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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거나 하여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마음챙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기면서 숨을 내쉰다."
18. "① 길게 들이쉬면서는(*1)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③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2)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④ '몸의 작용[身行](*3)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19.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4)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5)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 짓는다.
⑦ '마음의 작용[心行](*6)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⑧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20.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7)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8)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9)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⑫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10)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21.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11)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⑭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12)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⑯ '놓아버림을(*13)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14)
22.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거듭거듭 행하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1) ‘들이쉬면서는’은 assasanto를 옮긴 것인데 이 단어는 assasati(to breathe)의 현재분사이다.
‘길게 들이쉬면서는’은 길게 들이쉴 때라는 뜻으로 ‘길게 들이쉬어야겠다.’거나 ‘짧게 들이쉬어야겠다.’하는
그런 의도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길게 들이쉴 때는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안다는 뜻이다.
『청정도론』 (Ⅷ.168)은 『무애해도』의 설명을 인용하여
‘이렇게 꿰뚫어 알 때 열의(chanda)가 일어나고, 또한 환희(pāmojja)가 일어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Ps.ⅰ.177)
(*2) 『청정도론』은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다.
“온 들숨의 몸의 … 온 날숨의 몸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체험하면서, 분명하게 하면서 내쉬리라고 공부짓는다.
이와 같이 체험하면서, 분명하게 하면서 지혜와 함께한 마음으로 들이쉬고 내쉰다.”
( 『청정도론』 Ⅷ.171) 여기서 밝히고 있듯이 이 문맥에서 몸(kāya)은 호흡 그 자체를 나타낸다.
(*3) “여기서 ‘몸의 작용[身行, kāya-saṅkhāra]’은 들숨날숨을 말한다.
비록 이것은 마음에서 생긴 것이지만 그것의 존재가 몸에 묶여 있고
몸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몸의 작용이라 부른다.”(Pm.220)
신행(身行)을 한역되는 kāya-saṅkhāra를 본서 전체에서 역자는 들숨날숨을 뜻할 때는 ‘몸의 작용’으로 옮기고,
다른 곳에서는 12연기의 두 번째인 의도적 행위를 설명하는 문맥에서는 ’몸의 의도적 행위’로 옮긴다.
(*4)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희열을 경험한다(pīti-paṭisaṃvedi).’
그것은 대상을 통해서와 미혹하지 않음을 통해서이다.
① 그는 희열이 있는 초선과 제2선에 든다. 그가 그것에 드는 순간에 禪을 얻음으로써 대상을 경험했기 때문에 대상을 통해서 희열을 경험한다.
② 희열이 있는 두 선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선과 함께한 희열을 파괴되기 마련이고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명상한다.
그가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 특상을 경험하기 때문에 잊어버리지 않음을 통해서 희열을 경험한다.”( 『청정도론』 Ⅷ.226~227)
즉 ①은 사마타를 닦아서 禪에 들었을 때의 희열이고,
②는 禪에서 출정하여 무상·고·무아의 특상을 꿰뚫는 위빳사나를 할 때의 희열을 말한다.
(*5) 『청정도론』은 ‘행복을 경험하면서(sukha-paṭisaṃvedī)’도 희열의 경험과 같은 방법으로 두 측면에서 아해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① 사마타를 닦아서 禪에 들었을 때의 행복과
② 禪에서 출정하여 무상·고·무아의 특상을 꿰뚫는 위빳사나를 할 때의 행복을 말한다.
다른 점은 행복은 초선부터 제3선까지에서 경험된다는 것이다.( 『청정도론』 Ⅷ.229)
(*6) “마음의 작용[心行, citta-saṅkhāra]은 느낌의 무더기[受蘊]와 인식의 무더기[想蘊]를 말한다. …
네 가지 禪들로 ‘마음의 작용을 경험한다(citta-saṅkhāra-paṭisaṃvedī)’고 알아야 한다.”( 『청정도론』 Ⅷ.229)
(*7) “‘마음을 경험하면서(citta-paṭisaṃvedī)’란 네 가지 禪들로 먀음을 경험한다고 알아야 한다.”( 『청정도론』 Ⅷ.231)
(*8)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abhippamodayaṃ cittaṃ)’ :
여기서는 삼매와 위빳사나의 두 가지 방법으로 기쁘게 한다. 어떻게 삼매를 통해 기쁘게 하는가?
희열(pīti)이 있는 두 禪에 든다. 그 증득의 순간에 그 선과 함께한 희열로 마음을 반갑게 하고 기쁘게 한다.
어떻게 위빳사나를 통해 기쁘게 하는가? 희열이 있는 두 禪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禪과 함께한 희열을
파괴되기 마련이고 사그라지기 마련이라고 명상한다.
이와 같이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 禪과 함께한 희열을 대상으로 삼아 마음을 반갑게 하고 기쁘게 한다.”( 『청정도론』 Ⅷ.232)
(*9) 『청정도론』 Ⅷ.232는 두 가지로 ‘마음을 집중하면서(samādaha citta)’를 설명하고 있는데,
하나는 네 가지 선에 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찰나삼매(khaṇika-citt-ekaggatā, 순간적인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 刹那心一境性)를 통해서이다.
찰나삼매는 “그 禪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禪과 함께한 마음을 파괴되기 마련이고 사그라지기 마련이라고 명상할 때
그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 특상을 통찰하는 것”이라고 『청정도론』 (Ⅷ.232)은 정의하고 있다.
(*10)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
초선을 통해 장애들로부터 마음을 벗어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면서,
제2선을 통해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로부터, 제3선을 통해 희열로부터,
제4선을 통해 행복과 고통으로부터 마음을 벗어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면서 들이쉬고 내쉰다.
