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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마을 능행스님
전현자
기자: 스님! 뵙게 되어 그리고 말씀을 들을 기회를 주시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요즘, 자재병원 건립 관계로 많이 바쁘실 것 같습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스님: 자재병원 건립 여정이 지금 약 40% 정도 남아 있는 상황이다 보니 모금을 위한 다양한 방안과 모금운동 그리고 병원건축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입장에서 결정할 것이 너무 많고 결정해주어야 하는 부분도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기도와 함께 담쟁이 이파리가 되어 또 다른 담쟁이 잎과 줄기가 되어주시는 많은 분들과 함께 정토마을은 호흡을 고르며 불치의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웃들을 향해 벽을 오르고 있습니다.
기자: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강의도 하시는지요?
스님: 강의는 약 2년째 가끔 할 때도 있지만 현재는 병원 건축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현재 '죽음이 상실된 사회'라고들 말합니다. 그러한 말에 저 또한 동의를 합니다. 불과 20년 전만해도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지금하고 많이 달랐지요. 지금은 우리들의 삶에서 죽음이 차지하는 의미와 그 가치 그리고 인간에 대한 경건한 존중심이 시간이 흐를수록 결핍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바른 성찰이 회복되어야 삶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으로써 생명의 존엄함 또한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하여 강의를 하고 싶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가 못합니다.
하지만 자재병원을 중심으로 죽음에서 배울 수 있는 고뇌 무상함등 여러 가지를 통해 인간, 그리고 살아있음에 대한 존엄성과 사별에 대한 적절한 준비와 건강한 애도(哀悼)가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강의를 준비하고 있기는 합니다.
기자: 현재 스님께서 운영하시는 정토마을을 어떤 목적을 가진 그리고 무엇을 실천하는 공동체인지요?
스님: 저희 정토마을은 재단법인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사업목적은 임상전문 교육과 의료사업입니다. 탐진치 삼독으로 오염되고 상처받아 아픈 이들을 위한, 심신회복을 위한 임상전문가들을 배출하고 특히 스님들에게 상담과 치유 그리고 돌봄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어 포교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임상전문교육기관과 불치의 질병으로 몸과 마음 그리고 삶이 힘겨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의료복지 사업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비구니 스님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정토마을은 자재병원과 마하보디 명상심리대학원을 통해 보살행을 실천하면서 자비를 개발하고 수행을 통해 지혜를 개발하며, 일반적인 사회공부를 통해서 지성과 전문성을 갖추어가고 있으며, 사회적 지도자로써 그 역량을 성장시켜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하보디교육원을 통해 지역사회 청소년과 학부모들의 심신치유 교육과 임상에서 요구되는 각종 임상 전문 교육 등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죽음과 삶의 문제에 직면하여 지금 이순간의 위치와 상태를 자각하고 성찰하여 자신의 삶의 질을 높여가는 호스피스 교육은 현재 17년간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자: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겸허히 스님의 출가동기가 몹시 궁금해지는데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스님: 네, 27살에 처음 불교를 만났고 열반하신 법정스님의 책을 통해서 출가를 결심하여 31살에 출가하였습니다. 저는 출가만 하면 법정스님처럼 모든 승려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가장 인간적이고 자연적이며, 자연과 더불어 하나로 사는 삶을 책속에서 확인하여 출가를 결심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생각해보아도 출가는 나에게는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 아름답고 멋진 삶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허나 불교를 만나기 전까지는 개신교인의 신앙생활을 하였던지라 불교에 대해선 책으로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고 책속에서 그리던 출가의 삶, 그 출발 지점에서 나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만났으며 그들의 곁에 있게 되었습니다.
