으로 받게 될 땅은 대체 어디에 있는 어떤 땅일까요?
당연히 하늘 천국의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받을 땅의 복이 비단 천국만을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는 이 세상에서도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의 사이에서 발생한 땅 분쟁 때 선택의 자유의지를 조카에게 양보했습니다. 그 결과 당장엔 고생을 해야 했고 손해도 보았습니다만, 조카에게 자신의 자유의지를 양보했던, 즉 온유했던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앞서 유대인에게 있어서의 복의 개념은 뭐라 했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진정한 복이었기에 복은 좋은 땅을 가진 롯이 아닌 하나님과 함께했던 아브라함이 받은 것입니다.
세상에선 착하면 손해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꼭 그 말 때문은 아닐지라도 이후로 여러분은 착하게 살려고만 하지 마세요. 착하기보단 누구를 대하든 온유하게 살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잊지 않으셨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자만이 온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함으로 살아가는 길은 축복에 가까워지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는 근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는 혈기 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는 다투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는 내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특히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는 어디서건 어떤 자리에서도 스스로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제부터 전혀 실망할 일이 없다거나 근심하고 혈기 낼 일이 없을 거란 말은 아닙니다.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이제부턴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해야 할 성도이며 여러분이야말로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실 주인공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는 어떤 선택을 하시건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양보하세요. 하나님의 뜻대로라야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나에게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에 익숙해지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복인 것을 믿으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온유한 자가 당연히 누려야 할 복들이 지체되지 않고 정녕 여러분의 것이 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