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부정과 비하'에서 멈춰 있던 잉여 담론의 다음 장을 연 <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이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잉여 문화가 가진 재기발랄함이 아니라 그들의 혁명적 잠재성에 주목했다는 데 있다. 필진으로 참여한 백소영 이화여대 HK연구교수는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서는 기성세대가 이들을 주목하고 응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필진들이 공통적으로 잉여인간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계속되는 한 '잉여'는 불가피할 거예요. 잉여는 정확히는 '나머지'가 아니라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상위 10%와 하위 10%, 그 사이 80%가 그냥 잉여가 되고 있는데, 약자에의 관심은 하위 10%에만 맞춰져 있거든요. 중간의 80%에 대한 관심이 없어요. 하위 10%만도 못한 거죠.
요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가혹한 규칙을 정하고 탈락을 당연시하잖아요. 하지만 이런 경쟁 구도가 너무 사회에 만연해진 게 아닌가 싶어요. 다 같이 훌륭한 역량을 갖췄어도 등수 안에 못들면 패배자가 돼요. 99점을 받은 학생도 다른 학생들이 100점을 받으면 루저가 되죠. 이건 아니라는 겁니다.
잉여의 잠재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상당수의 사람들이 지금의 사회 규칙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잉여 현상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잉여라 불리는 사람 중에는 자신을 열린 가능성으로 보고, 사회의 룰에 컨트롤당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이도 있을 겁니다.
네티즌의 '잉여 콘텐츠'도 대부분 조야하지만 그런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에 주체적인 열정과 노력이 담겨 있어요.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표현과 소통 방식으로 존재라는 데서 건강한 에너지를 느껴요.
청(소)년에게 인터넷은 '공동 환상'의 공간이라고도 하셨는데요. 잉여 문화의 잠재성이 실체를 띠고 보다 생산적인 결과물이 될 수 있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결국은 오프라인으로 끌고 와야죠. 실제로 고등학교에서 두발자유화를 위해 학생들이 인터넷에서 미리 합의를 하고 오프라인에서 단체행동을 해서 교사들의 생각을 바꾸는 경우도 있습니다. 386세대인 우리는 욕망에 솔직하지 못했습니다.
대의명분에 맞는지 자기 검열을 했기 때문에요. 하지만 제도에 순응만 하는 인간은 제도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요. 반면 요즘 청(소)년들은 '자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자신의 행복이 일순위인 이들은 기성세대가 만들지 못하는 생동감과 상상력이 있어요. 다른 삶의 방식은 결국 이들 '잉여' 세대에 의해서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기성세대가 이들 세대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뭘까요.
요즘 엄마들은 소위 '전문 엄마' 역할만 하고 있어요. 틀에 짜인 교육 과정에 아이들을 몰아 넣고 있는데, 이는 실패감만을 줄 뿐이에요. '잉여 상태'의 아이들에게 상위 10%가 되라고 다그치기보다는 '너희의 잠재성이 기대된다'고 격려하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에요.
사회가 요구하는 획일적 기준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똑같은 인재만이 우글대는 사회는 너무 삭막하고 그 효용성도 낮아요.
결국 다원화의 길을 지향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모두가 같은 길을 달리는 '죽음의 질주'에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