죽어감과 죽음에서 비롯되는 떠나야할 사람과 남아있을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고통과 갈등의 요소들은 나로 하여금 너와 내가 반드시 이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야한다는 간곡한 서원을 갖게 하였으며 고통이 있게 되는 원인들을 보게 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이 우리들의 삶에서 평화로움을 얻게 하는지를 배우게 하는 여정을 얻게 하는 호스피스 활동가로서 이 길을 걷게 되는 인연을 준 출가는 내가 이 세상에 와서 가장 잘한 일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기자: 스님이 생각하셨던 불교 수행자의 삶과는 차이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스님: 출가이후 3년이 지날 무렵쯤에 지인의 죽음을 보게 되면서 죽음, 그리고 죽어감에 대한 관심은 집중되기 시작하였지만, 나는 출가이전에 구체적인 불교에 대한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출가했기 때문에, 출가 이후 약 7년 정도 될 때 까지도 도대체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특히 불교인들의 죽음의 여정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건강한 젊음이 있을 때 스님들의 삶과 재가자들의 삶의 모습은 참 자유롭고 넉넉한 느낌이 많았지만 막상 힘든 질병으로 병상에 눕게 되면, 그때부터 외롭고 쓸쓸한 투병, 승가는 승가대로 재가는 재가대로 각종 갈등에서 비롯되는 고통들과 삶에 대한 집착 그리고 죽어감에 대한 무지, 준비 없는 죽음 앞에서 겪어야 하는 정신적 종교적 혼란과 공황상태 등등. 특히 16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불교가 죽음 앞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통해서 희망을 갖게 하는 종교적인 지지와 임상에 적합한 실제적인 돌봄과 의식이 없다는 것과 특히 이 분야에 전문가가 없다는 것에 절망감이 깊었습니다.
지금도 병원에서 죽어가는 그 분들과 그 가족들의 헤어짐에 대한 상실을 돌보고 자기 자신과 존재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 공포심을 완화하여 죽음이 고귀한 생명을 얻게 하는 또 다른 과정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고 수용하며 죽음을 준비하도록 돕는 전문가들이 많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약 15년부터 불교가 사회, 인간, 의료등 복지에 대하여 관심은 물론 참여로 그 분야에 새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한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죽음,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적절한 돌봄과 돌봄을 할 수 있는 도구들과 방법들이 있지 않아서 더욱 힘이 들어 임상에 적합한 기도방법 그리고 더욱 필요한 임종 의식 등을 여러 가지 문헌과 죽음에 대한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불교적 문화와 정서들까지, 찾아서 지금 불교 정서 속에 스며들도록 구성하는 작업도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수행의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죽어가는 과정과, 죽음을 맞이한 수없이 많은 분들과 함께한 그 자리가 저의 진정한 수행처였고, 동시에 수행 실천의 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자: 스님께서 특별히 이러한 일 들을 하시게 된 구체적 동기가 있으셨는지요?
스님: 앞서 말하였지만, 지인의 죽음, 그 사건은 나로 하여금 이러한 화두에 묶이게 하였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가슴 아픈 이별은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것인지?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지? 그리고 죽어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죽음은 모두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하는 것이 맞는지? 그냥 지나 칠 수 있었던 죽음과 관련된 사건이 나로 하여금 이 길을 걷도록 초대한 인연이 있었던 것이죠
다른 스님들은 선방을 가고 강원을 갈 때 나는 도무지 이러한 물음들이 머릿속에 가득히 담고 소록도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때는 이것 말고 그 어떤 것도 귀와 눈에 들어오지를 않아던 것을 보면, 이 일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기자: 그런 사연과 고뇌가 있으셨군요. 하여,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하게 된 인연이 시작 되었고요
스님: 네, 저의 출가 이후 약 3년이 지나갈 무렵, 평소에 신심이 깊어서 참선과 마음공부를 해오시면서 맑게 사셨던 분이셨던 63세 거사님의 췌장암 진단 그리고 3개월이 지날 무렵 그분의 마지막 모습을 임종 5일 전에 보게 되던 날 거사님의 고행상처럼 마른 몸에 까만 얼굴과 힘겹게 달려있는 약병들 그리고 복수가 차서 힘겨워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상태를 보면서 나의 뇌는 공황 상태에 빠져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냥 무섭고 두려웠던 기억 그리고 그 상황에서 도망치면서 병원 복도에서 만나게 되는 불자님들 .......... 죽어가는 자신의 가족들을 한번만이라도 살펴주고 가라며 붙잡던 그 가족들의 손길들도 무서워 뿌리치고 도망을 나왔습니다.
