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끓인 라면 외 4편 / 오성인
오늘은 동생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을 끓일 겁니다 봉지 안 마른 면발 같은 동생의 길은 꼬이고 굳어져 있어요 아무도 걷지 않는 텅 빈 길엔 아사(餓死)한 바람의 뼈들이 갈아져 비명처럼 흩날립니다 시간의 체온에 닿아본 적 없는 동생은 더 이상 빛과의 추억을 간직하지 못하는 수명 다한 싸늘한 알전구처럼 차갑습니다 손짓을 오해한 산새들이 놀라 흐드득 달아나고 짓궂은 산짐승들이 우우우우 어둠을 타고 내려와 길목을 막고는 여행을 떠나는 언어들을 위협합니다 허공의 험한 골짜기를 헤치고 봉우리를 넘어 타인에게로 향하던 언어들이 빈손 그대로 돌아오는 것을 보며 나는 나이팅게일, 동생만의 나이팅게일을 꿈꿉니다 푸르름이 증발한 동생의 혈관에 물을 채우고 체온들이 지나는 길목에 서서 빛들의 소리를 통역하며 차가운 동생을 덥힐 거예요 빌빌 꼬인 채 굳어 있던 길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네요 여기,
아직, 염원이 담긴 수프와 파와 어둠을 밝혀줄 달님 빼닮은 노른자는 넣지도 못했는데 나이팅게일은 한창 부풀어가는 중인데
못 다 끓 인 당 신 의 나 이 팅 게 일 은 아 직 도 끓 고 있 나 요
* 파주 장애남매 화재사건 희생자 박지우 양에 대하여.
치약팩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치약팩이 마지막까지 남은 내용물을
혼신을 다해 짜내고는 피이익 고꾸라진다
따뜻한 체온 대신 차가운 정적만 흐르는 치약팩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듯 관을 닮은 휴지통으로 몸을 누인다
풋풋한 크림을 아침 점심 저녁마다 어김없이 선사해주었던
그의 왕성한 시절을 회상하다가 문득,
그와 같은 모습을 꼭 어디선가 봤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적 목욕탕에 갔을 때 본 아버지의 그것
수줍은 듯 숙이고 있는 아버지의 그것이 웃기다며
마냥 낄낄거리는 철없는 나를 혼내는 대신,
나이 들면 저절로 알게 된다며 시원하게 등을 밀어주시던 아버지
그 후 오랜만에 갔던 목욕탕에서 다시 본 아버지의 그것은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자꾸만 아래로 처지고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시작되어 부풀어가는 중에 있는 나의 생(生)이
어떻게 비롯된 것인지 온전히 내 것인지도 모르는데
유일하게 내 생의 비밀을 알고 있을 아버지의 그것에
낡은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눈물 한 방울조차 버거울 때면
근원을 밝히지 못한 나는 생 앞에서 부끄러움에
그것처럼 고개 들지 못할 것이다
묵은 생각들이 흰 거품을 내며 한껏 부풀어 오르는 화장실
뭔 놈의 좆을 그렇게 오래 들어앉아 보고 있냐, 하는
바깥의 아버지 목소리가 문고리를 덜그럭덜그럭 보챈다
독(毒)
내 방은 독이다 치명적인 맹독이다 방의 살점을 한 숟갈 한 젓가락씩 떼어 가져다 먹고서 한 구절의 유언도 남기지 못한 안이한 언어들의 시체가 즐비한 이곳은 복어의 내장처럼 검붉다 어제를 겨우 보낸 나와 오늘의 절반도 살지 못한 내가 싸늘한 몸으로 흰 천에 덮어져 나가 검붉음과 함께 화장(火葬)되었다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의 괴성이 독가스처럼 자욱했다 한번 품은 독기를 쉬이 내려놓지 못하는 병신 같은 맹독성을 미칠 정도로 증오한 지 이십 년, 이 씹 놈의 죽은 시간들이 성난 물보라처럼 밀려와 발목을 잘랐다 여린 치어처럼 다가오는 숱한 인사들을 향해 맹독성 물음표 모양 알들을 낚시 바늘처럼 던졌다 나는,
차라리 맹독성 내 방이
내 숨통을 끊기를 가죽을 벗겨내도 끈질기게 살아 몸을 배배 꼬며 저항하는 곰장어 같은 운명쯤 즉사시켰으면
파란 눈동자