혹은 그가 그 禪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禪과 함께한 마음을 파괴되기 마련이고 사그라지기 마련이라고 명상한다.
그가 위빳사나를 하는 순간에 무상의 관찰로 영원하다는 인식(nicca-saññā)으로부터,
무아의 관찰로 자아라는 인식(atta-saññā)으로부터, 염오의 관찰(nibbidānupassanā)로 즐김(nandi)으로부터,
탐욕의 빛바램의 관찰로 탐욕(rāga)으로부터, 소멸의 관찰로 일어남(samudaya)으로부터,
놓아버림의 관찰로 가짐(ādāna)으로부터 마음을 벗어나게 하고 해탈하게 하면서 들이쉬고 내쉰다.”( 『청정도론』 Ⅷ.233)
(*11) “‘무상을 관찰하면서(anicca-anupassī)’라고 했다. 여기서 무상한 것이란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일어나고 멸하고 변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uppāda-vay-aññathatta- bhāvā)이다.
무상한 성질(aniccatā)이란 그들에게 존재하는 일어나고 멸하고 변하는 성질이다. 혹은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이다.
생긴 무더기[蘊]가 그 본래의 모습으로 머물지 않고 순간적인 부서짐(khaṇa-bhaṅga)을 통해 부서진다(bhada)는 뜻이다. 무상의 관찰이란 그 무상함으로 물질 등에 대해 무상하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청정도론』 Ⅷ.234)
(*12) “‘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virāga-anupassī)’ :
여기 탐욕의 빛바램은 파괴로서의 탐욕의 빛바램과
절대적인 탐욕의 빛바램(khaya-virāgo ca ac-canta-virāgo ca)의 두 가지가 있다.
여기서 파괴로서의 탐욕의 빛바램이란 형성된 것들[行]이 순간적으로 무너지는 것(khaṇa-bhaṅga)이다.
절대적인 탐욕의 빛바램이란 열반이다.
탐욕의 빛바램을 관찰함이란 이 둘의 관찰로 일어나는 위빳사나의 도(magga)이다.
‘소멸을 관찰하면서(norodha-anupassī)’라는 구절에도 이 방법이 적용된다.”( 『청정도론』 Ⅷ.235
(*13) “여기서도 ‘놓아버림(paṭinissagga)’은 두 가지이다.
버림으로서의 놓아버림과 들어감으로서의 놓아버림이다.
놓아버림의 관찰이란 놓아버림 그 자체가 관찰(anu-passanā)이다. 이것은 위빳사나의 도의 동의어이다.
① 위빳사나는
㉠ 반대되는 것으로 대체하여 [과보로 나타난] 무더기들과, 업형성력(abhisaṅkhāra)들과 함께 오염원(kilesa)들을 버리기 때문에
㉡ 형성된 것에 대해 [무상 등의] 결점을 보고 그 [형성된 것의] 반대인 열반으로 기울어짐으로써 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에
각각 버림으로서의 놓아버림과 들어감으로서의 놓아버림이라 한다.
② 도는 ㉠ 근절(samuccheda)로써 무더기를 생기게 하는 업형성력들과 함께 오염원들을 버리기 때문에
㉡ 열반을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열반에 들어가기 때문에 각각 버림으로서의 놓아버림과 들어감으로서의 놓아버림이라 한다.
이 두 [위빳사나의 지혜와 도의 지혜]는 각각 이전의 지혜를 계속해서 따라 보기 때문에 관찰[隨觀]이라 한다.”( 『청정도론』 Ⅷ.236)
(*14) 『청정도론』의 설명에서 보듯이
⑫번째까지의 앞의 세 번째의 네 개조까지는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방법이 둘 다 적용되었지만
이 네 번째의 네 개조는 위빳사나의 방법만이 적용되고 있다.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의 완성
23. "비구들이여,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어떻게 닦고 어떻게 거듭거듭 행하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을 성취하는가?" (*15)
몸의 관찰[身隨觀]
24. "비구들이여, 비구는
①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② 짧게 들이쉬면서는 '짧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③'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④ '몸의 작용[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몸의 작용를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身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 들숨과 날숨은 몸들 가운데서 한 가지 [형태의] 몸(*16)이라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17) 비구는 그때에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무는 것이다."
(*15) 이하 본경에서는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고 많이 [공부] 지어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완성하고(§§23~28),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완성하고(§§29~40),
명지와 해탈을 완성하는 것(§§41~43)을 설하고 계신다.
그리고 여기 본경§§23~43에 나타나는 이 내용은 『상윳따니까야』 제6권 「아난다 경」(S54:13)의 전체 내용과 같다.
(*16) “‘한 가지 [형태의] 몸(kāy-aññatara)’이란 흙의 몸 등 네 가지 몸 가운데서 어떤 하나라고 나는 말한다.
즉 바람의 몸[風身, vayo-kāya]이라고 나는 말한다는 뜻이다.
혹은 눈의 감각장소, 귀의 감각장소 … 덩어리진 먹는 음식이라는 25가지 물질의 부분들을
물질의 몸[色身, rūpa-kāya]이라한다.
그중에서 들숨날숨은 감촉의 감각장소[觸處, phoṭṭhabb-āyatana]에 포함되기 때문에 몸의 한 형태이다.
그 때문에도 이와 같이 설하셨다.”(MA.ⅳ.140)
(*17) “‘그러므로 여기서(tasmāt-iha)’하는 것은 네 가지 몸 가운데서 어떤 하나인 바람의 몸이다.
혹은 25가지 물질의 부분들인 물질의 몸 가운데서 어떤 하나인 들숨날숨을 관찰하기 때문에
몸에서 몸을 관찰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느낌 등의 모든 곳에서 그 뜻을 알아야 한다.”(MA.ⅲ.271)
첫댓글 은혜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