그 후 거사님께서는 5일 만에 돌아가시어 조문을 마친 저는, 저도 모르게 그 병동에 가 있었습니다. 환자 가족들 그리고 환자들의 모습을 가슴으로 만나면서 종교로부터 버려졌다는 느낌과 왠지 내가 책임져야 할 것 같은 강함 책임감에 사로잡히기도 하였습니다. 소록도를 시작으로 꽃동네 그리고 행려병동등을 돌면서 질병으로 고통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작은 바가지로 불을 끄려고 했던 나의 몸짓은 나로 하여금 온갖 갈등과 고통이 뒤범벅이 된 늪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했습니다.
많이도 분노하고 원망하면서 죽음에 끌려가는 분들을 보면서, 나 또한 이러한 현실에 함께 분노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지쳐가는 과정에 혼자 가는 이 길이 너무 외롭고 어려워 그만두고 싶어 나름대로 몸부림쳐 보았지만 그때마다 나의 발목을 잡는 애틋한 눈빛들을 차마 두고 떠날 수 가 없어서 더욱 힘들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기자: 그런 마음활동의 실천장으로 정토마을을 만들게 된 것인가요?
스님: 정토마을은 1997년 함께 활동하던 불자님10명과 함께 마음을 내었습니다. 병원 이 곳 저 곳 에서 부모없는 고아처럼 외롭게 투병하다가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가족과 환자들 그리고 혼자서 외롭게 죽어가는 불교인들을 보면서 너무나 마음이 많이 아팠고, 이 분들의 외로움과 고통이 너무나 처절했기 때문에 나의 미래나 출가의 다른 의미를 살펴볼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고, 그저 이 분들을 부처님 품에서 떠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1977년 봄 작은 종이컵에 연잎을 붙여 그 분들을 모실 땅을 살 수 있는 자금을 모금하기로 했습니다. 범어사 통도사 동학사 세 곳에서 모금을 했는데 첫날 나의 모금함에 오십원 동전이 첫 모금으로 인연되어진 금액이었습니다. 오십원 첫 모금을 시작으로 1998년 가을에 청원군 미원면에 약 4천 평 땅을 4천만원에 구입하는 인연으로 정토마을의 호스피스는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999년 겨울 현재 불교 호스피스 센터인 정토마을을 만들어 불치의 질병으로 죽어가는 분들과 그 가족들을 보살피기 위해서 2000년 이른 봄에 환자를 모시기 시작하였으며 그해 137명의 환자들의 죽음을 보살펴 드리면서 불교호스피스는 더욱 활발하게 세상과 소통하고 문명으로부터 그늘진 곳에 조금씩 빛이 되어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자: 정토마을을 운영하시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스님: 간호사 세 명과 주치의를 중심으로 정토마을 개원과 동시에 동네주민들이 정토마을은 혐오시설이라고 데모를 시작하여 그 데모가 3년간을 갔습니다. 주민들의 모함과 투쟁 그리고 온갖 민원과 고소 등등으로 저는 사흘이 멀다 하고 조사를 받으러 다녔습니다. 주민들은 주차장 옆에 울타리를 치고 수십 마리 개를 사육하였으며 사람들이 죽어가는 밤이면 개들이 더욱 짓는 바람에 힘겨웠던 나날들이 나로 하여금 엄청난 인내심을 배우게 하였으며, 사람들의 집단행동을 보면서 죽음에 대하여 얼마나 강한 저항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눈이 많이 오는 날 환자분께서 돌아가시면 돌아가신 환자분을 눈썰매를 태워 큰길가로 내려와 가족들이 집으로 모시고 가도록 하면서 겨울을 지나기도 하였으며, 설날아침에도 추석날 아침에도, 죽음은 시도 때도 없어 우리 곁을 떠나갔으며, 부모를 버리는 자식들, 형제를 외면하는 형제들, 늙은 부모를 두고 먼저 가야하는 자식의 기막힌 눈물과 돈 때문에 싸우고 미워하며 가족갈등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찾지 않는 자식들, 자식을 기다리다 눈을 뜨고 가시는 어머니, 두려움과 공포속에서 몸부림 치다가 죽음에게 끌려가는 죽음들 ....
기자: 정토마을이 비구니 승가 공동체의 모습으로의 변화와 자재병원건립 인연이 궁금합니다.