동화 속의 요술램프를 비비며 주문을 외우는 장면처럼 손가락으로 쓰다듬듯 그를 깨우니 파란 눈을 뜹니다 그 안에는 한 세계가 있습니다 나를 유혹하는 그곳은 치명적입니다 동굴 안에 고대의 벽화처럼 새겨진 마이크로소프트社의 로고를 따라 쭈욱 내려가면 펼쳐지는 도시, 고여 있는 듯 흐르는 세계는 중심을 잃고 갈팡대는 내가 딱 숨기 안성맞춤이에요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같은 이 세계는 안정적이지만 활동적이지 못합니다 음률 없는 노래는 빛바랜 A4용지 같은 내 귀를 금방 젖게 하고 온기가 없는 그림은 아무리 봐도 살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아요 환상에 들떠 있던 나는 금방 싫증이 나서 녹조로 짠 커튼 뒤로 발길을 돌립니다 사나운 파도에 휩쓸린 내가 그 안에서 몸부림치다가 산산조각 납니다 자기보다 큰 먹이를 삼킨 뱀이 소화를 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소화되다 만 먹이와 함께 찢겨지듯 말입니다 아버지의 피는 고단한 그의 몸만큼이나 늙어 있었고 식은 지 오래입니다 의지가 담겨 있지 않은 붉은 것은 특유의 철 냄새도 나지 않았어요 쓰러져버릴 듯 삐걱대는 아버지는 깡소주의 즐거운 놀이터였습니다 그와 나 사이를 잇고 있던 통로가 붕괴되었고 아버지와 나는 서로 단절되었습니다 단절된 틈을 타 밤은 내 방에 어둠을 산란해놨어요, 그곳은 심해(深海)였습니다 나 외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라고 다행스레 여기던 차에 야광 해파리처럼 유영하는 파란 눈동자를 처음 보게 되었고 습관처럼 나는 늘 그에게 의지해왔습니다 푸른 비밀정원이었어요 그곳에선 눈치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소리 내서 웃을 수 있고 울 수도 있고 화도 낼 수 있었어요 쉽게 미칠 수 있는 그 안에서 어머니가 피를 흘리며 웃기도 했고 아버지 안의 넋 잃은 아버지가 와장창 깨지기도 했습니다 물집처럼 부푼 눈으로 정신건강센터를 찾아 정신건강검사지에 파란색 볼펜으로 추억을 남기듯 마킹했습니다 추억은 추악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요 파란 눈동자는 안정을 가장한 불안정이므로 안전하지 않아요 더 이상 파란 눈동자에 기댈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사나운 파도에 유린당하고만 있어야 합니까 몸 여기저기 파란 눈처럼 기생하는 사마귀를 의사는 영하 195도의 질소액으로 지집니다 타들어가는 추악
파란색 옷을 입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우울한 표정으로 걷는 여자*가,
위에서 아래까지 파란색 옷을 차려입은 할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봐요
당신들의 파랑은 안녕하신지요
* 로트렉 그림 〈물랑루즈를 떠나는 잔느 아브릴〉의 장면.
** 고흐 그림 〈슬픔에 잠긴 노인〉의 장면.
상한 깻잎장아찌*를 보며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다가
손길 뜸한 구석에 웅크린 깻잎장아찌 통을 본다
언제 담가뒀는지 까마득한 그것을 꺼내보니
먹구름 같은 곰팡이가 한가득 폈다
변질된 간장의 시큼퀴퀴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물에 젖은 나비의 날개처럼 힘없이 찢어지는 깻잎
숨통을 짓누르는 시간의 무게를 버티며 깻잎들은
혀와 닿는 순간만을 학수고대했을 것이다
희로애락애오욕으로 잘 곰삭아졌을 그들과 몸을 섞은
혀에서는 박수갈채가 쏟아지듯 침샘이 폭발했을 텐데
미안한 마음을 담아 쓸어주듯 깻잎을
배수구 망에 담는다
마감을 앞둔 기자의 손놀림처럼 쏟아져 내리는
수도꼭지의 물줄기가 그늘진 깻잎의 생을
읽어 내려가는 것을 보다가 문득,
어느 무명 여 작가의 삶을 떠올린다
지독한 무관심과 굶주림 안에 방치된 채
희미해져가는 삶을 악착같이 붙들어 맸을 그녀는,
생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소금기를
머금으려 했던 깻잎처럼,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하는
야속한 운명을 애써 외면하려 했을 것이다
채 숙성되지 못하고 잔등(殘燈)처럼 기로에 놓였던
당신들의 시간은 이제야
안녕을 향해 가고 있을는지
미약하게 남아 있는 소금기를 붙들며
그만 아프고 싶다 하는 깻잎을
달래듯 꾹 쥐자 고름처럼 짜여져 나오는 눈물
싱크대 안을 가득 메우던 울음이 점점 멎어져가는
부엌
* 故 최고은(1979~2011)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을 떠올리며.
▲ 오성인 / 1987년 광주 출생. 목포대 국문과 4학년 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