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과 여진과의 전쟁(2)
(명종~공양왕)
14세 연 양간공, 14세 규. 낭장공, 14세 김 이,
17세 김 영 사온직장
14세 양간공파조 휘 연
1215년(고종3)-1291년(충렬18) 고려 중기 문신, 초명은 중룡, 자는 기지.
시호는 양간(良簡), 아버지는 증 평장사 대린, 어머니는 익양군부인 광주 김씨.
천품이 준수 비범하였고 눈썹은 그림같이 아름답고 맑았으며
어릴 때부터 내시가(시중드는 아동)되어 임금을 가까이 모셨다.
고종 13년 시어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네 고을에 치적을 남겼으며 병부시랑 추밀원 부사를 거쳐 형부상에 이르렀다.
충렬왕 2년(1275) 경상도 지휘사가 되어
려‧원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전함 900척 건조자의 총책임을 맡았다.
이때 어느 날 밤 꿈에 허리에 찬 금어대(벼슬아치가 차고 다니던
황금 물고기 모양처럼 만든 주머니)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스스로 해몽하기를 “몸에 장식이 이미 갔으니 오래 머무를 수 없다.” 하고
사퇴하니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정2품)로 치사되어 물러났다.
초상화가 있었으나 임진란 때 불타 없어지고 화상찬만 남아있다.
1261년(원종2) 발행한 호적이
후손 부필(23세‧후조당 예안파)의 종가의 유물관인 숭원각에 보관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호적으로 보물(1018호)로 지정되어있다.
내용은 1271년 공의 나이 47세 때 작성된 것으로,
본인의 증조, 외가의 외조, 처가의 처증조까지 기록이 되어있다.
여자는 소사로 칭하고 남자는 이름과 나이, 여자는 나이로만 기록되어있다.
천성이 순후하여 모든 경사나 조상하는 일에 친소에 관계없는 사람이라도
간격이 없어서 세인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78세에 수를 마치니 시호는 양간공이다.
양간공의 화상찬
높고 훌륭한 평장(平章)이여, 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눈썹은 그림같이 아름답고 맑도다.
일찍이 내시로 임금을 가까이 모셨도다.
용이 아니면 봉이니 상서롭게 세상에 나리었도다.
나이 삼십이 못 되어 약관의 나이에 황금인패(조복)를 찾도다.
시주에 애휼을 끼치니 백성이 선정에 감사 노래하네.
정승자리에 오르니 곽양분의 부귀를 누렸도다.
아들, 사위, 생질이 조정에 가득하니
영화가 이어져 조무가 상접하니 문호가 휘황하게 밝았도다.
청풍만고에 길이 영당에 걸어 모시리라.
집에서 세 사람의 화상이 한 폭으로 되어 각각 찬(贊)이 있으니
한분은 중산대부 국학대사성 보문서학사로 치사한 김찬이요
둘째 분은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 판판도사로 치사한 김연이요
셋째 분은 증산대부 판비서성사 보문서학사로 치사한 김제이다.
김찬의 찬은 전하여 지지 않고, 김연의 찬은 위와 같고,
김제의 찬에는 조부가 동복이 있고 아버지 또한 그러하더니
공의 형제에 와서는 칠폭홍천(병풍)이 있다하였으니
다 문벌의 화려함을 성대히 칭찬함이다.
그러나 김찬과 김제는 김연의 일가인 듯 하나 상고할 수가 없다.
선조 26년 임진란에 화상이 소실되었으니 원통하도다.
14세 휘 김 규(金珪) 낭장공파조,
낭장동정(정6품), 아버지는 평장사 대린. 어머니는익앙군 부인 광주김씨다.
14세 휘 김 이(珥)
광산현 제영시서(題詠詩序).
충열왕 33년(1307)에 제안 황대전고를 지냈낸
이(珥)는 광산김씨 근원에 대한 가장 오래 된 문서다.
광산김씨의 시조공 흥(興)자 광(光)자께서
자리 잡은 서일동은 현재 행정상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이다.
시조공께서 이곳에 사셨다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충렬왕 33년(1307) 6월 제안 항대전고라는 벼슬에 있는
이(14세) 선조께서 쓰신 광산현 제영시서이다.