스님: 첫 번째 비구니 승가공동체 정토마을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한 것은 정토마을이 목적사업으로 규정하고 있는 의료사업을 통해서 자비심을 개발 성장시키고, 교육 사업을 통해서 지혜를 개발하고 성장시키는 것에 뜻을 둔 교계 비구니 스님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서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하는 실천을 통해서 사회적 지도자로서 승가의 위상과 전문성을 갖추어 시대에 가장 적절하고 적합한 전법활동과 전문가들을 배출하는 기관으로 역할을 하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 자재병원은 2002년 쯤 되었을 때 불치의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 특히 가난하고 가족 관계에서 문제가 있어 환자가 적절한 돌봄을 받을 수 없을 때 정토마을의 역할이 많이 필요했으며, 병실과 병실공간이 부족하여 기다리다 떠나시는 분들이 없도록 하기위해서 자재병원 건립을 결정했습니다.
또한 불치의 질병이 삶으로 길게 이어질 때 나타나는 가족들의 경제적 정신적 갈등과 적당한 입원 시설이 필요함과 함께 스님들께서 다양한 측면의 질명과 수술 등으로 전문적인 요양이 필요할 때 전문성을 갖춘 병원시설이 절실히 필요 했습니다. 스님들께서 치료에 있어 때를 놓치고 적절한 치료가 주어지지 않아서 병을 더욱 악화시키는 사례들과 법연으로 맺어진 승가의 관계성 안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요소들을 보면서 이 부분에서 정토마을이 힘이 되어야 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세 번째는 죽음의 문화가 사회적으로 너무나 내용이 결여된 형식적이며 관습적 패턴으로 변해가고 있음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삶 안에서 죽음을 직면하여 경험하는 상황들이 점점 작아지면서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건강한 관점들은 상실되어가고 죽음을 통해 떠나가는 사람들은 죽어지면 사람이 아니라 빨리 치워 버려야하는 그 어떤 쓸모없는 물건처럼 다루어질 때가 점점 많아지므로 정토마을이 한사람의 마지막을 존엄하고 경건하게 그리고 그 삶과 죽음이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아름답고 평화롭게 떠나갈 수 있도록 불교적인 문화와 정서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죽어감과 죽음의 문화를 회복하고자 자재 병원건립을 결정했습니다.
기자: 스님, 자재병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스님: 자재병원은, 셀프힐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죽음과 삶 그 어떤 지점에서도 스스로 가슴을 열고 다가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나의 것이며 내가 주인이기 때문이라는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재병원은 지하1층과 지상 3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08병상과 가정의학과 .내과 .한방. 대체의학과 등이 준비 될 예정입니다.
지하층은 자원 봉사자들을 위한 공간과 소박한 임종을 도와 줄 수 있는 공간과 시설이 준비되며 타 종교인을 위한 기도실 또한 준비됩니다. 1층은 호스피스환자들의 상태에 따라서 병실을 설정할 수 있는 가능을 가춘 전문성과 함께 일반 외래시스템을 갖춥니다. 2층은 각종 불치의 질병으로 중증 이상 그리고 외상으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 계시는 환자들을 위한 병동이며 3층은 승가 요양 병동입니다.
명상실과, 치유를 위한 방송실 그리고 치유식이 진행될 공간, 자연과 더불어 산책이 가능한 시설 등이 준비될 예정이며 현재 공사 60% 진행 중입니다.
기자: 자재병원 건립을 위해 ‘천일애 행복기도운동’을 펼치셨다고 하던데요.
스님: 우리들의 목적은 행복입니다. 그런데 행복한 사람이 없는 것 같은 현실 속에서 내가 나의 행복도 만들고 다른 이들의 행복도 만들어 질수 있도록 마음을 내어 주는 기도입니다. 매일 오후 1시가 되면 ‘땡’ 하고 기도문 문자로 뜹니다. 그때 잠시 세상과 나의 행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기자: 1만 5천명이 넘는 후원자를 모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고 사연도 많을 것 같습니다.
