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침략과 여진의 침략명종~공양왕 (1)
고구려는 건국후 부터
북진정책을 수립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자 하였다.
당시 만주 일대는 거란이 강성하여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위협했다.
고려는 송나라와 친선을 유지하며 거란과 국교를 거부하였다.
국경지대에 여러 성을 쌓고 경비를 철저히 하였다.
성종 12년((993)에 송나라와 대립하던
소손녕 장수가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해 왔다.
서희가 외교 담판으로 물리쳤다.
현종 1년(1010)에 2차 침입이 있었다. 양규가 물리쳤다.
현종 10년(1019)에 3차 침략이 있었으나
귀주에서 강감찬에 의해 전멸되었다.
거란과 고려 사이에 넓게 자리잡고 살았는데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교류하며 지냈다.
12c에 들어 완엔부(完顔部)란 자에 통이링 되어 세력이 커졌서
주의 천리장성까지 남하여 처들어왔다.
고려의 윤관은 별무반이라는 특별부대를 편성해
여진을 정벌하고 그 일대 9성을 쌓았다.
여진족이 금(金)나라를 세워 거란을 멸망시키고 송나라까지 압박하여
중국 대부분을 찿이 하였으며 고려에 대한 은근한 압박을 가해왔다.
당시 실권자 이자겸이 여려 사람의 반대를 무릎쓰고
금의 사대요구를 들어 주었다.
이로써 금나라와 평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려 후기에 광산김씨 자손들이 크게 늘어나
평장사를 비릇하여 고관대작을 배출하여 일약 명문가로 자리를 잡았다.
1,김태현(15세)문정공파조, 김주정(14세)문숙공파조,
◎ 거란과 여진과의 전쟁은 2번째 장으로
2, 김 연(14세) 양간공파조. 김 규(14세) 장공파조.
김 영 (17세) 사온직장공파조, 김 이(14세) 광산현 제영시서 지음.
15세 문정공파조 휘 태현
문정공은 휘(諱)는 태현, 자는 북기, 호는 쾌헌 또는 설암이니 고려 후기 학자요, 명신이다.
아버지 감찰어사공 수(須)와 어머니 옥구군 대부인 고씨의
둘째 아드님으로 원종 3년(1261)에 태어났다.
일찍 15세 때 사마시(진사)에 장원으로 합격하시고
이어 16세에 문과급제하고 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충렬왕 28년(1302)에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갔을 때
「황제의 명으로 모든 진공사는 연경에서 대기를 명하자 “황제의 명을 어길지언정
황제가 있는 곳에 가는 것은 우리 군주의 명이니 어길 수 없다.”」고 하니
중서성이 허락하여 행재소에 가게 되었다.
황제는 그의 충성을 치하하여 「동동 행중서성 좌우사랑 중」으로 임명하였다.
충렬왕 32년(1306)에 「지도첨의 사사」로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왕부자간을 이간시키려는 무리의 흉모를 밝히고 돌아와 벼슬이 중찬에 이르렀다.
충선왕 3년에 다시「판삼사사」에 배명되었고 그 후 상위관제가 폐지됨으로
퇴관하여 10년간 집에서 유유자적 심신을 정양하고 학문에 전념하다.
충숙왕 9년(1321)에「첨의평리」에 기용되어「판삼사사」가 되었으며
그 후 요직을 두루 거쳐 충숙왕 15년
「삼중대광문하시중 수문관 대제학 겸 전리사사」로 치사하였고,
시호는 문정공이다.
공의 성품은 세인이 공평하다고 칭송하였으며
위용과 표상이 수려정엄하고
언어와 행동이 예법에 어긋남이 없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으나
응구 접대에 음성과 기색이 온유하고 유화하였다고 한다.
어머니를 효도로 받들고 교자(敎子)에 법으로 지수하고 친척 간에
돈목으로 화합하였으며
사람들과 함부로 교류하지 않았지만 원망하는 소리는 없었다고 한다.
공은 공무를 집행함에 지공무사하여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
진주하는 바가 모두 원대한 계책이었으며 모든 송사를 상호화해로 귀결하고,
이해득실과 기호욕념을 배제하였으며 언제나 몸가짐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충렬‧충선‧충숙 세 왕조를 섬김에 진퇴를 예의로서 처신해 매사에
조그마한 실책도 없었으며 국가 중요정책에 있어서
공에게 자문하여 시정하였다.
공의 저술인 훈(訓)과 교(敎)의 체제가 잘 짜여지고
시(時)는 청신(淸新) 염려하여
명시문(名詩文)으로 우리나라의 문장을 수집 편찬하여
동국문감(東國文鑑)이라 제목을 붙이니 상응 필적한 명칭이라,
자호(自號)를 쾌헌(快軒)이라 하고 만년에는 설암(雪菴) 이라 하였다.
성균시를 관장하여 이청등 70인을 얻고「지공거(시험관)」가 되어
박리 등 30여인을 얻어 당대에 명망 있는 선비를 발굴하였다.
공은 좌우위낭장 김의의 딸을 배필로 맞았으나 일찍 별세하고,
신호위 중낭장 왕정단의 딸을 취처하니 이분이 개선군 대부인으로 봉작되니
현숙하여 가정이 화목하고 삼형제를 대과에 급제시켜 국록을 받았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니
광식, 광철, 광재, 광로와 장녀는「예문관직제학」안목에게 출가하고
차녀는「예문관 공봉」박윤문에게 출가하였다.
김씨 부인이 1남을 낳고 여는 왕씨 부인 소생이다.
공이 충혜왕 원년에 70세를 일기로 서거하니
왕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며 제사를 올리고
문정이라 증시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상수(喪需)의 조달을 명하였다.
이해 11월 18일에 덕수현 해운산에 안장하면서
문인(門人) 계림군 최해가 묘지명을 찬술하여 이르되
아! 문정공이시여 당신은 국가 원로의 귀감이신데
어찌 홀연히 가시니 누구에게 의심된 바를 물으오리까.
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부러졌다 하오리까.
현철하신 스승님 저를 내버려두고 가시나이까..
아! 그 슬픔 그 감동이 공자를 잃은 자공의 심정이외다.
⁕문정공 부인은 고려 왕족으로 개성군 대부인 왕씨다.
시어머니 고씨부인을 향년 102세까지 정성을 다해 극진이 모셨다.
아들 네명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니 국법으로 종신토록 국록을 받았다.
종보 94. 11. 1.
14세 문숙공파조 휘 주정
고려 후기 문신으로 자는 지숙, 아버지는 증 문하평장사 경량이다.
1264년(원종6) 문과에 급제하였고 해양부녹사를 거쳐 이부시랑을 지내고
충렬왕 1년 대부경 좌사의 대부로 승진되었다.
충렬왕 5년 행정도감사가 되어 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가서
고려에 주둔해있는 원나라 군대에 바치는 공물을 면죄케 하였다.
김방경이 공을 세웠음에도 억울하게 유배된 것을 상소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좌부승지가 되었다가 충렬왕 8년(1281) 원나라 세조가
제 2차 일본정벌의 계획을 세우자
소용대장군 우부도통에 특진되고 이어 동지 밀직사사가 되었다.
일본 정벌 때 고려 원연합군의 부원수를 지냈고 연합군이 일본에 침입하였으나
태풍으로 실패하고 광정대부 도청의사(정2품)를 지냈다.
시호는 문숙공이다.
아들 유(15세)는 수문전 태학사를 지냈다.
유의 아들 윤장(16세)은 밀직부사를,
중간(16세)은 밀직사사였다.
광산김씨사, 관김씨약사. 광산김씨 종보.
2023년 5월, 편집자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