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과 호주 학자 사이에서 ‘인도에서 왜 불교가 사라졌는가’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일본의 불교학자 호사카 슌지 교수가 불교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인 인도에서의 불교 소멸에 대한 자신의 연구논문을 지난 7월 초 단행본 책(김호성 역)으로 발표하자, 지난 19일 월정사에서 열린 교수불자대회에서 호주의 판카즈 교수가 이를 강력하게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논쟁의 핵심은 “이슬람에게 안티힌두교의 위치를 잃었기 때문에 멸망했다.”라는 호사카 교수의 주장에 대해, 판카즈 교수의 “그것이 아니라 불교가 이슬람이 침공하기 이전에 이미 지지세력의 기반을 상실했기 때문에 쇠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반박이다.
이 논쟁이 관심을 끄는 것은 누가 더 정확한 분석을 했는가를 떠나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에서는 공히 뜨끔한 충격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인도불교의 멸망사가 먼 나라의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 앞에 당면한 현실을 말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이 논쟁은 주의 깊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일본 레이타구대 호사카 슌지 교수는 자신의 책 『왜 인도에서 불교는 멸망했는가』에서 불교가 쇠망할 당시의 인도이슬람 최고(最古)자료인 『차츠나마』를 통해 불교의 쇠망 요인을 분석해, 7∼8세기 서인도불교의 상황을 생생히 전달한다. 《차츠나마》는 711년 이슬람이 인도에서 처음으로 침공한 신드 지역의 이슬람 전파 경위를 담고 있는 사료이다.
호사카 슌지는 지금까지 제기돼온 기존의 불교 쇠망 원인들을 모두 소개하면서 그 이유가 그럴듯하지만 틀린 이유를 조목조목 제기한다. 우선 ‘이슬람 침공으로 망했다’라는 설에 대해 “이슬람 침공으로 불교가 쇠망했다면, 다른 종교들 즉 힌두교나 자이나교는 왜 망하지 않고 건재했을까. 따라서 이 설은 타당성이 떨어진다.”라고 지적한다.
둘째 ‘불교가 가진 이성주의적 경향(현실부정의 경향까지 포함) 때문에 심원한 철학을 발달시켰지만 일반 민중에 보급되지 않아 힌두와의 경쟁에서 졌다’라는 유력설에 대해 “《차츠나마》에 등장하는 당시 인도사회에서 불교는 결코 민중들에게 유리되지 않았고, 밀교적인 의식까지 수용해 민중들의 삶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라고 일축한다.
셋째는 ‘불교가 밀교화되면서 힌두교로 흡수됐다’라는 설에 대해서는 “불교는 가정의례나 일상 의례를 발달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힌두교 사회에서 불우했던 하층민이나 이민족, 상인계층이나 정통성을 갖지 못한 하층 출신의 왕(대표적인 예가 아소카왕), 이민족의 지배자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그래서 훨씬 더 많은 계층에 흡수될 수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훨씬 더 큰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라고 반박한다.
그렇다면 호사카 슌지 교수가 내놓은 불교 멸망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분석이 독특하고 신선하다. “이슬람 침략 이후 안티힌두교라는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이슬람이 대체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인도에서 불교의 정치적 역할은 소멸됐다.”라는 주장을 제기한 것이다.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침입하자, 불교가 인도사회에서 담당하고 있던 안티힌두교로서의 역할이 불안정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호사카 교수는 《차츠나마》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한다. 이슬람이 쳐들어와 “개종, 공물, 죽음 셋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불교 승려들은 당시 정치 지도자에게 항복을 선택하도록 권유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불교가 쇠망한 것은 이슬람의 침공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지만 무력적 탄압 때문이 아니라 이슬람이 불교가 인도에서 지닌 사회적 지분을 너무도 강력하게 삼켜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호사카 교수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호주 시드니대 판카즈 모한 교수의 주장은 어떤가. 그는 말한다. “불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이슬람을 수용했다는 《차츠나마》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이 쓴 한국사를, 이라크전을 일으킨 부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오류다.”라고. 판카즈의 주장대로라면 7~8세기의 불교는 대중적 지지기반을 이미 상실했고, 불교의 생명력이 병든 상태였다.
인도의 불교는 왜 병들게 된 것일까. 판카즈 교수는 가장 큰 원인으로 “힌두 의식을 받아들이면서 불교 본래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하게 된 점”을 꼽았다. 즉 7~8세기경 불교교단이 힌두교 의식을 받아들이면서 9~10세기경부터 불교는 힌두교와 크게 구분되지도 못했고, 인도 내에서 대중적인 지지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판카즈 교수는 “힌두교의 의식으로 변질된 불교교단에 대해 인도인들은 더 이상 유마경의 이상, 보살의 이상을 기대할 수 없었다.”라고 꼬집었다. 또한 “방대한 불교경전을 요약본으로 만들고, 요약본을 다라니로, 다라니를 만트라로 줄였는데, 일반인들은 만트라만으로 불교를 이해할 수 없었던 점도 불교가 지지기반을 상실한 이유”라는 것이 판카즈 교수의 설명이다.
이와 같은 반론과 재반론은 기묘하게도 오늘날 한국불교가 한국사회에서 참으로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 원인을 규명하는 모멘트를 제공해 준다.
돌아보면 우리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직장과 사회에서 불자임을 드러내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런 현실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초래된 것일까. 호사카 교수와 판카즈 교수의 학설은 현재 한국불교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는 것일까.
호사카 교수의 학설에서처럼 한국불교는 과연 절대자에 매몰된 특정종교에 대해 염증을 느끼는 다수 계층에게 대안이 되고 있는가. 대안은커녕 도리어 불보살을 절대적 신으로 둔갑시켜 손쉽게 종단과 사찰을 운영하고 있지는 않은가. 절의 불상을 십자가로 바꾼들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 신행을 묵인하고 있지는 않은가. 냉철하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판카즈 교수의 주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법불교보다는 방편불교가 성행하는, 부처님의 수승한 가르침을 배워 그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불교를 지향하기보다는 주술이나 기도, 구복으로 치달리고 있는 현실에서 불교가 설 땅은 갈수록 좁아들 뿐이다.
호사카 교수의 주장이든, 판카즈 교수의 반박이든, 이번 논쟁의 본질은 오늘날 한국불교계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교훈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한국사회에서 참으로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 원인을 찾게 해 주는 논쟁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이 땅에서 불교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절박한 국면을 맞이하게 된 21세기 초입의 한국불교가 대외적으로 분노를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내부적으로도 철저한 살핌을 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학종 미디어 붓다 대표