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근면성실, 안과 밖이 다 부지런하다면 -계동 전경창 선생의 선비 정신
심후섭 대구광역시 달성교육지원청 교육장
파동에서 용계동으로 나가는 다리인 가창교를 건너기 직전 왼쪽 골짜기로 접어들면 얼마 오르지 않아 양지편에서 무동재(武洞齋)라는 재사를 만날 수 있다. 이 재사는 계동 전경창(溪東 全慶昌, 1532∼1585) 선생을 비롯, 전유성(全由性), 전순손(全順孫), 전익견(全益堅), 전복견(全復堅), 전연(全璉), 전침(全琛), 전응창(全應昌), 전계신(全繼信) 등 옥산전문(玉山全門)의 여러 선현을 모신 재사로서 처음에는 파산재(巴山齋)라 불렀다고 한다.
계동 선생은 판서 백영(伯英)의 후손으로서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재사 당호는 어떻게 무신(武臣)의 느낌을 주는 무동재가 되었을까 하는 점이 궁금해진다.
함께 모셔진 전연(全璉) 선생이 병조판서 겸 의금부사였고, 전계신(全繼信) 선생 또한 병조판서로서 무신 성격이 더 강해서였을까? 어쨌거나 당초 파산재에서 지금과 같이 무동재로 불리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武’는 ‘무예’와 더불어 ‘굳세다, 용맹하다’는 뜻을 함께 품고 있으니, 의지가 굳세고 용맹한 분들을 함께 모신 재사라고 해석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손처눌(孫處訥) 선생이 찬(撰)한 계동 선생의 행장(行狀)에 따르면 ‘선생이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자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과 약포 정탁(藥鋪 鄭琢), 판서 윤국형(尹國馨)과 판서 권협실(權鋏實) 등이 상여를 호송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다음 해 2월 대구부 수성현 파잠리(巴岑里) 무동(茂洞) 등성에 장사지내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무동재는 무동(茂洞)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용계천 동쪽에 산다 하여 계동(溪東)이라는 호를 얻은 선생은 대구 지방의 많은 선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성리학자였다. 향토사학자 구본욱 님은 당시 계동 선생과 교류한 여러 선비들의 문집 등에서 선생의 당시 위상을 밝혀낸 바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계동 선생은 채응린(蔡應麟), 정사철(鄭師哲)과 더불어 조선 중기 대구 지역 성리학의 선구자로서 노력하였다. 특히 계동 선생은 퇴계 문인으로서 손처눌, 이주, 곽재겸, 류요신 등을 문하로 하여 성리학을 전수하는 한편, 채응린을 통해서는 서사원에게, 정사철을 통해서는 그의 아들 정광천에게 성리학을 전하게 하여, 대구 성리학의 중심인물로서의 그 기능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동 선생은 학문의 나눔을 실천하였다. 서사원에게는 ‘심경(心經)’을, 곽재겸에게는 ‘근사록(近思錄)’을 주면서 “학문의 이유는 과거(科擧)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존심양성(存心養成)에 있다”고 하여 먼저 인격 수양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다.
그리고 ‘만나는 선비마다 먼저 ‘소학(小學)’을 읽을 것을 권하였다’라든지 ‘역학도설(易學圖說)과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얻어 손수 베껴 쓰고, 그 이치를 찾아 사색하는 즐거움을 누렸다’라는 구절로 보면 선생은 서로 나누는 삶의 일부로 학문에 임했음을 또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선생은 부지런하면서도 모든 일에 성실하였다. ‘의관을 엄정히 하는 것은 바깥 닦음을 말하고 행실을 순결히 하는 것은 안 닦음을 말하니 안과 밖이 함께 닦이면 누가 귀하게 여기지 않겠는가?’라는 글을 벽에 걸어두고 이를 지키며 평생 근근성실(勤謹誠實)을 실천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계동 선생은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 그 우의를 아주 돈독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정사철은 계동 선생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자신과 계동 선생간의 관계를 백아절현(伯牙絶絃)으로 표현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타고난 성품 또한 강직하면서도 단호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잃은 선생은 백부에게 나아가 글공부를 하였는데, 백부가 누명을 쓰고 관가로 끌려가자 옥리(獄吏)와 맞서 그 억울함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굳건한 심조(心操)로 학문을 선구적으로 열고 이를 후학에게 전하였다.
계동 선생의 선비 정신은 더욱 새로이 조명되어야 한다.
출처: 대구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