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유격대 총지휘 신춘(1907-1934)
신춘은 1907년에 조선 경상도에서 출생하였다. 망국의 치욕과 민족적 원한은 그를 비분에 잠기게 하였다. 그때 그는 한 신문사의 기자로 있으면서 격정에 차넘치는 반일애국시편들을 적지 않게 썼다. 그후에 나라와 인민을 구할 진리를 찾아 중국에 왔으며 1926년에 조직의 파견에 의하여 광주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
1927년 12월 11일에 신춘은 황포군관학교 특무대대 제2중대(당시 특무대대 밑에 3개 중대가 있었는데 최용건이 제2중대 중대장이였음.)의 조선인전사들과 함께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국민당반동파와 일본제국주의가 연합으로 무력침공을 감행하였기때문에 부대는 봉기한 지 3일 후에 광주성에서 철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춘은 비분을 가득 품고 광주를 떠나 동만에 와서 인차 당조직을 찾았었다.
1930년 4월에 중공동만성위에서는《전만농민투쟁강령》을 반포하여 각지의 농촌들에서 토지혁명을 실시하는 동시에 소베트정권을 수립할것을 호소하였다. 그해 4월하순에 중공동만특별지부에서는《5월투쟁행동위원회》를 조직할 조건이 성숙된 곳에서는《소베트정권을 세우고》광범한 군중들을 붉은5월투쟁에 뛰어俑돈?환기시킬것을 결정하였다. 조선족 공산당원인 신춘은 군중기초가 좋고 혁명성이 강한 화룡현 약수동에 파견되어가서 소베트정권을 세우는 일에 착수하였다.
약수동은 투도구서쪽으로 약 20킬로메터 되는 곳에 있다. 그때 상촌, 중촌, 하촌 등 몇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약수동은 호수가 100여 세대밖에 안되었다. 이곳은 20세기 20년대초기부터 혁명이 생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가운데서 박상활과 같은 사람들을 선두로 하는 조선족의 진보적청년들은 연이어 혁명에 뛰어들었는데 그들중의 대다수는 용정 동흥중학교의 학생들이였다. 이러한 학생들은 마을에 돌아간후에 야학을 꾸리는 방법을 통하여 혁명사상을 전파하였다. 약수동의 곳곳마다에 표어와 삐라들이 나붙었으며 반제동맹, 농민협회, 청년회, 부녀회, 그리고 소년회와 같은 혁명적군중조직이 선후하여 조직되었다.
약수동에 이미 이러한 혁명의 기초가 있었기때문에 신춘이 오자마자 온 마을에서 마른나무에 불이 달리듯이 혁명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5월 1일에 용정의 수백 명 노동자들이 솔선적으로 파업을 단행하여 붉은5월투쟁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약수동의 수백 명 군중들은 노동자들의 파업에 호응하여 신춘 등의 령도밑에 즉시 제국주의,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5월하순에 이르러 약수동일대의 투쟁열의는 더욱더 높아갔다.
5월 27일에 약수동 그리고 그 인근 마을의 군중들은 약수동 상촌의 한 집 큰 뜨락에 모여 소베트정권을 세웠다. 이 대회에서 신춘은 자기의 연설에서 약수동소베트정권이 수립된 의의와 그 역사적사명을 이야기하였다. 회의후에 성세호대한 시위행진을 단행하여 조직된 농민들의 큰힘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시위행진은 3일동안 지속되었다.
천지개벽의 그 나날에 군중들은 극악무도한 친일주구를 몇 놈 처단하고 지주와 고리대업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또 토지문서와 고리대문서를 불살라 버리였다.
약수동소베트정권의 수립은 동만 붉은5월투쟁의 고조를 상징한다. 이 소베트정권은 동만 뿐만아니라 전 동북에서의 첫 인민정권이였다.
약수동소베트정부의 성원들은 중공동만성위의 지시를 받들고 소베트의 령도하에 있는 광범한 농민군중들과 농민무장대오를 령솔하고 투도구로 진군하여 가서 기세 드높이 일어난《5.30》폭동에 참가하였다. 이것은 소베트가 나온 후에 있어서의 첫 행동이였다.
6월 10일에 《5.30》폭동후에 있어서의 동만 첫 중공기층지부인 약수동당지부가 나오게 되었다. 7월 10일부터 11일까지 화룡현 평강구제1차당대표대회가 약수동에서 열리였고 이 회의에서 중공평강구위원회를 선거하였다.
