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8월 10일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 우범선은 1895년 10월 8일 일본 공권력 집단과 합세해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우장춘을 비롯한 범죄자들은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를 참혹하게 살해한 뒤, 시신을 인근 숲속으로 가져가 불태웠다.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총지휘자는 주한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였다. 당시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연대해 일본 세력 축출을 도모 중이었다.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도 일본의 조선 지배를 견제해 자국의 동아시아 진출을 원활히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일본은 명성황후만 없애면 조선과 러시아 사이의 연대를 끊을 수 있다고 보았고, 그것이 러시아와 전쟁을 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우범선은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후 친일 세력이 약해지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히로시마廣島 인근 구레시吳市에서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으며 거주했는데, 일본인 여성 사카이酒井仲와 혼인하여 1898년 맏아들 우장춘을 낳았다. 우범선은 1903년 11월 24일 고영근, 윤효정, 노원명에게 처단되었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고영근, 윤효정, 고원명 의사의 이름이 없다. 명성황후 시해는 국제 범죄일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 우리나라의 중요 사건이다. 그런 일을 자행한 악질 반민족행위자를 죽여 민중의 기운을 북돋운 의사들을 독립 조국이 받들지 않으면 누가 어떻게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우리가 저명한 독립지사를 제대로 모시는 것도 아니다. 1900년 8월 10일 이봉창 의사가 태어났다. 나는 1910년대 광복회와 1920년대 의열단에 이어 1930년 의혈 항쟁의 핵심으로 활동했던 한인애국단을 중심 제재로 한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을 써서 이봉창, 윤봉길, 이덕주, 유진만, 최흥식, 유상근 등 애국단 단원 지사들의 순국을 위로하고 그 헌신을 현창하는 데 진력을 다했다. 그러나 독자가 별로 없다.
오늘 이봉창 의사 탄신 122주년을 맞아 “하늘에 조각구름 떠 있고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아, 아, 대한민국”은 과연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루터는 “할 일이 많은 오늘 나는 한 시간 일찍 잠에서 깨었다. 그래야 기도 시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