스님: 정토마을과 인연이 되어 함께 하시는 후원자를 다 기억 할 수는 없지만, 지나는 길에 당신께서 정토마을 후원자라 하시며 찾아오시어 병원 건립 진행 그리고 갖가지 목적사업에 관심을 가져주시면서 힘이 되어주시고자 마음 내시어 이 곳까지 다녀가 주시는 후원가족 한 분 한 분의 고귀한 사랑의 힘이 큽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분께서는 오랫동안 정토마을과 함께 아픈 몸을 이끌고 함께 해오시다 더 이상 이 세상에 머물 수 없는 지점에 왔을 때 당신께서 평소에 정토마을을 너무나 사랑하고 소중히 했기에 마지막 이 땅을 밟고 가신다며 작별인사를 다녀가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시고도 눈동자에 힘을 실어 힘내시라고 혼자가 아니라시며 부지런히 다녀오시겠다고 눈시울을 붉히시며 손잡아 주시는 그분들이 계셨기에 저는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평생 목욕탕을 운영하시어 자신의 집을 지어 사시다가 정토마을과 인연이 되어 그 집을 팔아 몽땅 병원 건립에 기부하시면서 자신들의 생활공간을 아주 작게 축소하여 삶을 소박하게 꾸려 가시는 거사님과 보살님의 원력과 신심, 그리고 소유지족하시는 삶을 비추어 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비구니 어른스님 한분께서는 아주 조그만 암자에 사시면서 반듯한 승복 한벌 없이 사시면서 일평생 조금씩 생기는 용돈을 쓰지 않으시고 모아 정토마을 땅을 구입하실 때 기쁨 마음으로 기부하셨던 어른스님을 통해서 나도 훗날 이와 같은 마음을 낼 수 있는 가슴을 가져야겠다는 배움을 얻기도 했으며, 그리고 평생 선객으로 사시다가 정토마을에서 6개월 투병 끝에 떠나시면서 베개 밑에 작은 푸른 주머니에 돈 4만원과 용기를 잃지 말기를 ...라고 글로썼습니다.
서원을 굳건히 하여 어떤 경계에도 산과 같은 부동심을 가지라는 편지를 남겨두시고 시장간 사이에 훌쩍 떠나신 노스님 등 정말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후원 가족 분들께서 내어주시는 혜량할 수 없는 깊고도 넓은 사랑을 통해 나 또한 그와 같은 사랑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기자: 불교 호스피스 활동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스님: 상구보리 하고 하화중생을 하기 위한 가장 적합하고 적절한 수행 방편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불교 호스피스는 이웃 종교에 비하면 아직 많이 열악하지요?
스님: 자재병원이 건립 완성되어 활동하게 되는 날 우리불교는 특히 우리종단은 결코 타종교에 뒤지지 않는 호스피스활동가들의 활약과 함께 사회적 역할 또한 한 부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자: 불교 호스피스 교육에도 열심이시던데, 마하보디센터 활동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스님: 마하보디 교육센터는 각종 수행과 임상에서 영적 돌봄을 위한 다양한 임상교육 그리고 특히 호스피스전문가 양성교육과 임종의식 교육 등과 청소년을 중심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이루어지는 치유와 돌봄의 교육들 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기자: 불교 호스피스 활동의 방향을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스님: 불교 호스피스는 결국 수행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타인의 죽어감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 매순간 찰라생 찰라멸하는 나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자각하면서 사는 삶을 얻게 된다면, 매순간 살아가는 그 삶에 최선을 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마음을 내어 쓸 것이며,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삶의 패턴에서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그 마음을 헤아리며 나의 존재가 언제라도 없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 100%의 한계성 속에 머물고 있다는 자각이, 나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 함께 하는 모든 생명들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게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배우고 성장시키며 제행이 무상함을 몸으로 체득하여 삶을 경건하고 알차게 그리고 인과응보와 연기법의 관점 안에서 후회하지 않을 삶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 100%이며, 그 죽음이 언제 올지 아무도 알지 못할지라도 죽음은 아주 가까이에서 나의 삶과 동행하면서 그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죽음은 오직 한번뿐인 생방송 같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삶 또한 오직 한번뿐인 매순간의 생방송 일뿐입니다. 나의 모든 것은 지나가고 또 지나가다가 아주 영원히 모든 것을 안고 지나간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
기자: 스님에게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스님: 나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죽음은 생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이 생에서 육체적 삶의 기간이 끝나고 재생을 위해 건너야할 필수적인 다리이며 다시 업력에 의해 재생된 삶을 향해 건너야할 다리라고 생각합니다. 수행을 완성하여 완전한 해탈에 들지 못했다면 .......
기자: 죽음을 대하는 현명한 자세는 어떤 것일까요?