무장투쟁문제는 그번 당대회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의제로 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평강유격대와 적위대를 조직할데 대한 결의를 채택하고 신춘에게 군사총지휘를 위임하였다. 대회에서 신춘은 당면 정세하에서 첫째 가는 과업은 적들에게서 무기를 탈취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지적하고 지방적위대가운데서 우수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유격대를 조직할 방안을 제기하였다. 신춘은 장인강으로 올라갔다가는 쟈피거우로 가군 하면서 무장대오를 조직하기 위하여 침식을 잊고 뻔질나게 돌아다니였다.
7월말에 평강유격대가 정식으로 창건되었다. 유격대원들은 약수동, 소양구, 태양구, 장인강과 같은 곳의 적위대원들가운데서 뽑아왔다. 이 유격대는 대외 명칭이《연화유격대》였고 그 군사총지휘는 신춘이 맡았다. 신춘은 80~90명이 되는 유격대원들을 3개 중대로 편성하고 그 아래에 9개 소대를 두었다. 대원들은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약수동과 장인강 유격구에 모여 군사훈련을 긴장하게 하였다.
어느 한번 신춘은 연화유격대를 영솔하여 돈화, 액목 일대의《8.1길돈폭동》을 지원하러 가라는 상급의 지시를 받았다.
그때 유격대는 헐망한 보총 몇자루밖에 없었으므로 신식무기로 무장한 적을 대처하자면 반드시 무기를 얻어야 하였다. 그때 장인강에 륙군 1개 소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신춘은 이 륙군 1개 소대를 습격하여 그들의 무기를 빼앗을 것을 결정하였다.
1930년 8월 초의 어느날이였다. 신춘은 연화유격대를 영솔하여 비밀리에 장인강에 들어갔다. 그런데 뜻밖에 정황이 변하였다. 바로 그날 로투구, 동불사, 투도구 등지의 300여명 륙군이 장인강으로 들어갔다. 신춘은 급급히 대오를 거느리고 장인강산속으로 철퇴하여간 다음 밤도와 연길현 도무거우 상촌으로 달려가 《8.1길동폭풍》을 지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무거우 상촌은 인가가 10새대도 되지 않은 편벽한 산간 마을이였다. 신춘은 대원들을 마을에서 잠간 쉬게 하였다. 이때 마을밖으로부터 보초병이 달려와 도무거우에 주둔하는 중국륙군 1개 중대가 이미 산꼭대기에 기여올라갔다는 급보를 알리였다. 쌍방이 접전하게 되었다. 유격대원들은 콩밭에 숨어서 완강하게 적을 맞받아 족치였다. 이때 작전을 지휘하던 신춘이 불행히 총에 맞아 발을 부상당하였다. 하지만 그는 아픔을 참고 모젤총을 휘두르며 더욱더 험악해지는 국면을 돌려세우려고 애를 썼다. 신춘은 바위 뒤에 숨어서 때때로 적을 사격하면서 적의 주의력을 자기에게 끌어오려고 시도하였다. 과연 적들의 사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 짬을 타서 유격대원들은 첩첩한 포위를 뚫고나갔다.
그번 조우전에서 연화유격대는 심한 손실을 보았다. 몇명의 대원이 영광스럽게 희생되고 몇명이 포로되어 연길감옥으로 압송되어갔다.
약수동으로 돌아온 신춘은 인차 구당위서기 주현갑에게 정황을 회보하였다. 상급에서 2명의 동지를 파견하여 사업을 협조하며 경험교훈을 총화하는 것을 돕게 하였으며 동시에 유격대를 다시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같은 해 8월 13일에 중공연화중심현위가 평강구 약수동에서 창립되었다. 당일에 소집된 제1차연화당원대표대회에서는 다시 소베트정권을 세울 문제를 주요한 임무로 삼아 토의하였으며 또한 곧 닥쳐올 《9.7》국제무산청년일을 계기로 소베트정권을 보편적으로 세울것을 결정하였다. 중공평강구위에서는 구유격대 총지휘 신춘을 파견하여 이 중대한 임무를 완수하도록 하였다.
1930년 9월 7일에 평강구소베트창립대회가 약수동 상촌에서 거행되었다. 대표들은 리봉삼을 소베트정부 회장으로 선거하고 그 밑에 선전, 행정, 경제, 군사 등 여러 부문을 설치하였다. 그후 어떻게 경축대회를 거행할 것인가 하는 의제를 토의하는데로 넘어갔다. 신춘 등은 세린하대지주 손가네 대장원을 습격하는 것으로써 소베트정권의 수립을 경축할것을 주장하였다. 회의에서는 장인강군중들이 약수동에 도착하면 곧 행동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투도구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육군이 이 소문을 듣고 쳐들어 오고 있었다. 당조직에서는 이 급보를 받자 손실을 피하기 위하여 모인 군중들을 급히 소산시키였다.