우리는 이 기록에 근거하여 우리 선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고려시대의 이 기록 외에 전 하는 것이 없었다.
조선시대 성종 2년(1471)에 당시 사헌부감찰(정6품) 벼슬에 있던
현회 선조(19세)가 쓴 글이 그 후 평장동 유허서이다.
제영시서를 확인하는 사료로 평가된다.
광산현 제영시서(光山縣題詠詩序)
이 고을은 신라 때 차사관이 있던 곳이다.
이때에 왕자 김흥광이 장차 난리가 있을 줄 알고 왕궁을 버리고
서인이 되어 이 땅 서일동에 와 사셨고 마침 아드님 한분을 낳으시니
식은 그의 이름이요, 각간은 그의 벼슬이니 지금의 평장사 품계이다.
식이 길을 낳으니 이때에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였으니
흥광께서 지혜롭지 아니 하리요.
고려 태조를 도와 왕업을 이루고
큰 공을 세우니 삼중대광을 주어 공신이라 칭하였다.
길이 좌복야 순을 낳고 순이 평장 문정공 책을 낳으니
책이 광종조에 문과에 장원을 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의봉문을 열고 말을 주어 마부로 하여금
고삐를 잡고 나가게 하여 후세에 그 모범을 보였다.
책이 평장사 정준을 낳고 정준이 문하시중 문안공 양감을 낳으니
양감이 1072년 송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 태묘(역대 임금의 사당)와
국자도(공자의 사당. 지금의 성균관)를 그려 왔다.
돌아올 때 소동파가 시를 지어주며 이르기를
"삼한 사신에게 주노니 새 그림이 낙랑에 가는 도다"하였다.
양감이 평장사 의원을 낳으니 의원(8세)은 나의 현조이다.
후세사람들이 왕자공께서 살던 곳에 평장사가 많이 나왔다고 하여
동호를 평장동이라 하여 지금까지 전하여 온다.
내가 이제 제안으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사연을 쓰는 것은
내가 일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 고을은 비록 나의 고향이지만
입조(入朝)한지 여러 대(代)가 되었으므로 이 고장 사람들이
본말(本末)을 알지 못하니 이런 까닭으로 이 말을 쓴다.
뒤에 오는 사람들을 꾸짖지 말기를 바란다.
시(詩)에 이르되 문정공 책은 해동에 어진 분으로 천장(天場))을 독보하여
후세에 전하였네.
음덕 입은 이 몸이 제안(提按)으로 돌아오니 평장동 한마을이 예전과 다름없네.
대덕 11년(1307) 6월제안 황대전고 김이 서
평장동 유허서(平章洞 遺墟序)
아! 평장동은 우리 선조 신라왕자께서 복거하신 곳으로
불대산이 주(主)가 되고 서석산이 전면이 되었다.
동일동과 서일동이라 서일동에 집을 지어 뒤에는 안심사와 인월암이 있다.
그 아래는 화암이 있으며
그 뒤에는 조계정과 관덕정은 낚시질하고 활 쏘는 곳이라.
화암의 남쪽에 있는 소루삼간은 예의를 강론하던 곳이다.
그 뒤에 관덕정은 출입하고 휴식하던 곳이다.
평장의 한 동네의 조그마한 땅도
우리 선조의 대대로 전해오는 기물이 아닌 것이 없도다.
또한 제안공(14세, 이)의 서문과 시구(詩句)에도 명백하지만,
오늘의 일로 옛날의 일을 생각하듯이
후일에 금일을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 우리 선조께서 학문과 예를 구하시고 낚시질하고
활을 쏘시던 곳이 완연히 남아 있으나 지키는 자손들이 없다.
이제 내가 이 고을에 세거하여 선조의 유적을 알면서도
능히 이어가지 못하니 어찌 통탄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강 그 전말을 기록할 뿐이다.
후손 통정대부 행 사헌부 감찰 현회(19세) 근서
17세 김 영(金 英) 사온직장파조.
고려말 사온서의 직장(종7품)지냈으며, 조선조에 공조참의로 추증됐다.
광산김씨사 광산김씨약사.
2023년 5월 편집인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