스님: 평소에 지관 수행이 몸에 익어서 늘 깨어 있다면 더욱 좋겠고, 그렇지 못하다면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준비하면서 사는 삶의 태도가 죽어갈 때 많은 도움이 되며, 죽어갈 때 죽음이란 다리를 잘 건너 갈수 있도록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미리 갖추어두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모두들 어찌 살 생각만 하고 있지만요! 죽음을 생각 하면 더욱 잘 살아지는 삶의 지혜를 얻게 되기도 하고 머리에 불붙은 것처럼 수행을 구체적으로 하게 되는 동기를 얻기도 합니다.
기자: 스님께서 현장에서 본 죽음의 다양한 사연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스님: 현생의 삶을 보면 전생을 알고 전생을 예측하려면 지금 현재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면 안다고 하였습니다. 한사람도 같지 않는 죽음의 여정 그곳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모습, 그 모습을 통해서 인과법의 철저한 진실을 알게 됩니다. 하여, 나의 죽음의 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돈이 자신의 삶의 모두인 사람은 죽을 때 까지 돈 때문에 고통 받고, 독하고 모진사람은 죽을 때 독하고 모진 과보를 겪게 되며, 대책 없이 어리석은 사람은 죽을때 도 대책이 없고, 집착이 강한사람은 죽을 때 역시 그 집착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을 보게 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기자: 불교에서는 생과 사가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실제로 현장에서 보면 어떤가요?
스님: 생사가 진정 둘이 아닙니까? 저는 때때로 둘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훗날 수행이 더 깊어지면 죽음과 삶 그리고 태어남이 하나인줄 알게 되겠지요
기자: 스님께서 생각하는 불교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스님: 생명이 탄생하는 그 순간부터 특히 인간의 생명이 태어나서 삶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고통의 연속이므로 이 세상은 고해 바다라고 하신 부처님 말씀을 저는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선상에서 고통의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 한 고통은 재생 반복될 것입니다.
삼법인을 보면,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한시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끝없이 변하고, 일체개고(一切皆苦), 실체 없는 것에 집착하면 고통이 일어나며,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것은 실체가 없으며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삼법인을 바르게 자각하여 지혜, 자비, 평등, 평화를 현실의 삶에서 실천하므로 선업을 인연하여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라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기자: 스님에게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스님: 일체중생이 나와 다르지 않으므로 그 모두가 다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하기를 발원하는 저의 서원입니다.
기자: 앞으로의 계획을 전해주신다면?
스님: 국가와 인종 그리고 종교를 넘어서 불치의 질병을 예방하는 일과 불치의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 그리고 교육을 통하여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고 인간의 인간다운 품성을 성장시켜가는 교육을 실현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기자: 혹, 20년 후 스님의 모습을 상상하신다면?
스님: 위의 일들을 후배들이 실천함에 있어 어려움이 없도록 여전히 탁발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기자: 마지막으로 미주현대불교 독자 분들께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스님: 특히 고국을 떠나 해외에 정착하신 어르신들께선, 부족하지만 언제라도 저희 정토마을에 오셔서 편히 쉬셨다 가시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모실 것을 알려드리며, 부디 건강하시고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를 삶속에서 이루어내시길 발원 드립니다.
능행스님께서 환자를 돌보면서 쓴 일기 같은 책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에서 읽은 내용 중 하나를 소개하며
백구두 네 켤레
어느 여름, 칠흑 같은 밤중에 전화가 왔다. 이 곳에서 호스피스 교육을 받고 가신 거사님인데, 아버님께서 위독하여 임종할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거사님은 아내와 이혼한 뒤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간암으로 투병하시다 이승을 떠날 준비를 하신다고 했다.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매우 힘겹게 느껴졌다. 때마침 그날 아침 젊은 친구를 떠나보낸 터라 무척 피곤했지만 연락을 받고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고 지내는 거사님께 운전을 부탁한 후 나는 눈을 감고 쉬면서 처음으로 문경이란 곳에 갔다.