그런후에 소베트정부와 중공평강구위는 그곳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한 산밑 비밀거점으로 옮겨갔다. 그때 신춘은 부상당한 다리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지만 아픔을 참고 자기 희생적으로 사업하였으며 평강구소베트정권을 내오는 일을 하는 동시에 중공연화중심현위 군사부장을 협조하여 유격대를 조직하는 간고한 사업에 뛰여들었다.
그해 가을에 화룡현 평강구에서는 유격대를 제조직하였다. 이 유격대는 신춘 등의 영도 밑에 약수동, 장인강, 쟈피거우, 대동구, 이도구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무기를 빼앗고 친일주구들을 청산하는 투쟁을 광범히 벌리였다.
1930년 10월 중공동만특별위원회가 정식으로 나오자 연화중심현위는 연화현위로 개칭되었다. 신춘이 새로 나온 연화현위 제1임군사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조직의 신임은 신춘에게 무궁무진한 힘과 신심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부상당한 다리를 끌고 온종일 전 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본 현의 유격대를 조직하고 공고히 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사업하였다. 과도한 피로로 하여 그의 다리의 상처는 잘 아물지 않았다. 중공동만특위에서는 신춘을 훈춘에 보내여 부상당한 다리를 치료하게 하였다.
신춘이 훈춘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중공훈춘현위가 10월말에 대황구 청수동에서 창립되었다. 새 현당위에서는 군사투쟁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는 신춘을 훈춘현위 제1임군사부장으로 임명할 것을 결정지었다.
새로 나온 훈춘현위에서는 끊임없이 앙양되는 인민군중들의 항일열의를 제국주의,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의 궤도에 이끌어올리기 위하여 조직사업과 정치동원사업을 바싹 틀어쥐였다.
신춘은 다리를 부상당하긴 하였지만 아무리 생각하여도 열화같이 타번지는 투쟁정세 앞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는 양도익이라고 변성명하고 대황구에 가서 악질지주와 친일주구를 청산하는 투쟁을 직접 지휘하였다.
1930년 11월에 신춘은 동지들과 함께 대황구일대에서 황아장수로 분장하고 정보를 탐지하는 주구 리××를 잡아내여 북구에 끌고 가서 처단하였다.
1931년 음력설전야에 훈춘에 주둔하는 중국 육군이 혁명구역에 대하여 대규모적인 포위토벌을 하였다. 2월 상순의 어느날 신춘은 대황구 북구의 어느 농민의 집에서 삐라를 긴장히 찍고있다가 뜻밖에 적들에게 잡혀 훈춘육군대대부로 압송되어갔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빈랑구, 일송정, 류정평, 얜퉁라즈 일대에서도 40여 명의 동지들이 선후하여 체포되었다.
적들은 체포된 사람들을 악착스레 고문하면서 북구, 류정평, 일송정 등지에서 주구를 청산한 투쟁에 참가한 사람과 그 지휘자들을 공술하라고 하였다. 이 위급한 고비에 신춘은 자기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선뜻 나섰다.
《청산추쟁은 이 사람들과 관계가 없다. 그놈들은 모두 나의 명령에 의하여 처단되었다.》
《무엇이라고? 네가?》
적들은 너무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 준엄한 시각에 신춘은 모든 일을 자기가 끌어안고 기타 동지들을 보호함으로써 헌신적으로 남을 구하였다. 그 결과 체포된 40여 명의 동지들은 얼마 가지 않아 모두 석방되었다.
1931년 5월에 적들은 신춘을 연길감옥에 압송하여 가두었다. 적들은 신춘을 무기도형으로 판결하였다가 그후에 항일형세의 핍박으로 하여 유기도형으로 고쳐 판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4년 6월에 신춘은 형기가《만기》되어 출옥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적들이 피워댄 술책이라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적들은《형기가 만기되어 석방한다.》는 허울 밑에 연길 일본헌병대 특무를 사촉하여 암암리에 신춘을 살해하였다.
신춘은 희생되었다. 그러나 그의 불후의 명성과 특출한 공훈은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7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사람들은 더구나 존경하는 마음으로 광부봉기의 참가자이며 동북에서의 첫 인민정권인 약수동소베트정부의 창건자이며 연변에서 제일 일찍 조직된 무장대오의 하나인 평강구유격대—연화유격대의 조직자이고 지휘자이며 조선족혁명가인 신춘을 길이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