꼬불꼬불 산길을 넘어간 거사님이 사는 임대 아파트 1층, 문을 여는 동시에 안에서 사람 살 썩는 냄새가 진동하였다. 속이 확 뒤집히는 그 냄새는 정말이지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냄새 중에 가장 역겨운 냄새가 사람 살 썩는 냄새라더니...... 일주일 전부터 이렇게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고 했다. 호흡을 조절하면서 방으로 들어가 손을 꼭 잡고 임종 기도를 해 드렸더니 가만히 눈을 뜨고 날 바라보신다. 배는 만삭의 임신부처럼 불러 있었고 흑달이 심해 몸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 이불을 걷어 보니 사람 몸에서 떨어진 비늘과 악취가 진동했다. 방 주변을 좀 치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혀 드리고 싶었다. 거사님에게 향물로 아버지를 닦아드리고 새 옷으로 갈아 입혀 드리게 한 다음, 촛불을 밝혀 냄새를 좀 제거하도록 말하고 방을 나왔다. ‘세상에 사람이 살아 있는데 어찌 이렇게 심한 악취가 날 수 있는 것인지.....’ 기도를 해드리고 다시 정토마을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병실을 둘러본 후 이내 깊은 잠에 들었다. 밖에는 여름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새벽 1시 정도나 되었을까, 한 통의 전화가 급하게 울렸다. 거사님의 아버님께서 밤 12시 40분에 임종하셨다는 전화였는데, 온 동네 주민들이 냄새 때문에 못 살겠다고 난리가 났다며 나보고 꼭 좀 와달라는 것이었다. 오늘 새벽 날이 새면 시신을 모시고 나가야 하니 꼭 오셔야 한다고 했다.
아니, 조금 전에 운명하셨는데 시신을 새벽에 모시고 나간다구요. 그건 말도 안 돼요, 거사님!
아이고 스님, 주민들이 난리랍니다.윗층 아파트는 더 난리구요.
내 사정도 묻지 않고 무조건 와달라고 했다. 여름 장맛비는 장대 같이 쏟아지는데 다시 찾아가야 할 문경이 도대체 어디며 거사님 집이 어딘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미원에서 청천으로 간후 화양계곡을 넘어 봉암사 앞으로 지나가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새벽 2시가 다 되었어도 시신이 새벽부터 나가야 할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이 가봐야지.
나는 내 처지를 한탄하고 열쇠를 들고 차로 갔다. 당직 간호사가 비가 이렇게 오는데, 이 밤중에 어딜 가시느냐고 못 가신다며 나를 말렸다.
그래도 거사님 혼자 당황해 할 것이 눈에 선해 나는 차를 몰고 구녀산을 빠져나갔다. 자동차 바퀴가 물에 둥둥 뜨는 느낌이었다.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는 도로에는 비까지 쏟아져 앞도 보이질 않았다. 이럴 땐 ‘염불을 해야지’. 하면서 관세음보살님을 크게 불러보다가 ‘내가 이 밤중에 귀신한테 홀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빗길을 달려 청천을 지나 화양계곡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어둠 속에선 계곡물 소리만 정적을 깰 뿐 불빛도 인적도 하나 없는 깊은 산 속에 오직 나와 차만 빗 속을 더듬으며 가고 있었다.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다 보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람’. 이 밤중에 나는 어딜 가고 있단 말인가? 주인을 잘 만나야 고생을 덜 하는 법인데 내 육신은 아무래도 주인을 잘못 만난 것 같다' 는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빗속을 뚫고 꼬불꼬불 고개를 넘어 가면서 나는 펑펑 울었다. 울다 보니 차 뒷좌석에 법주산 뒷산 혼기들이 다 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귀신이 무서워지면서 슬슬 목이 조여 왔다. ‘우우우’ 하는 계곡물 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렸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졸도라도 할 것 같았다.
관세음보살! 나는 관세음보살님을 찾았다. 아이고, 관세음보살님! 어린 시절 엄마를 찾듯 나는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러자 두려움이 서서히 사라졌다. 오히려 귀신들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일어났다. ‘그래, 이 밤중에 비 맞고 허공중에 떠돌던 모든 귀신들까지도 모두 천도 되거라.’ 하면서 큰 소리로 광명진언을 외우다 보니 어느덧 문경 봉암사 앞이었다.
빗속에서 세 시간 동안 차를 몰았더니 문경이 나왔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초상집을 어찌 찾아야 할지 몰랐다. 누군가 지나가면 물어라도 볼 텐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길거리에 인적이라곤 없었다. 할 수 없이 자동차 바퀴가 돌아가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저만치에 불빛이 보였다. 오늘 돌아가신 영가가 나를 안내했는지, 그곳에 도착해보니 신기하게도 거사님이 눈 빠지게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게 아닌가.
거사님께서 같이 염을 하자고 하는데, 세상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시신에 덮인 이불을 걷어보니 여기저기서 물이 흘러내렸다. 장정 네 명과 함께 입관을 시작했다.
‘이놈의 거사님은 전생에 나랑 무슨 인연이이기에 날 불러 이렇게 아버지 염가지 해달라고 보챌까? 중 된 죄밖에는 없는데.....’
입관을 하면서 괜한 심술이 나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시신에서 나온 물이 새지 않도록 비닐을 깔고 휴지를 통째로 관속에 가득 채웠다. 아침 7시.
이제 시신은 냄새 때문에 어디론가 가야 한단다. 하지만 임종 24시간 이후에야 공식적인 사망진단서가 나오므로 그때까지는 마음대로 화장을 할 수 없었다. 영구차를 타고 밖으로 나와 면사무소 앞에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거사님께서 지역 사람이라 쉽게 사망진단서를 만들어 오셨다.
우리는 문경에 있는 작은 화장터로 갔다
시신을 들고 들어오니 관 밖으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 노릇을 어쩔까. 게다가 장례법도 가지가지. 화장법도 갖가지라 이곳에서는 탈관을 해 화장한다고 했다 결국 힘없는 관은 우지직 부서졌다. 화장터 직원들이 줄줄 물이 흐르는 시신을 화구에다 올려놓았다. 화장터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악취가 진동했다. 그때였다. 한구석에서 영감님 시신을 바라보며 서럽게 울고 있는 노보살님이 눈에 띄었다. 너무나 얌전하게 생긴 노보살님이 악취가 진동하는 시신 앞에서 가장 서럽게 울고 계셨다.
옆으로 다가가 그만 우시라고 어깨를 안아 주었다. 노보살님은 옛날에 고등교육을 받은 분이었다. 남편이 하도 잘 생겨, 인물 하나에 반해 시집을 왔는데 남편은 날마다 춤을 추러 다녔다고 하셨다. 춤? 그 옛날에 무슨 춤이..... 나는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영감님께서는 언제부터 춤을 추셨어요?
옛날에 일본에 가서 포크 댄스를 배워와, 한국에 최초로 보급했던 분이랍니다.
포크댄스라면 당신 영감을 따라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단다. 한번도 돈을 벌거나 가족을 책임지거나 해본 적이 없는 분이었단다. 한평생 노보살님께서 친정의 도움을 받고 작은 소일거리로 생계를 연명해 왔다고 하셨다. 그렇게 평생 춤을 추며 수십년을 객지에서 사시다가 병이 들자 아들이 머무는 문경으로 오신 것이었다.
그 악취는 그분 삶의 향기였을까? 결국 잿빛 가루 한 웅큼으로 작은 나무 상자에 담겼다. 파란만장하던 한 생애가 그렇게 끝난 것이다.
사십구재를 모시는데, 노보살님께서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오셨다. 보따리를 펴보니 백구두 네 켤레와 춤출 때 입는 화려한 의상이 내 눈에 들어왔다. 미운 정도 정이라며, 보살님은 다 태워드리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문경에서 화양계곡을 넘어온 그날 밤 이후 나는 공동묘지를 지나 갈 때 무서움이 일지 않는다. 무서움! 그것이 사라지니 한결 길을 가기가 쉬웠다. 기억한다. 장대같이 비가 쏟아지던 그날 밤, 한 죽음을 향해 달려가며 느꼈던 무서움과 두려움과 어둠 속 미로들. 그리고 내 인생이 서글퍼 운전대를 잡고 펑펑 울던 그 시간들을 나는 온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수행의 길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삶의 마지막 모습은 언제나 우리가 살아온 모습과 닮아 있다. 어떻게 죽느냐,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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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능행스님ㅡㅡ화이팅ㅡㅡ힘내세요ㅡㅡ아미타 부처님께 기도할께 용ㅡㅡ우리스님 ㅡㅡ잘버티게 해달라고ㅡㅡ그리고 지금처 럼 보살행을 행해 중생구제 행하시니ㅡㅡ꼭 그서원 이루게 해달라고ㅡㅡ훌륭하고 착한후원자 만나게 해달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